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마지막으로 이렇게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로우렌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에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래됐지.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말을 가려 해라.”
그라모트가 나직이 로우렌을 제지했다. 평소였다면 형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을 테지만, 이미 로우렌은 꽤 술이 들어간 상태였다.
“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오?”
“이놈이…….”
그라모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언성을 높이려는데, 보리스가 쓰게 웃으며 그를 말렸다.
“됐다. 로우렌의 말대로야.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
“보쇼 형님. 공자님은 아량이 넓으신 분이라니까. 그러니까 이런 자리도 마련해주신 게지.”
“끄응.”
그라모트는 타는 속을 꾹 가라앉혔다. 하고픈 말은 많지만, 보리스의 앞에서는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말마따나 이 자리를 마련한 이는 보리스였고, 이는 분명 긍정적인 신호였으니까. 좋은 자리의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네 말이 맞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보리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로우렌이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뭐, 다 공자님의 뜻대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너…그 입,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로우렌은 으르렁거리는 형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보리스를 보며 히죽거렸다.
“파헨델에서부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희 형제와 어울리기에는 공자님이 너무 대단해지셨지요.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공자님께 누가 되었을 테니까요.”
보리스는 노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게 웃으면서 잔을 채울 뿐.
“…섭섭했느냐.”
“뭐,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래도 이해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듯, 옳은 선택을 하셨던 겁니다. 그때는…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저희 형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을 때니까요.”
능청스러운 말투에 보리스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냐?”
“글쎄요.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지지 않았겠습니까? 나이도 먹었고, 힘든 경험도 꽤 했는데.”
“동생 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자님. 아직 철이 덜 들었습니다. 어설프게 능청과 말주변만 늘어서는…….”
“말주변이라도 있는 게 형님처럼 쓸데없이 무게만 잡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기어이 그라모트가 이를 악물었다. 보리스의 앞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손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보리스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형제를 보며 웃음기를 머금었다.
“달라지긴 달라졌군. 형을 아주 쥐락펴락하는구나.”
“공자님!”
그라모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긴 했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제법 풀렸다. 로우렌이 말을 다소 짓궂게 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보리스의 수용범위 내였다.
“부친께 워낙 엄하게 혼나다 보니, 형님에게 혼나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아지더군요.”
“힘들겠군.”
할렌이 병사들을 어찌 다루는지 아는 보리스다. 파헨델에서도 그는 병사들 사이에서 꽤 악명이 높았다. 자식들을 무슨 병사 다루듯 하겠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할렌은 더 심하게 하면 했지 약하게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두 아들을 쥐잡듯이 잡는다는 것은 이미 파헨델 때부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자식놈들 잘되라는 마음인 건 알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지요.”
“힘든 모양이군.”
“솔직히…적성에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라모트는 늠름해졌는데.”
“형님은 저와 달리 군인 생활이 잘 맞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그러고 보면 이들 형제는 같은 배에서 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많이도 달랐다. 체격도 체격이지만, 성격이 판이했다. 첫째인 그라모트는 체격도 크고 단단한 데다 성격도 거칠고 과감한 면이 있어 누가 봐도 할렌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던 반면에, 둘째인 로우렌은 평범한 체격에 성격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싹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군인은 제 길이 아닙니다. 나날이 확신을 더해가고 있어요.”
“그럼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봐야지요. 뭐, 다행히 우리 집안이 저 하나 놀고먹는다고 해서 가세가 기울 집안은 아니니까요.”
“할렌님이 가만 놔두지 않으실 것 같은데?”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에요.”
동생의 푸념이 이어지는 동안 그라모트는 묵묵히 잔을 비웠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로우렌이 이끌었다. 보리스는 로우렌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간간이 그라모트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들의 대화는 지난 몇 년간 있었던 일에서부터 최근의 근황까지 이어졌다.
“사실 나도 지금 생활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서인지, 보리스도 슬슬 마음이 풀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색했던 할렌의 두 아들, 과거 그의 유이(有二)한 친구였던 그들이 다시금 가깝게 느껴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마음의 빗장 하나를 옆으로 치웠을 뿐인데, 손도 대지 않은 문이 알아서 활짝 열렸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공자님은 젊은 나이에 크게 출세하셨지요. 게다가 아름다운 부인까지 맞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않다니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물론 그렇겠습니다만…보아하니 공자의 속을 썩이는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로우렌이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보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셀 자하브라는 놈이 있다.”
보리스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하브 가문의 삼남과 본의 아니게 척을 지게 된 것부터, 최근에 이르러 그의 우산 역할을 해주었던 상관이 전사하면서 판셀 자하브와 친분이 있는 새로운 상관이 부임하게 된 것까지.
보리스의 한탄 같은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내내, 로우렌은 슬쩍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리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그…자하브의 삼남이라는 놈 말입니다. 공자님의 말씀만 들어서는 어떤 자인지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자세하게 들려주시겠습니까?”
“자세하게? 뭘?”
“그자가 어떤 자인지 말입니다. 뭐 일화라든지, 그자의 됨됨이를 알 수 있을 만한 이야기요.”
“음…….”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지 의아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데다가 이미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한 탓에 보리스는 별 고민 없이 판셀 자하브와 관련한 몇 가지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말이 몇 가지 일화지, 그의 사감이 잔뜩 섞인 험담이나 다름없었다.
그 편향적인 이야기들을 들으며, 로우렌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입가에 걸린 미소는 보리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에 이르러 누가 봐도 비웃음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진해져 있었다.
“…뭐가 그리 웃기더냐.”
그렇기에 이야기를 끝내고 로우렌을 본 보리스도 그 비웃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처음에 그는 그 비웃음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생각하여 인상을 찌푸렸으나, 로우렌이 곧장 입을 열어 오해를 풀어주었다.
“공자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자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그 판셀 자하브라는 자가 너무 우스워서 말입니다.”
“우스워? 판셀 자하브가?”
뜻밖의 말에 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공자님이 어째서 그런 자를 신경 쓰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자님의 말씀을 놓고 보면, 그자는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한심한 작자임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설명이 필요한데.”
“처음에 그자가 공자님께 안 좋은 감정을 품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저 혼자서 부인 마님을 마음에 품고 있다가 공자님께 뺏겨 버렸기 때문이지요. 시작부터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연인을 뺏긴 것도 아니고, 혼자서 헛발질만 하다가 자빠진 것을 가지고 남탓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계속해봐.”
“시작도 시작이지만, 그 이후로는 더 한심합니다. 안 봐도 뻔해요. 그자는 틀림없이 공자님께 열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열등감?”
“예. 그자는 공자님을 시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로우렌이 혀를 낼름거리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묘하게 간사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보리스는 물론, 탐탁지 않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던 그라모트마저 귀를 기울였다.
“그자는 삼남입니다. 자하브라는 대단한 배경을 보지 마시고 삼남이라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십시오. 그…사이 좋다는 제 형이 급사라도 하지 않는 한, 그자는 절대 후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
“후계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의 귀족들이 어찌 살아가는지는 공자님도 잘 알고 계시지요? 가문의 직계라는 배경이 있으니 그럭저럭 한 자리 해먹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 가문의 중추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불문율과 같으니, 그 삼남이 아무리 제 형과 가깝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브란에 있으면서 귀족 가문의 생리를 익힌 그였다. 그는 로우렌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뭐, 그래도 그자는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가문에서 밀려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자하브라는 이름은 쓸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자의 자식 대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그자의 자식부터는 방계가 되니, 긴 이름은 유지하더라도 그걸로 크게 행세를 하기는 힘들어집니다. 그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듣자 하니 이미 결혼도 한 모양인데, 자식은 없습니까?”
“글쎄. 관심을 두지 않아 모르겠군.”
“뭐, 아무튼 중요한 건…공자님은 그자와 다르다는 거지요. 공자님은 크렘보르 가문의 독자이자 후계자이십니다. 벌써부터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흐음.”
어느 순간부터 보리스의 표정은 묘하게 풀려 있었다. 그는 이제 로우렌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판셀 자하브가 자신을 시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 것 같았다.
판셀 자하브를 떠올리며 불쾌해졌던 기분이 깔끔하게 풀어졌다. 그간 자하브의 삼남이 그에게 드러냈던 적의의 정체를 깨닫자, 문득 그는 판셀 자하브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고양이가 야옹거린다고 해서 사자가 불쾌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그자가 공자님을 이리저리 긁어대도, 어차피 선은 넘지 못할 겁니다. 자하브 가문이 크렘보르 가문에 비해 크고, 더 강한 권세를 손에 쥐고 있더라도 명분이 없는 한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합니다. 하물며 그 판셀 자하브라는 자는 후계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자하브의 가주가 열등감에 사로잡힌 셋째 아들을 위해 피를 보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예. 바로 그겁니다.”
이제 보리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는 기분 좋게 한 잔을 비우고, 직접 로우렌의 잔을 채워주었다.
“듣고 보니 네 말이 다 옳다. 대단하구나. 내 투정 몇 마디만 듣고 상황을 다 파악하다니.”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게 많지요. 하지만 멀리서 보는 사람은 다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 일이 아니라면, 더 객관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지요.”
“그래. 그 말 또한 옳다.”
씩 웃는 보리스. 그를 보며 덩달아 활짝 웃던 로우렌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또 한 번 교활하게 눈을 빛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공자님.”
“음?”
“정 그 판셀 자하브라는 작자가 걸리신다면…이렇게 해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무슨 소리냐?”
비릿하게 웃은 로우렌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보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라모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