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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51화 (651/1,064)

651화

“공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녕하셨는지요.”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할렌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염려해주신 덕에.”

오가는 말들은 겉만 보면 훈훈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 않았다.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예의상 건네는 한 마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할렌은 속으로 탄식했다. 예전에 보리스는 그를 보며 삼촌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말을 시작했을 때도 그가 첫걸음을 뗄 무렵에도 곁에서 지켜보았다. 보리스가 자라나는 과정을 쭉 지켜봐 온 그였기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보리스에게 자식의 정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리스가 자신에게 보내는 냉담한 눈빛이 더 괴로웠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장군께 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달리 서신 같은 것은…역시 없습니까.”

“예.”

군터는 어지간해서는 서신 같은 보내지 않는다. 전할 말이 있거든 사람을 통해 직접 전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장군께서 모페이브 공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로요?”

“그것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만, 이전처럼 잠깐 모셔오는 것이 아니라…아예 모페이브 공을 솔롬에 두실 계획입니다.”

“…….”

보리스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 왜 안 그럴까. 모페이브가 저택의 집사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할렌도 잘 알았다. 그가 테리브란에 남은 크렘보르 가문의 남매에게 조언자 겸 보모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도.

할렌도 내심 정 급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모페이브를 솔롬으로 빼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한 번 떨어진 명령에 토를 달 수는 없는 것이다.

“쯧. 실비가 아쉬워하겠군요.”

“바로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시일을 꽤 단축했으니, 사흘 정도는…….”

“그거 다행이군요. 아쉬운 대로 작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겠습니다.”

보리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든 집사와의 이별이 그리 아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마음이 단단하여 그 정도 일에 감정이 흔들리지는 않는 것이던가.

아무튼 용건은 끝났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면 될 텐데, 할렌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은 그럴 기회도, 용기도 없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된 김에 지독하게 엉킨 응어리를 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 일전의, 마님의 일은…다시 한번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보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용서를 구해요? 할렌님.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꽤 뻔뻔하십니다. 본래 그런 분이셨던 건지, 아니면 변하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달리…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구하는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게다가, 애당초 잘못을 저지른 건 할렌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작 죄를 지은 사람은 멀쩡히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서서 용서를 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 안사람의 잘못은 저의 잘못과 같습니다.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면, 결코 안사람 혼자 지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체 뭘 하자는 겁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할렌님의 목이라도 치기를 원하십니까?”

“공자께서 그래야만 하시겠다면, 그리 하십시오.”

쾅!

보리스가 주먹을 내리쳤다. 두꺼운 원목으로 된 탁자에 쩍! 하고 금이 갔다.

“허튼소리 작작 하십시오. 내가 그리할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아무리 보리스가 화가 났다고 해도 할렌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과거 그들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할렌이 부친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자신이 선을 넘어설 경우, 부친이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튼소리가 아닙니다.”

“그럼 기만이겠군요.”

“제가 어찌 공자를 기만하겠습니까. 저는 지금의 공자보다 어렸던 시절, 포대기에 싸인 공자님과 마님을 지키며 불타오르던 도시를 탈출했습니다. 그 후, 공자께서 지금처럼 자라나시는 모습을 계속 옆에서 지켜보았지요. 제게 있어 공자님은…단순히 섬기는 주인의 자식 이상입니다. 공자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알고 말고요.”

보리스의 찌푸린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굴 가득 떠올랐던 분노가 사라지고, 괴로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하아. 어찌 모르겠습니까.”

보리스도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이지만, 할렌을 삼촌이라고까지 부르며 잘 따랐던 그다. 지금 할렌이 했던 이야기, 적이 쳐들어 와 생지옥이 되어버렸던 거대한 도시에서 그가 칼 한 자루 들고 길을 열었던 이야기는 모친에게서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다. 그때의 일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지만, 할렌의 몸에 남은 무수한 흉터 중 그때 입은 상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리스는 할렌에게 친근함 이상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보다는, 늘 옆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차라리 그냥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뭉개고 있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이렇게 마음 불편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더이상은…비겁하게 굴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독하게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어렸을 적 자신의 말 고삐를 잡아주고, 무술을 알려주던 할렌이 떠올라서였다. 또한, 루시가 모친의 죽음에 원인제공을 했다지만 거기에 악의는 없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매듭을 짓겠다는 말입니까.”

“…….”

“정말 날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과거, 흉터는 있어도 주름살은 없었던 할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 환히 웃고 있던 꼬마 시절 자신의 모습도.

그리고 뒤이어, 함께 재미있게 놀았던 두 꼬마가 떠올랐다. 그라모트와 로우렌. 그때는 세상에 단둘 뿐인, 친구라 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녀석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지만, 과거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녀석도 함께 왔다고 들었습니다.”

“자식놈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그렇습니다.”

“로우렌은 일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라모트는 본 지가 오래됐군요.”

“…….”

“비겁해지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제게는 할렌님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비겁하게 느껴집니다. 아십니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보리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리던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용서하겠다는 말은…못하겠습니다. 제 마음을 제가 모르겠으니,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노력은 해보지요. 지금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 말씀만으로도, 마음에 얹힌 쇳덩이가 다 떨어져 나가는 느낌입니다.”

할렌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전장에서의 숱한 경험으로 굳어진 그의 마음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런 감정의 동요가 가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서부터 드러났다.

“두 녀석은 어디 있습니까. 간만에 보고 싶군요. 특히 그라모트 그 녀석은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어요.”

“두 녀석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쓰게 웃은 보리스가 나직이 읊조렸다.

“저는 그렇다고 치지만, 실비 녀석은 다를 겁니다. 녀석의 마음은 저보다 더 심하게 망가졌어요. 이렇게 말 몇 마디 나눈다고 해서 그 녀석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할렌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실비아는 보리스와 다를 것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루시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을 때, 실비아가 입에 거품을 물며 저주와 폭언을 퍼부었다는 이야기는 그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아.”

실비아를 떠올리자마자 바로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표정이 어두워진 그에게 보리스가 한 마디 조언을 건넸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제게 그런 것처럼 용서를 구하겠다느니 어쩌느니 할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십시오. 할레님이 녀석에게 목을 들이밀면, 녀석은 정말 칼을 휘두를지도 모릅니다. 아니, 필시 그럴 겁니다.”

“…….”

하나의 산을 가까스로 넘었지만, 그보다 더 험준한 산맥이 남았다. 암담했지만, 할렌은 좌절하지 않았다. 하나의 산이나마 넘은 것이 어디인가. 사실 그는 오늘 보리스를 만나기 전, 보리스가 끝내 용서하지 않을 것도 염두에 두었었다. 그만큼 그와 그의 안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컸으니까.

“두 녀석을 불러오세요. 오늘은…거하게 취해봐야겠습니다.”

“예.”

보리스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만이 감돌았다.

* * *

판셀 자하브는 수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예. 오후 업무는 미뤄두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더군요.”

“희한한 일이군. 그럴 녀석이 아닌데?”

그는 보리스 크렘보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가 성실한 사내라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겠지만, 무슨 이유가 됐든 간에 조금도 업무에 소홀하지 않는 그 자세 만큼은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업무까지 뒤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알아보니 오늘 크렘보르 저택에 외부인 몇 명이 들어갔다더군요. 복색으로 보아 군인인 듯한데, 아마 판니른 쪽에서 온 것인 듯합니다.”

“크렘보르 가주가 보낸 놈들이란 말이냐?”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음.”

판셀 자하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이유라면 납득 할 만하다. 가주의 전령이라면 분명 전하는 말이 있을 테고, 그 내용에 따라서 급히 움직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크렘보르 저택을 잘 살펴보도록. 뭔가 나오는 게 있으면 바로 알리고.”

“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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