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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53화 (653/1,064)

653화

“쯧. 바쁜 시기에 사사로운 일로 자리를 비우다니.”

다음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집무실로 향하던 중.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판셀 자하브가 은근한 어조로 비꼬았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에 보리스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을까 싶어 우스울 뿐.

그렇다. 우스웠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로우렌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그렇게나 미웠던(물론 지금도 밉긴 하지만) 상대가 이제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로우렌의 말처럼, 고양이가 야옹거린다고 해서 사자가 화를 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네.”

“뭐?”

태연한 대꾸에 판셀 자하브가 눈매를 찡그렸다.

“가문의 일을 본 것이야. 뭐,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가볍게 툭 던지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어느새 인상이 찌그러진 판셀 자하브가 다시 그를 붙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그저 수문부의 일만 신경 쓰면 되지만, 난 그게 아니라서 말이야.”

판셀 자하브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이제 보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흘렀다.

“…건방지군.”

“…….”

보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판셀 자하브가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거친 위압감을 뿜어내는 보리스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건방져? 말 조심하지 그래. 지금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자네와 내가 같은 신분인 것은 아니지 않나.”

“하! 난 자하브의…….”

“그래. 자네는 자하브의 삼남이지. 난 크렘보르의 장남이며, 후계자고. 이런 곳이 아니면 네놈은 나와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다. 그간은 내 철없는 도련님을 배려하는 마음에 참았다만…슬슬 주제를 좀 파악할 때도 되지 않았나?”

거침없는 폭언에 판셀 자하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살면서 이런 모욕을 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제껏 내심 무시해왔던 보리스에게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보리스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뜻밖의 일이 벌어지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것이다. 죽일 듯 쳐다보는 보리스의 눈과, 그의 살벌한 기세 또한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수하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병사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지금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이놈이 감히…! 뒷일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어제 먹은 술이 덜 깨기라도 했나? 순간 괜히 건드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는 동안, 보리스는 겉으로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게 맞다. 그동안 내가 너무 겁을 먹었어.’

좋게 표현하자면 신중했었다. 스스로도 그리 위안하며 판셀 자하브가 날뛰는 꼴을 용인했었고.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어리석은 변명에 불과했다.

감춰야 하는 것과 드러내야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감춰야 하는 것을 어리석게 드러내면 화를 입을 것이고, 그러내야 하는 것을 감추면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다.

로우렌은 그에게 그것을 일깨워주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치였지만,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보리스는 이제껏 그 간단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런 놈 따위에게.’

가볍게 쏘아붙인 것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서 굳어 있다. 내심 바락바락 덤벼들지는 않을지 우려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싱겁기 짝이 없다. 싱겁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이런 놈 때문에 그동안 속을 썩여왔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판셀 자하브. 그동안은 자하브 가문의 면을 봐서 참았지만, 이제부터는 주제 모르고 날뛰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삼남이라도 가문에서 배운 게 있을 테니, 자네와 내가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이 이후로 나에게 무례를 저지른다면…크렘보르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겠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이성과 감정이 뒤섞여서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 훤히 눈에 보였다. 보리스는 그가 그 혼란을 다스릴 시간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수십의 병사들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금 그가 공개적으로 판셀 자하브를 망신준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고 다닐 터.

‘이렇게 쉬웠던 것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숙취로 몸이 무거웠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상쾌했다. 보리스는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이 햇빛처럼 안온하게 느껴졌다.

* * *

토어릭이 말했다.

“몰던의 행사는 정말 교묘하군요.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부지런히 해들리르의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로 눈이 돌아간 해들리르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몰던의 교묘함은 그런 해들리르의 사각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움직인다는 데 있다.

“해들리르의 내분은 이제 돌이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가문 내에서 칼을 찬 병사들이 떼로 무리 지어 몰려다닌다더군요. 매일 해가 질 때마다 수십이 죽어 나간다고 합니다.”

“엉망이군.”

“죽은 가주가 보면 피눈물을 흘리겠지요.”

나름대로 미리부터 후계 문제를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이 모양이다. 몰던은 열심히 바람을 불었고, 그와 손을 잡은 이들도 열심히 땔감을 밀어 넣었다. 지금쯤 해들리르도 눈치를 챘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토어릭의 말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묻어놓은 철을 옮겨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슬슬 한 다리 걸치지 않으면 곤란해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살라스를 보내라.”

“예.”

해들리르 같은 권세가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본가가 있는 곳 주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물론 각 도시와 성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있고, 명목상 그들이 그곳을 통치하지만 실제로는 그 지역 유지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조세권만 없다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지역을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본래대로라면 주 방위군이라 하여도 그들의 행사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우는 다르다. 해들리르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그들의 다스리고 있는 땅 역시 불안정해졌다. 억지로 명분을 삼는다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이는 야스메티가 마지막으로 남긴 조언 중 하나였다. 그는 시기를 보아 해들리르의 일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차후 권리를 주장할 때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면서.

‘빈자리가 크군.’

야스메티가 하던 일은 살라스와 토어릭이 나눠서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일을 두 사람이 나눴지만, 그럼에도 야스메티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그 점은 군터도 군터지만, 직접 일을 나눠 맡은 살라스와 토어릭 두 사람이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해들리르 가문을 압박하고, 조율까지 해야 하는 무거운 임무. 하지만 그 임무를 맡은 살라스는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솔롬에서 야스메티가 맡았던 내무를 살피는 것보다야 해들리르 가문으로 가서 칼자루를 어루만지는 일이 백배 더 나았다.

‘돌아올 때쯤이면 복구 작업도 다 끝나 있겠군.’

솔롬을 나서는 길. 보리스는 이제 그럭저럭 옛 모습을 되찾은 솔롬을 시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내성 쪽 복구 작업은 끝난 지 오래다. 남은 것은 외성의 일부. 그리고 성벽 밖에 새롭게 해자를 파는 것 정도. 가벼운 작업은 아니지만, 쉬지 않는 일꾼인 고렘이 있으니 그리 어렵지도 않으리라.

‘해들리르 가문이라.’

살라스는 일전에 보았던 퀄릭 해들리르를 떠올렸다. 젊은 나이에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 인상적이었지만, 결국 그 자신감은 자만이었을 뿐임이 증명됐다. 물론 몰던이 손을 쓰기는 했지만, 대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라면 그 정도는 막아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당했다면, 그것도 그의 능력인 것이다.

‘외적이 내민 손을 붙잡다니.’

퀄릭 해들리르도 한심하지만, 그에게 맞서고 있는 자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외적의 손을 잡고 혈족과 다투다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살라스가 보기에 그건 비겁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그러고 보면…….’

해들리르 뿐만이 아니다. 저 아래, 제국 남부를 틀어쥐고 있는 황자는 어떠한가. 그가 아바시스와 손을 잡았고, 그들을 들여오기 위해 대협곡의 문을 열어줬다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7황자 쪽에서 그 소문에 한껏 바람을 불어넣은 탓에, 적어도 북부에서는 그것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북부에서 아말로페 트라소프라는 이름은 더이상 존중받지 못했다. 그는 황자이기 전에 나라를 외적에 팔아먹은 역적이었다.

‘권세를 위해 혈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고, 그다음은 뭐지?’

그다음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탐욕이라는 것에 끝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살라스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몸서리를 치며 길을 재촉했다.

* * *

아아아아-!

망령의 비명이 존재하지 않는 귀를 어지럽혔다. 군터는 그 처절한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아귀 안에 갇혀 날뛰는 망령을 자세히 관찰했다. 지금 그의 손안에 갇힌 망령은 엄밀히 말해 하나가 아니었다. 서넛, 어쩌면 그 이상의 영이 하나로 뭉쳐 뒤틀려 있다. 당연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나날이 흩어져 희미해진 망령들을 붙들기 위해 군터가 억지로 힘을 쓴 결과물이었다.

‘기만 늘렸을 뿐, 온전하지 못하니 의미가 없군.’

덩치만 크고 실속이라고는 없다. 이런 망령을 시체에 쑤셔 넣은들, 별로 효과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혀를 찬 군터가 손아귀의 망령을 으깼다. 한차례 큼지막한 절규를 끝으로, 더 이상의 시끄러운 소리는 없었다.

‘아직인가.’

이제 곧 할렌이 모페이브를 데리고 돌아올 터. 그때가 되면 이 답답한 연구에도 진전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군터는 오직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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