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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55화 (655/1,064)

655화

모페이브는 지식이 부족함을 토로했다. 하여 군터는 사령술은 물론이고, 온갖 술법적 지식을 담은 책들을 구해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술법에 관련된 물건은 귀했다. 세간에 흔히 퍼진 가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진정한 비전지식을 다루는 것은 재물이 있다고 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충분한 재물에 더해 막강한 권력까지 쥐고 있다면 비전지식이 아무리 진귀하다고 해도 못 구할 것은 아니다. 판니른 방위군단장이며, 솔롬의 성주인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은 7황자의 세력권에서는 어지간한 불가능은 가능으로 바꿀 만한 힘이 있다.

“흐음.”

군터는 모페이브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엔 인장을 찍은 명령서까지 발급해주었다. 그의 힘이 닿는 곳에서 모페이브가 제한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마땅한 물건은 없어 보이는군.’

모페이브의 입에서 아쉬움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시장에 와 있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시장이 아니라 암시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드러난 곳에서는 거래되지 않는 물품들이 대거 거래되었다. 합법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지역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는 곳인 만큼, 관에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해준다고 했다. 운영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던가.

역사가 긴 만큼 취급되는 물건들도 질이 좋은 편이라는데, 그럼에도 모페이브의 눈에 차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암시장이라고 해도 사령술에 관련된 물건을 다루기는 쉽지 않겠지.’

비전지식이라는 것이 다 진귀하다지만, 금기로 지정된 사령술은 일반적인 술법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이렇게까지 찾기 힘들 줄이야.’

열흘 동안 그가 돌아본 암시장만 해도 세 곳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사령술과 관련된 물건은 찾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전이라고 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기초적인 술수 몇 가지를 적은 두루마리는 볼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찾는 게 아니니.

‘암시장을 뒤질 것이 아니라 학파나 교단을 찾아야 하는가.’

사령술이 제국의 탄압을 받다 보니 사령술을 다루는 술사들은 전부 다 음지로 숨어들었다. 권세가들이 종종 저주를 익힌 사령술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니, 사실 작정하고 찾으려 한다면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군터 크렘보르가 사령술을 익힌 것뿐만 아니라 사령술을 이용해 뭔가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밖에 알려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무조건 피해야 하는 상황이니, 사령술사를 거느린 권세가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고려대상조차 될 수 없다.

‘홀로 연구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사령술사들도 분명 그들만의 조직이나 모임을 꾸리고 있을 터.’

그러나 제국의 탄압을 피해 음지로 숨어 들어간 이들이다. 그런 자들을 찾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을 은밀히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로군.’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있다면 어려워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깥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너무 크다.

‘장군의 구상은 특별한 부분이 있지만, 크게 독창적이지는 않다.’

사령술의 역사는 길다. 사령술이라는 분야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족히 수천, 수만이 넘는 사령술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 군터와 같은 구상을 한 이들이 없었을까? 그럴 리 없다. 분명 같은, 어쩌면 더 대단한 구상을 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충분히 연구도 됐을 수 있다.

‘분명 어딘가에, 관련한 지식이 있을 것이야.’

답이 있거나, 혹은 참고할 만한 지식이라도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는.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이 이토록 많구나.’

연구라는 것을 하다 보면 항상 부딪치는 벽이다. 자신의 모자람을 알게 되고, 더 깊고 넓은 지식을 갈구하게 된다.

‘지식. 지식이라…….’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암시장을 나오는 길에, 모페이브의 눈에서 묘한 빛이 반짝였다.

* * *

“소환령?”

사자가 전한 명령서를 읽은 후. 군터는 미간을 좁혔다. 사자는 긴장하여 몸과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지 않기를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살짝 일그러진 군터의 눈을 마주쳤다면 단박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을 테니.

“전하께서 덧붙이시기를, 이달 안으로 당도하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알겠다.”

사자가 물러가고, 군터는 한 손에 쥐고 있던 명령서를 살라스에게 던지듯 건넸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살라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읽어봐라.”

명령서를 읽은 살라스는 그제야 자신이 헛짚었음을 깨달았다. 상을 내릴지도 모르지만, 명령서에 적힌 주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성의를 표하기 위함일까요.”

“글쎄.”

말을 흐렸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멀리서 말 몇 마디로 수하의 것을 빼앗기보다는, 직접 불러서 설득 비슷한 것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성의를 보이려는 것이겠지. 그럭저럭 마음을 썼다고 볼 수 있으나, 군터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오라 가라 하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지금 같은 때는 더더욱.

‘야스메티의 빈자리가 크군.’

야스메티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고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황자의 사자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게 무슨 일인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야스메티는 없다. 살라스와 토어릭이 야스메티의 일을 나누어 맡았고, 꽤 잘 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스메티가 될 수 없다. 믿을만한 조언자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신경 쓰이는 일일 줄이야.

항상 잃은 후에야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라던가. 군터는 자신도 그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모페이브를 불러라.”

“예.”

이제야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려던 차에 자리를 비우게 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황자가 명령을 내렸으니 따르지 않을 수는 노릇.

“장군. 찾으셨습니까.”

“그래.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테리브란으로 가신다고…….”

“내 일에 자네를 끌어들이자마자 자리를 비우게 돼서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려치 마십시오. 장군께서 떠나계신 동안 부지런히 방도를 모색해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주게.”

* * *

군터는 테리브란으로 가는 도중에 하잘에 들렀다. 로드니 캄브라이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를 때마다 좋아지는군.”

“그렇소? 다행이군. 몸이 부서져라 일한 보람이 있어.”

로드니 캄브라이가 옅게 웃었다. 그게 꾸며낸 웃음이 아니라는 것은 묘하게 아련한 그의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정자 노릇이 취향에 맞는 모양이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말이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정자 노릇이라도 하면서 백생들의 신망을 얻는 것밖에 없소.”

아닌 게 아니라, 로드니 캄브라이는 판니른의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로 줄곧 민생을 살피는 데 힘써왔다. 그의 노력은 휘하 관료들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하잘 밖까지 퍼뜨리기 위해 로드니 캄브라이 본인이 이래저래 노력을 많이 하기는 했겠지만, 땔감이 없으면 아무리 불씨를 놓으려 해도 불이 붙지 않는 법이다.

전후에 몰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피폐해졌던 하잘은 부지런한 총독의 지휘 아래 훌륭히 과거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로드니 캄브라이라는 이름은 이제 캄브라이 가문의 쫓겨난 아들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를 벗어던지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판니른에서는 말이다.

“내 듣기로 이번에 장군을 끌어들인 것은 타라냐드 총독이라고 하더군.”

“자이드라 멕시스?”

“역시 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구려.”

무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워낙 정치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군터였고, 로드니 캄브라이는 그런 그를 잘 알았기에 그가 타라냐드 총독의 이름을 아는 것에 작게 감탄한 것이었다. 과연 타라냐드의 여우가 유명하기는 유명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본래 제레이스를 비롯한 테리브란의 귀족들은 그대의 보물을 날로 가로채려 한 것 같소.”

“보물?”

“아무리 테리브란 조정이 비밀로 하려 해도 들리는 것이 있지. 내가 아무리 이곳에 틀어박혀 있다지만, 여전히 테리브란에 내 귀가 멀쩡히 존재함을 잊지 마시오.”

“무시하려던 것은 아니오. 그나저나, 조정의 일 처리가 꽤나 무디군.”

“말했듯, 테리브란에 있는 내 귀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오. 또, 여러 사람이 아는 일을 감추기란 대단히 어렵지.”

“아무튼, 그래서?”

“일전에 다이시리 제레이스 공이 나서서 전하께 주청을 드렸소. 서부 총독부를 신설하고 그 자리에 자이드라 멕시스를 앉히자는 것이었지. 명목은 오랜 세월 타라냐드를 다스려오면서 인근 주에까지 영향력을 떨친 자이드라 멕시스로 하여금 아직도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는 서부의 몇 개 주를 회유하고, 이미 아군에 편입된 서부 주의 민심을 살피자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단지 그를 테리브란에 묶어두기 위함이었소.”

들은 적이 있었다. 야스메티는 테리브란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중 중요하다 싶은 것들은 반드시 보고했었다. 물론 군터는 테리브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별 관심이 없었기에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었지만, 그때 당시 야스메티가 서부 대도독부의 신설을 이야기하면서 자이드라 멕시스와 중앙 귀족들 간의 정쟁이 시작됐다고 한 것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그때 자이드라 멕시스에게는 명분이 없었소. 전하를 위해 더 힘써 일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한다면 이제 막 귀부한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받게 될 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에게는 장성한 후계자도 있었으니, 더더욱 서부 총독 임명을 마다할 수 없었지.”

그때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한 방 먹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억지로 테리브란에 묶어 두었다고 해도, 그가 그리 쉽게 당해줄 리 없었지. 다이시리 제레이스…그리고 그 외 테리브란의 귀족들은 자이드라 멕시르를 너무 얕잡아 본 것 같소.”

덩그러니 테리브란에 묶여버린 처지에 뭘 할 수 있겠냐고 방심한 걸지도 모른다.

“교활한 여우는 은밀히 세를 규합했지. 전하께서 급격히 세를 불리시면서 새로운 얼굴들이 조정에 들어섰으나, 기존의 귀족들에게 견제를 받으면서 몸을 움츠리고 있던 것을 그가 다시 끌어낸 거요.”

은밀히, 그리고 착실하게 동맹을 모으면서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실의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실은, 얼마 전에 내게도 사람이 왔었소.”

“자이드라 멕시스의?”

로드니 캄브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함께 하자더군.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소.”

로드니 캄브라이의 비원. 테리브란으로 돌아가, 자신을 쫓아낸 아버지와 자신의 자리를 가로챈 형제를 물리치고 가문을 잇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내가 그를 도와주면, 그 또한 나를 도와주겠다더군.”

“그래서?”

“답을 주지는 않았소.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만만치 않은 자라는 것은 알지만, 만만치 않기로 따지면 테리브란의 조정을 꽉 쥐고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거든. 기껏 몸을 일으켰는데 일을 그르치게 되면, 그때는 후일을 도모하기가 어렵지 않겠소?”

“말이 길어지는군.”

“이번에 장군이 테리브란에 가게 되면, 그곳의 사정을 소상히 살펴주었으면 하오. 어차피 이번에 테리브란에 가게 되면 장군은 정쟁의 중심에 서게 될 수밖에 없소. 아마도 자이드라 멕시스가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테지.”

“…….”

달갑지 않은 이야기지만, 군터 또한 앞으로의 일이 로드니 캄브라이의 말대로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지.”

그러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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