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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54화 (654/1,064)

654화

테리브란의 왕성 깊숙한 곳. 화려한 옥좌가 놓인 알현실에서 은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자가 기어이 모페이브를 빼갔습니다.”

“빼갔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지 않습니까? 모페이브라는 자는 본래 크렘보르 장군의 사람이었지 않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자신의 말에 딴지를 거는 상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상대, 자이드라 멕시스는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태연히 반응했다.

“이미 그자에게 한차례 언질을 주었었지. 그런데 이리 나온다는 건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으로 봐도 되지 않겠소?”

“언질?”

자이드라 멕시스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졌다.

‘저 늙은이가…….’

문득 자이드라 멕시스가 군터 크렘보르와 손을 잡기라도 했는지 의심이 들었지만, 곧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분을 삭였다. 타라냐드의 교활한 여우는 단지 자신의 행사에 훼방을 놓고 싶은 마음뿐일 것이다.

화는 나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일전에 자신이 멕시스 가문의 사업에 크게 훼방을 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테리브란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멕시스 가문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컸기에 대놓고 견제를 하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기어이 한번 해보겠다 이건가.’

그때의 일에 앙심을 품어서 이렇게 나오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이번 기회에 제레이스를 비롯한 테리브란의 권세가들을 눌러보려는 속셈일 것이다.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골치가 아프긴 하다.

‘이번에도 꿈쩍도 안 하시는군.’

곁눈질로 옥좌에 앉아 침묵하고 있는 황자를 살폈다. 그는 자신과 자이드라 멕시스의 언쟁을 담담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서서 중재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것이 황자의 방식이다. 따르는 자들에게 충분한 이권을 부여하여 누리게 함으로써 따르는 자들이 스스로 경쟁하게 만든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고 권력임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는 한, 그는 수하들이 언쟁을 벌이든 암투를 벌이든 관여치 않는다. 더울 때 바람을 찾고 추울 때 햇볕을 찾는 것이 사람인지라, 그러한 통치 방식이 마음에 들다가도 때로는 야속하기도 하다.

하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다. 이제껏 황자의 그러한 통치하에 권력을 쥐어왔었기 때문이다. 도전자를 음험하고 잔혹하게 짓밟고, 그들의 피와 살을 취하며 여기까지 왔다. 지금에 와서 만만찮은 도전자가 등장했다고 하여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답은 하나다. 이제껏 그래왔듯, 이겨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그 고렘이라는 물건은 크렘보르 장군의 휘하 술사가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고렘에 관해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 일단은 통보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협조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겉으로 꾸며낸 태도와는 달리, 명백히 이쪽을 겨냥한 발언이다.

“아직 렌의 일에 대해서는 논공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진 것을 내놓으라 한다면 그가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또한, 전하를 따르는 신민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그 말이 틀리지 않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봐야 하지 않겠소? 총독도 고렘의 가치에 대해 파악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기물의 가치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총독은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지?”

제법 날이 선 목소리. 그러나 자이드라 멕시스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크렘보르 장군 또한 고렘의 가치를 알고 있겠지요. 그러니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해할 것입니다. 허나, 그 조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따라 그의 반응이 달라지겠지요.”

“…….”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소매에 가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교활한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트집을 잡을 줄이야.

‘경솔했군.’

조금만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소 감정적이고, 경솔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자를 끌어들이려는 모양인데…….’

방금 자이드라 멕시스의 발언. 군터 크렘보르를 옹호하는 듯한 말투다. 미리 교감을 나눴을 거라고는 보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쩌면 그를 끌어들여서 ‘반 중앙귀족 연합’ 같은 것을 구축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미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났다는 거겠지.’

자이드라 멕시스는 교활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치밀한 자다. 그런 자인 만큼 철저한 준비와 확신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자이드라 멕시스를 테리브란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식을 볼모로 붙잡아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고령을 빌미로 다소 억지를 부려 그를 테리브란에 붙들어놨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그것이 더없는 악수였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자신의 땅을 떠나 낯선 곳에 덩그러니 떨어졌음에도 자이드라 멕시스는 특유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곳에 자신만의 세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숙였던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본격적인 권력투쟁을 선포하고 있다.

“제 생각에는, 전하께서 크렘보르 장군을 소환하시어 직접 말씀을 나누심이 옳은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성의를 보이시면 크렘보르 장군도 불만 없이 납득할 것이며…….”

황자를 보며 말을 이어가는 자이드라 멕시스를,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그의 왼쪽에 서 있던 중년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자가 날뛰도록 이대로 지켜보실 겝니까.”

“명분이 타당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대립하는 것은…영 그림이 좋지 않지요.”

“저들이 한데 뭉칠 것은 우려하십니까.”

정확하다. 하지만 그대로 인정해버릴 경우, 자칫 체면이 상할 수 있다. 하여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긍정 대신 옅은 웃음으로 답했다.

“우려한다기보다는…불필요한 부담을 질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줄일 수 있으면 최대한 줄이자는 겁니다.”

“논의가 필요하겠군요. 회의가 파한 후, 바로 보시겠습니까?”

대전 회의가 파한 후에 따로 자리를 갖는 것은 심심찮게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지금처럼 큰 사안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야겠지요.”

황자는 자이드라 멕시스의 진언을, 특유의 건조한 눈빛으로 일관하며 듣고 있었다. 표정만 봐서는 반응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황자가 저 교활한 늙은이의 진언을 받아들일 것을 알았다. 진언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쪽이 조정의 균형을 맞추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송구하오나…….’

속을 알기 힘든 조카님은 자신이 고삐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 생각이 틀리지는 않지만, 모든 말이 기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순한 말이 있으면 사나운 말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전하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겠습니다.’

* * *

군터는 모페이브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와 논의를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이야기하고, 모페이브의 의견을 들었다.

“음……. 장군께서 무엇을 구상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가능하겠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모페이브는 그와 같은 가능성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그만한 효율이 나오는지가 문제겠지요.”

“효율?”

“고렘과 같은 문제입니다. 쓰임새가 단순 노동이 전부라면 괜찮겠지만, 장군께서 생각하시는 건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군터는 모페이브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곧장 이해했다. 전투는 노동과 달리 격렬하다. 소모되는 기운의 양도 큰 데다, 전투 중에 크고 작은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부담을 극복하는 것도 문제고, 극복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과 재원도 문제다. 말 그대로 효율이 나오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흐음.”

모페이브의 의견은 군터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그저 막연하게, 언제든 꺼내서 쓸 수 있는 불사의 군대를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단순히 질 좋은 망령을 보관하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자신이 속 편하게 구상했던 목표가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고민을 좀 해봐야겠군.”

“저 또한 연구를 해보겠습니다.”

“그래. 연구를 위한 시설은 준비해두었다. 테리브란에 마련해두었던 것을 참고하여 최대한 꾸며보았지만,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있거든 언제든 말하게.”

“예.”

모페이브는 꽤 의욕이 있어보였다. 테리브란의 저택을 떠나며, 정확히는 보리스와 실비아를 떠나면서 다소 울적해 보였다는 할렌의 말과는 다르게 말이다.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모페이브의 헌신에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령술에 대한 것은 모페이브가 아니면 달리 논할 상대가 없으니, 그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효율이라.’

신선한 화두다. 투자를 받고 연구를 하는 술사들은 모두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군터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술사라는 자각도 없었을뿐더러, 이런 연구는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사고는 단순했고, 구상은 더 단순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앉아 머리를 굴리는 것은 그의 취미가 아니었지만, 렌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그를 적시고 있던 무료함을 달래는 데는 꽤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페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사령술은 고렘과는 달리 복잡합니다. 사기를 깃들게 하여 시체를 일으키는 것은 핵을 이용해 고렘을 일으키는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어찌해야 하겠나.”

“다른 여러 자료를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군요.”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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