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화
“이걸로 내성의 복구는 끝났습니다. 이제 외성을 손대야 하겠습니다만, 시가지 쪽은 어찌하실 요량이신지…….”
살라스가 물었다. 시가지 쪽도 이전과 똑같이 복구할 것이냐는 뜻이다. 이는 시가지를 복구한다고 해도 전처럼 백성들이 들어와 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담긴 물음이었다. 흉흉한 일이 있었던 만큼, 두려움이 많은 백성들은 숱한 이들이 죽어 나갔던 땅 위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리라.
“따로 마련할 필요는 없다. 이전과 달리, 솔롬은 군사 요새가 될 것이다.”
“예.”
백성들을 들어와 살게 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그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모든 행위에서 이런저런 세금을 거둘 수도 있을 테고, 주둔하는 병사들에게도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군터는 성에 백성들을 들이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는데,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몰던이 벌이는 해들리르 가문에서의 계략?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군터의 주 관심사는 아니었다.
“…….”
그는 요즘 무인보다 술사에 가까워져 있었다. 매일 연무장에 나가 창을 휘두르기는 하지만, 그런 시간보다는 홀로 집무실에 틀어박혀 조용히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아아아-!
절규가 들린다. 귀 있는 자들도 들을 수 없고, 귀 없는 자들도 들을 수 있는 소리. 기감이 발달한 자라면 이 영적인 비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찢어지는 생생한 고통의 단말마는 사실 거짓이다.
‘흠.’
군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 갇혀 꿈틀대던 망령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다. 동시에 시끄럽게 터져 나오던 절규가 끊어졌다.
‘의식을 집중하면 가둬 둘 수는 있다.’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 의식과 약간의 술력을 사용하면 굳이 사령술이 아니라도 망령을 구속할 수 있었다. 다만 군터는 이게 모든 술사가 다 가능한 일인지, 아니면 농밀한 사기를 지닌 자신만이 가능한 일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의미가 없지.’
확실히 가능성을 보기는 했지만, 이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고작 망령 한 마리일 뿐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꾸준히 의식하며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잠시라도 주의가 분산되는 순간 갇혀있던 망령은 그대로 달아나버리니, 이대로는 써먹을 수가 없다.
‘영구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는 건가. 아니, 그래도 의미가 없겠군.’
굴복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이지가 남아 있지 않은 망령들은 약간의 위압만으로도 쉽게 다스릴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들을 어찌 보관하느냐다.
제아무리 원한이 깊은 망령이라 할지라도 보름을 넘기기는 쉽지 않다. 군터가 원하는 것은 그 한계를 깨고, 나아가 원하는 때에 꺼내서 써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보관. 보관이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새로운 술법이었고, 그다음이 법구였다. 사령술의 기본이 망령들을 제압하고 다스리는 것이니, 어쩌면 망령들을 보관하는 방법이 이미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령술이 원체 은밀한 분야인 터라, 그런 게 있다고 한들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니 첫 번째를 택한다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방법을 어떻게든 구하거나…아니면 그런 술법을 아예 새로 만드는 것밖에 없다.
이 경우는 가능성도 가능성이지만,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군터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에 마음이 쏠렸다.
‘법구. 흐음…….’
어찌 보면 뭐가 다른가 싶을 것이다. 법구라는 것이 결국 술법의 힘을 물건에 부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군터가 괜히 법구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것 같은데.’
다소 엉뚱할지도 모르지만, 군터는 기석을 떠올렸다. 순수한 기운의 응집체. 다른 술사들은 어떨지 몰라도, 군터는 망령과 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망령은 기에 비해서 약간 더 활발할 뿐.
‘망령을 구속하여 억제하고 힘만을 활용한다면, 그게 기석에 뭉친 기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다른 술사들이 들으면 터무니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터는 그리 생각했고,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다.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겠군.’
일반적인 술법의 연구였다면 아무 술사나 데려다 놓고 자문을 구하거나, 아예 연구를 일임시켜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연구하는 분야는 금기시되는 사령술.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줄 술사는 흔치 않을 터.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이번에도 모페이브에게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불러와도 괜찮겠지.’
모페이브는 고렘에 관한 보고를 위해 솔롬으로 왔다가 지금은 다시 테리브란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저택을 관리하고, 그곳에 있는 보리스와 실비아를 보살피는 것이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식들도 머리가 굵었고, 테리브란의 저택을 관리하는 것도 크게 손이 갈 것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 모페이브의 연구도 끝이 났으니 이제는 그를 솔롬으로 불러와도 될 것 같았다.
‘녀석도 어린아이가 아니니, 제 몫은 할 수 있을 터.’
실비아는 아직 어리지만, 보리스는 이제 가정까지 꾸린 한 사람의 사내다. 그간 올라왔던 모페이브의 보고를 떠올려 보면, 녀석은 이제 제 나름대로 앞가림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녀석에게 보모는 필요 없으리라.
* * *
할렌에게는 루시에게서 본 자식이 둘 있었다. 모두 사내로, 보리스의 또래였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친구가 없던 보리스와 매일같이 붙어 다닐 정도로 친했었는데, 보리스가 나이를 먹고 파헨델로 올라갔을 때 함께 따라간 그들 형제가 사고를 치면서 사이가 소원해졌다. 보리스가 그들 형제의 경박함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다.
그 뒤로 그들 형제는 아비인 할렌을 따라다니면서 군문의 일을 배웠다. 할렌의 가르침은 가혹해서, 결코 자식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자식이기에 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덕분에 말랑말랑했던 형제의 정신 상태는 이제 군기가 바짝 든 군인의 그것으로 탈바꿈했다.
“영 적응이 안 되는구만.”
아침에 눈을 뜨고 방을 나서면서, 로우렌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방에서 나오던 형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잘 잤습니까?”
“그럭저럭.”
“난 아직도 잠자리가 적응이 안 되오. 눈을 감는 건 쉬운데, 뭐랄까…자다가 중간중간 깬단 말이지.”
“어째서?”
“모르겠소. 영 섬뜩한 기분이 들어. 벌레들이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도 얼핏 드는 것 같고. 어쩌면 이게 그 망자들의 저주라는 것일지도 모르지.”
“실없는 소리.”
그라모트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로우렌은 냉랭한 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렸을 적에는 어떤 장난도 다 받아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던 형이었는데 이제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하긴, 부친의 그 혹독함 아래서 몇 년을 보내다 보면 웃음을 잃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그의 형은 형이라는 이유로 그보다 더 엄하게 교육을 받았으니.
“그나저나 형님. 이번에는 집에 다녀오실 겁니까?”
“그래야지. 어머니께서 편지까지 보내셨는데.”
파헨델에서의 일로 부친이 본격적으로 매를 들기 시작하자 눈물로 그를 만류했던 것이 모친이었다. 그 후로 줄곧 그들을 테리브란에 머물게 할 것을 요구했으나, 매사에 모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던 부친은 처음으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친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달에 대여섯 번씩 오는 구구절절한 편지에서 그 심정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버지가 옳다.’
모친이 보낸 서신에는 매번 부친에게 테리브란으로 가고 싶다 청하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지만, 그라모트는 한 번도 그런 청을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군문에 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부친은 아버지이기 이전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혹독한 가르침 하나하나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그라모트 스스로도 느꼈다.
‘공자께서는 훨씬 전부터 알고 계셨던 거겠지.’
어렸을 때부터 어울렸던 보리스가 그들 형제를 밀어냈을 때는 마음속에 서운함과 원망만이 가득했다. 심지어 배신을 당했다고까지 느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보리스가 왜 그랬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분명 자신들의 철없음에 실망했던 것일 터.
그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그라모트는 이를 악물었다. 원망하는 마음은 사라졌지만, 대신 부끄러움이 그를 지배했다. 때문에 언젠가 보리스를 다시 보게 되면, 그때는 부끄럽지 않게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 보리라 다짐했다.
“이번에도 공자님을 안 보실 겁니까?”
“아니.”
별 기대 없이 물었던 로우렌이 뜻밖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이번엔 만나실 거요?”
“그래.”
그 다짐으로부터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어쩌다 테리브란에 들리게 되었을 때도 의식적으로 보리스를 피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어느 정도 마음이 굳어졌다. 이젠 부끄럽지 않게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모트. 로우렌.”
연병장으로 나가는데, 그들보다 일찍 밖으로 나와 있던 할렌이 둘을 불렀다.
“예. 아버지.”
“너희 둘, 닷새 뒤에 테리브란으로 가게 되었지?”
“예.”
“일정이 당겨졌다. 이틀 후다. 이틀 후에 나와 함께 간다.”
“예에?”
로우렌의 표정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복구되기는 했지만, 떨떠름한 기색은 다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친과 함께 가게 되면 테리브란까지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나 다름없어지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봐야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답답해지는 그였다.
반면 그라모트는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다만 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혹, 크렘보르 장군께서…….”
“그래. 장군께서 따로 명을 하신 일이 있다. 그러니 아무 말 말고 철저하게 준비해놓거라.”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라모트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