657화
“그러나…8천 병사가 전멸했습니다. 자그마치 8천입니다. 타이던의 병력은 궤멸 되어, 아직도 제대로 보충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듣자 하니 렌에서 넘어오는 괴물들을 막는 데도 힘이 부칠 정도인 것 같더군요.”
불쾌했다. 평생 전장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늙은이가 전투가 어땠네 하며 떠들어대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군터는 같잖게 떠들고 있는 노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따로 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그의 이름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어쩌면 다이시리 제레이스보다도 더 많이 들은 이름이었다.
‘체슈퍼 캄브라이.’
캄브라이를 이끄는 가주이자, 판니른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의 부친. 군터는 로드니 캄브라이를 알기 전에도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저런 자를 어찌 못 알아봤을까 싶었다. 그때도 면전에서 저리 입을 놀렸다면 부실해 보이는 이를 모조리 뜯어주었을 텐데.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안다. 그도 이제 위정자들의 화법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렌에 들어선 직후부터 임무를 끝낼 때까지, 얼마나 피 말리는 날들이 이어졌는지를 저 늙은이가 감히 짐작이나 하겠는가.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가던 체슈퍼 캄브라이가 목이 말랐는지 중간에 기침을 한 번 했을 때, 군터는 순간적으로 그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마음이 흔들리면서 억누르고 있던 기운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간 순간.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대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쥐새끼처럼 흘깃거리는 것들과는 다른,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은근한 시선이.
“…….”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황자가 이쪽을 바라고 있었다. 아무런 말 없이 던지는 시선이, 날뛰기라도 할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 군터는 황자의 은근한 시선을 압박보다는 도발로 이해했다.
그렇다. 도발이다. 마음에 안 드는 이 자리를 망가뜨리고, 아이처럼 투정이라도 부릴 것이냐고 약을 올리는 도발.
그렇게 생각을 하니 조금이지만 머리가 차가워졌다. 주제도 모르고 입을 놀려대는 늙은이는 여전히 꼴사나웠지만, 조금 더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8천으로 1천을 상대한다면 피해를 보지 않고 제압할 수 있겠지.”
체슈퍼 캄브라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도중에 끼어든 것이 불쾌한 듯했다.
“…장군. 아직 내 말이…….”
“그러나 8천으로 1만, 아니 5만을 상대한다면 어찌 아무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겠소.”
“렌에서의 일이 5만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어려웠다는 말이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소.”
“사실 장군이 그리 말한다면, 이 자리에 그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소. 여기에서 렌에 다녀온 이는 장군이 유일하니까. 허나…방금 장군이 한 말은 불필요했소. 난 장군의 과를 지적하려던 게 아니니까 말이오.”
노인의 이마에 진 주름이 작게 꿈틀거렸다.
“난 그저 내가 듣고, 알게 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오. 장군이 렌에서 잃은 8천 병력. 그 때문에 헤루스 남부에 전력의 공백이 생겼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외다.”
눈 가리고 아옹이지만, 여기서 물고 늘어져봐야 꼴이 우스워질 뿐이다. 군터는 입을 다물고 체슈퍼 캄브라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연륜이 어디 가지는 않는 것인지, 그는 교묘한 화술을 구사하며 간접적으로 군터의 공적을 폄하했다. 이 자리에 당시 렌에 있었던 사람이 당사자인 군터뿐이라는 것은 여러모로 이용하기 좋은 요소였다. 당시의 활약, 실책, 무엇하나 증명할 수 없으니 추측하기가 편하니까 말이다. 당사자가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은 변명처럼 들리기 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시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놓고 드러내는군.’
그렇다. 이것은 시비다.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으면서 신경을 긁는 것이 시비가 아니면 무엇인가. 주름에 반쯤 묻힌 눈에 맺힌 저것은 틀림없는 적의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말이 옳았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되도록 판을 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발밑도 보지 못하는 늙은이가 주제넘게 설쳐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갑작스레, 테리브란에 도착했던 날, 자이드라 멕시스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무리 피해도, 저들은 어떻게든 물어뜯을 거라 했지.’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의심이 든다고 해도 뭐 어쩌랴. 이미 판은 짜였고, 보아하니 여기서 조용히 발을 빼기는 틀린 것 같았다.
* * *
첫날의 회의가 파한 후. 군터는 짧게 틈을 내어 자이드라 멕시스를 만났다.
“어떠셨소.”
“봤으면서 물으시오.”
“짐작은 가지만, 내 생각과 장군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 않겠소?”
“늙은 캄브라이의 목을 분지르고 싶었다면 답이 되겠는가.”
“하하.”
과격한 표현에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소. 나 또한 그 주름살 많은 늙은이에 질려버린 지 오래라오.”
“그거 반가운 이야기지만, 잡설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오늘 밤에 보는 것이 어떻겠소.”
“바라던 바요. 이 사람이 찾아가리까, 아니면 장군이 오시겠소?”
“먼젓번에는 공이 나를 찾아왔으니, 이번엔 내가 갈 차례겠지.”
“좋소이다. 기다리고 있겠소.”
그리고 그날 밤. 군터는 은밀히 자이드라 멕시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자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감시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군터는 특유의 초인적인 감각을 십분 활용하여 감시자들의 눈을 속이고 어둠 속에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 그가 집을 나서서 멕시스 가문의 저택에 들어설 때까지, 따라붙는 눈길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의 감각을 속일 정도로 솜씨 좋은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군터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 장군.”
자이드라 멕시스는 근사한 식사자리까지 준비해 놓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술과 함께 먹으면 어울릴 것 같은 음식들이었는데, 맛은 어떨지 몰라도 외관은 무척 훌륭했다.
“눈에 불을 켠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인데.”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오.”
“과연.”
군터의 자신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른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뱃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싸구려 맥주부터 폐하께서 생전에 즐겨 찾으셨다는 폰토로의 적주(赤酒)까지, 제국에 있는 술이라면 뭐든 있소. 말씀만 하시구려.”
자이드라 멕시스는 애주가로 유명하다. 그런 그인 만큼 보유한 술이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그의 지하 창고에 가득할 술들에 흥미가 생겼지만, 오늘은 목을 축이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지. 이야기를 길게 끌 생각은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역시 용맹한 군인답게 시원시원하시구려. 바로 본론이라. 그것도 좋지.”
근사하게 차린 식사는 순식간에 뒷전이 되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던 자이드라 멕시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장군도 오늘 확인했을 거요. 저들이 장군을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확인했지.”
“오늘, 적잖은 모멸감을 느꼈으리라 짐작하오만…안타깝게도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오.”
자이드라 멕시스가 큼지막한 포도 알갱이 하나를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저들이 오늘 억지를 부려가며 장군의 공을 깎아내린 것은 곧 있을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오.”
“거래?”
“고렘 말이외다. 그 물건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장군도 짐작하고 있을 터. 그런 귀물을 강도처럼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땅히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소.”
“…….”
“저들은 필시 손상된 장군의 군공에 금칠을 하여 치켜세워주는 대신 고렘에 대한 권리를 받아내려 할 거요.”
“내 것을 내어주고 내 것을 가져간다? 우습군.”
“권력을 쥔 자들의 행사라는 것이 다 그렇다오.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곤 하지. 이 정도는 그나마 준수한 편이오. 전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말이지.”
“눈치를 봐서 그 정도란 말인가?”
자이드라 멕시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권력자의 탐욕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저들이 탐내는 것은 고렘이 아니오. 물론, 그런 귀물을 개인이 탐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저들이 보고 있는 것은 고렘이 아니라 크렘보르 장군, 바로 그대요.”
“난 단 한 번도 조정에 발을 디딜 생각을 한 적이 없소.”
“대신 쫓겨난 로드니 캄브라이와 손을 잡았지.”
“…….”
군터가 물끄러미 자이드라 멕시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으나, 누구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찌 알았냐는 질문은 하지 마시오. 손이 넓지 않아 증좌를 잡지는 못하더라도, 눈치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오.”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조심스러웠소. 나 또한 확신하지 못했었으니.”
“뭐라?”
“용서하시오. 장군을 한 번 떠봤소이다. 심증은 있었지만, 확실히 하고 싶어서 말이지.”
왜 사람들이 자이드라 멕시스를 일컬어 교활한 여우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말했듯, 눈치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오.”
“저쪽에서도 그럴 거라는 말인가?”
“온갖 암계가 판치는 조정에서 구르다 보면 저절로 눈치가 길러지게 되어 있소. 하물며 권세가의 주인으로서 수십 년을 살아온 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이제야 낮에 대전에서 있었던 일이 조금 이해가 될 법도 했다.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던 체슈퍼 캄브라이가 왜 두 눈에 적의를 띠고 있었는지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