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화
“장군. 테리브란의 성벽이 보입니다.”
보고하는 토어릭도 이런 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상관은 그가 보고하기 한참 전에 테리브란의 높은 성벽을 보았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시력은 맹금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다.
“이럴 때마다 매번 느낍니다만, 차라리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 더 마음 편한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다.”
관심을 두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고자 하지만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지금 이렇게 불려온 것은 고렘 때문이라고 하지만, 고렘이 아니었어도 결국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의심의 동물이다. 특히 권력을 쥔 인간은 살아있는 의심 덩어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항변한들 그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니 의심받는 자가 아무리 목에 핏대를 세워봐야 모두 헛것이다.
‘한때는 나도 비슷했었지.’
권력을 쥐고자 했던 때가 있었다. 더 정확히는 출세하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 심취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어설픈 와중에도 정열적이었던 것 같다. 매사에 의욕적이었고, 매일 밤 더 나은 미래를 꿈꿨다.
예전의 이야기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도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크렘보르 장군이십니까.”
테리브란의 성벽이 가까워질 무렵. 일단의 기마가 달려왔다. 선두에 있는 자는 낯선 얼굴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귀한 집안의 자제로 보였다. 세상을 쉽게 살아온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자신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기세 좋게 말을 달려온 그는 군터의 앞에 이르러 급속도로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군터가 억누르고 있던 기세를 흘리자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누구냐.”
“소…소관은 판셀 자하브라 합니다. 크렘보르 장군을 마중하라는 명을 받고…….”
보리스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무관을 겁박할 생각은 없었다. 군터에게는 남이 자신을 보며 어려워하는 것을 즐기는, 그런 악취미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멀찍이서 이 판셀 자하브라는 젊은 무관이 말을 달려올 때, 군터는 그의 표정에 어려 있던 악의를 읽었다. 숱한 사선을 건너온 그에게 있어서는 그 정도 악의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얼굴도 본 적 없는 젊은이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은 제법 의아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기를 죽여놓을 겸 기세를 드러냈던 것이다.
‘자하브?’
판셀 자하브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당연히 자하브 가문이었다. 제레이스에 버금가는 명문이자,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행사하는 권력가(家).
그리고 또 하나는, 판셀 자하브라는 이름이 묘하게 귀에 익다는 것이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잠깐 생각해보던 군터는, 이내 그 이름이 보리스의 서신에서 가끔 언급되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말하자면 아들의 동료인 셈이지만, 그가 기억하기로 보리스는 판셀 자하브에 대해 좋게 말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좋게 말하기는커녕, 대놓고 서신에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은근히 돌려서 흉을 보곤 했다. 속이 좁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나.
“네가 나를 마중한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자하브의 삼남이라고는 하지만, 한 주의 방위군단장을 마중하기에는 격이 떨어진다. 어쩌면 미리 한번 긁어보겠다는 심산인지도 모르지만, 군터는 개의치 않았다.
“앞장서라.”
“옛.”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든 판셀 자하브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솔롬에서 떠나올 때 수하들을 많이 끌고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기병 삼백. 깃발이 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도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문이기에 테리브란에 들어서면서 쓸데없이 주목을 받는 일은 없었다. 지나가던 백성들이 높으신 분임을 알아보고 황급히 길을 트거나, 고개를 숙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오늘은 자택에 가서 쉬시라는 명입니다. 입궁 명령은 따로 내려질 겁니다.”
“알겠다.”
군터가 병사들을 해산시킨 후 자택으로 향하자, 판셀 자하브는 그제야 돌덩이처럼 굳은 표정을 풀었다.
“공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의 수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판셀 자하브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얼굴을 마주 보기만 해도 혀가 굳어버리는데 대체 뭘 어찌한단 말이냐.”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 역시 내내 긴장이 되어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판셀 자하브에게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거야 이 자리에 있었던 이들만 아는 것 아닌가. 자리에 없던 자들이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인 것이다.
“빌어먹을.”
수하가 생각하는 것을 그라고 모를까. 판셀 자하브도 그의 수하와 같은 것을 우려했다.
‘정말 안 풀리는군.’
그는 근래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전에는 보리스 크렘보르에게 치욕을 당했고, 이번엔 그 아비 때문에 낭패를 보고 말았다. 크렘보르 족속들에 대한 악감정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촌구석에서 상경한 무장을 살살 긁어주면 되는, 싱거울 만큼 쉬운 일이었다. 말주변에 자신이 있었기에 자처해서 일을 맡겠다고 했다. 상대가 보리스 크렘보르의 아비라는 점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촌구석의 무장은, 그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은 다 저런가?’
자문하긴 했지만, 그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가문 휘하에는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가끔 가문에서 연회를 열거나 했을 때 그런 자들을 눈앞에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저 시골 무장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자는, 아니 같기는커녕 비슷한 느낌이라도 주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저자는 짐승이다. 사나운 짐승. 전하께서 저자를 아끼시는 이유를 알겠군. 저런 자는 험악한 전장에서 쓰임새가 있는 법이지.’
입맛이 쓰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고 자위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돌아가자.”
판셀 자하브와 그의 수하들은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섰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아버지.”
“잘 지냈느냐.”
“예. 그런데…….”
저택에 도착했을 때, 보리스는 이미 퇴청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아비를 만난 자식의 표정에는 반가움 대신 조심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예. 아버지께서 오시는 것을 알았는지, 정오쯤부터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슬슬 해가 저물려고 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부터 기다렸다면 한참을 기다린 셈.
“누구냐.”
“…서부 총독 자이드라 멕시스 공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서던 군터가 순간 멈칫했다.
“그는 지금 접객실에 있느냐?”
“예.”
“곧 가겠다고 일러라.”
보리스의 태도가 조심스러웠던 것이 이해가 됐다. 자이드라 멕시스라니. 그가 직접 찾아왔단 말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오늘 도착할 것이라고 짐작하고서 한참 전부터 와서 기다렸다. 도착하자마자 보겠다는 심산이 아니겠나.
로드니 캄브라이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접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 접근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일어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이드라 멕시스.’
일전에 만난 적이 있다. 한 연회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 그가 막 7황자에게 귀부했을 즈음이었다.
“오랜만이오 장군. 나를 기억하시오?”
접객실에서 다시 만난 그를 보자 예전의 그 짧은 만남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보다 얼굴의 주름과 흰머리, 수염이 늘었으나 두 눈만은 여전히 여느 젊은이 못지않게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억하지. 오랜만이오.”
서부 총독이라는 직위가 판니른의 방위군단장보다는 윗급일 테지만, 군터는 존대하지 않았다. 자이드라 멕시스도 말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편안한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셨다고 들었소만.”
“그랬지. 마음이 급해서 말이오. 이렇게 바로 움직이면 불필요한 눈길들을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군터는 자이드라 멕시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눈앞의 노인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 따로 친분도 없는 데다, 그가 바로 자신을 이 지저분한 구렁텅이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장군께서는 이 사람이 못마땅하시겠구려.”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조용히 지내던 장군을 이 시끌벅적한 판에 끌어들였으니까.”
“정확하오.”
자이드라 멕시스가 싱긋 웃었다.
“그에 대해서는 내 사과를 하리다. 허나 장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내게도, 장군에게도 말이오.”
“이해하기 어렵군.”
“장군은 이제껏 최선을 다해 중앙정치에서 멀어지려고 했었지. 허나 장군이 테리브란에서 멀어진 뒤로도 조정에서는 심심찮게 장군의 이름이 오르내렸소. 조정에 있는 자들은, 장군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장군을 잊지 않아.”
그가 적당히 식은 찻잔을 손아귀에서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않소? 다이시리 제레이스 공을 위시한 테리브란의 권세 귀족들은 장군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양보하게 하려 했소. 말이 양보일 뿐, 사실은 강압에 가깝지. 만약 일이 그들의 뜻대로 진행되었다면, 장군은 어찌 했겠소?”
“…….”
“물론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 이제껏 그래왔듯, 기분은 나쁘더라도 적당히 굽혀줄 수도 있었을 거요. 허나 장군. 생각해보시오. 과연 그게 끝이었겠소? 저들은 분명 머지않아 장군에게 더 큰 양보를 강요했을 거요. 그 후에는 그보다도 더 큰 양보를, 점점…끝도 없이 요구했을 거요. 내 장담하지.”
“그래서, 나를 위해 나섰다는 거요?”
“겸사겸사, 라고 해둡시다. 요는 우리 모두에게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는 거외다. 이보시오 장군. 나는 권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권력자들에 대해서는 더 잘 아오. 권력을 쥔 자들은 나누는 법을 모르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더 많이, 뿐이오. 더 많이 탐하고, 더 많이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 품은 마력이지.”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제 찻잔을 내려놓았다. 노회한 여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장군. 장군이나 나 같은 사람에게 퇴로는 없소. 선택지는 두 가지. 앞으로 나아가거나, 가만히 있다가 칼을 맞아 죽거나.”
“그대와 나를 같이 묶지 마시오. 내게 칼을 날릴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오. 그 한 사람은 제레이스도, 카리아도, 캄브라이도 아니지.”
“하하. 전하를 믿고 있는 거요? 보기보다 순진하시구려.”
“…….”
“장군. 전하는 조율자를 자처하는 분이오. 그분의 통치는 관대하나, 동시에 음습한 구석이 있지. 무슨 말인지는 장군도 아실 게요.”
안다. 7황자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면서도 앞으로 나서서 수하들을 휘어잡지 않았다. 그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스스로 욕망을 가지게 만들었다. 서로 탐하고, 경쟁하면서 날뛰도록 놔두었다. 때로 그들의 경쟁은 충성경쟁이 되기도 했고, 그리 건설적이지 않은 정쟁이 되기도 했다. 황자는 그 혼란 속에서, 자이드라 멕시스의 표현처럼 조율자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왔다.
‘나서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자이드라 멕시스의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추측이 맞건 틀리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 대비가 눈앞의 이 늙은 여우가 되어야 하는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겠지만.
“당장 답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소. 충분히 생각해보시오. 하지만 나는, 내 제안이 장군에게 있어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일 것이라 확신하오.”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돌아갔다. 그가 떠난 후, 군터는 홀로 접객실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