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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48화 (648/1,064)

648화

“몰던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해들리르의 가주가 죽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해들리르의 삼남, 라샤 해들리르는 부친이 살해당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퀄릭 해들리르가 부친을 독살했으며, 이는 자신에게 가주 자리가 돌아올 것을 두려워해서라는 것이다.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주장이었지만 의외로 그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가문의 원로들이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퀄릭 해들리르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며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만…가문 내에 그의 편은 많지 않습니다.”

퀄릭 해들리르에게 줄을 선 가문 내 인사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데 가문 내에 그의 편이 많지 않다니, 얼핏 들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에게 수하들은 많습니다만, 그를 지지해줄 세력은 없습니다. 너무 일찍 후계자가 된 탓인지, 그는 수하가 아닌 지지자들을 너무 냉랭하게 대했지요.”

요컨대 너무 일찍부터 가주가 된 것처럼 행세했다는 말이다. 그의 고압적인 태도는 여러 이들을 굴종케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여러 이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는 데도 크게 일조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대다수의 원로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퀄릭 해들리르가 가주 자리에 오르면 자신들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퀄릭 해들리르가 가문의 사병들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몰던의 병사들이 라샤 해들리르를 돕고 있지요.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기는 힘들 겁니다. 무리를 하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가뜩이나 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흉흉한 소문에 기름을 붓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야스메티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끝났다고 생각하나?”

“아직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퀄릭 해들리르가 처음에 미숙하게 대응을 한 것이 컸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로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의외였고 말이지요.”

“이해가 안 되는군. 그래도 일찌감치 후계자가 된 자인데, 그렇게까지 원로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수가 있는 건가.”

“퀄릭 해들리르의 독단적인 성격도 한몫했을 테지만…몰던이 미리 수작을 부려놓았을 가능성이 크지요.”

퀄릭 해들리르가 아무리 오만하게 굴었다고 한들, 그는 공식적인 가문의 후계자다. 그런 그에게 대놓고 반기를 든다는 것은,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한들 쉽지 않은 일. 몰던의 은밀한 지원과 부추김이 없었다면 그들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몰던에게 가문을 내주는 꼴이 아닌가.”

“가문이든 뭐든, 자기들이 살고 난 다음의 일이라는 거겠지요.”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이다. 만약 퀄릭 해들리르가 그들에게 약간의 숨구멍만 열어줬다면 그들이 몰던의 손을 잡지는 않았겠지만, 철없는 후계자는 너무 오만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었는데도 반반이라는 건가?”

“몰던이 라샤 해들리르를 지원하고 있지만, 그 지원은 은밀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퀄릭 해들리르가 비록 적을 많이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일찌감치 후계자가 된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쉽지 않을 테지요. 무엇보다, 몰던은 이 소란이 금방 끝나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형제간에 치고받으며 해들리르의 세가 깎여나가기를 바랄 거라는 말인가.”

“예. 몰던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겁니다. 형제가 서로 물어뜯으며 피를 보는 동안 해들리르의 세는 점점 쪼그라들 테고, 몰던은 그 피와 살점을 옆에서 주워먹을 테니까요.”

물론 그들이 후원하는 라샤 해들리르가 가주가 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다.

그것을 라샤 해들리르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의 뒤에 선 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몰던만 좋은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이미 그들은 질주하는 말 위에 올랐으니, 그 끝이 어디든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세가에서의 후계다툼은 흔한 일 아니던가. 충분히 대비해놨음에도 이렇게 되는군.”

“전적으로 퀄릭 해들리르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드문 것도 아닙니다. 퀄릭 해들리르는 대비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요. 허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렸듯, 오만했던 탓입니다. 이따금 들려오는 처참한 골육상쟁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탓이지요. 어찌 보면 오만했다기보다는, 안일했다고 보는 게 맞겠군요.”

오만함이든 안일함이든, 그는 퀄릭 해들리르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뭐, 됐다. 그보다…우리가 해줘야 할 일이 뭐지?”

“퀄릭 해들리르가 보유한 상단이 있습니다.”

해들리르 가문이 아니라 퀄릭 해들리르 개인이 보유한 상단이다. 해들리르 가문이 보유한 철광에서 나오는 광물을 가져다 파는 일을 하는데, 그 수입은 모두 퀄릭 해들리르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퀄릭 해들리르가 가진 주 수입원 중 하나였다.

“돈줄부터 말리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한 번 상행이 털린다고 해서 크게 타격을 입지는 않을 테지만, 거래 경로가 막힌다는 데 의미가 있지요.”

철광에서 생산된 광물은 판니른 북동쪽에 있는 소국, 파타니아로 팔린다고 했다. 거래한 지 5년이 넘어간다고 하는데, 그런 안정적인 교역로가 끊기게 되면 유의미한 피해를 입게 될 터.

“파타니아와의 교역을 철저하게 끊어놓는 겁니다. 길을 돌아간다고 해도 어차피 우리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 결국 그는 파타니아와의 거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물론 그런다고 해도 퀄릭 해들리르는 다른 거래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철의 수요는 항상 있는 법이니, 파타니아 만큼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교역로를 찾아내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주 수입원 중 하나가 막히게 되면 배다른 동생과의 싸움에서 적잖은 곤란함을 겪게 될 터. 그거면 충분하다.

“누구에게 맡기는 게 좋겠느냐.”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얼굴이 덜 팔린 이를 써야겠지요.”

이 일은 은밀함이 생명이다.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거나 발각될 경우, 발뺌할 수 있어야 하니 얼굴이 팔리지 않은 자가 적임이다.

“제 형님이 어떻겠습니까.”

“…….”

군터는 스스럼없이 제 형을 추천하는 야스메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오룸은 일을 잘 해냈다. 니클라스 휘하의 수인병들을 이끌고 은밀히 테리브란을 나선 그는 수십 개의 수레에 철을 가득 싣고 가던 퀄릭 해들리르의 상단을 깔끔하게 약탈했다. 한때 초원의 부족장으로서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해봤던 그는 전문가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시신은 물론, 수레의 잔해까지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그는 약탈한 철을 인근 야산의 동굴에다 숨겨놓는 주도면밀함까지 보였다.

“당분간은 이목이 쏠릴 테니, 후에 사람을 보내 조금씩 옮겨오면 될 것입니다.”

“수고했다.”

바오룸은 솔롬으로 와 자신에 찬 얼굴로 보고를 마쳤다. 흠잡을 데 없는 보고가 끝나자 군터는 그를 몇 마디 말로 치하하고 내보냈다.

“기대 이상이군.”

“제 형님이 특별히 뛰어난 재주가 없고, 다소 방탕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은 상당합니다. 큰일을 할 만한 재목은 아니지만, 때때로 일을 맡기시면 부족함 없이 해낼 것입니다.”

“그래도 혈육인데, 평이 조금 박한 것이 아닌가.”

군터의 말에 야스테미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그릇이 있습니다. 그릇 이상의 욕심은 재앙을 부를 뿐이니, 저는 제 형님이 그릇에 맞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뭐, 그거야 바오룸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

동생인 야스메티의 생각이 어떻든, 결국 바오룸 본인이 결정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것으로 끝은 아니겠지?”

“의심이야 하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 호위를 더 늘려서 두어 번 정도는 더 시도하겠지요.”

한 번 상행이 습격을 당했다고 해서 바로 포기할 리는 없다. 생존자 하나 없이 모두 실종이 되었으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으리라 생각은 하겠지만, 파타니아와의 교역이 적잖은 이득이 되는 만큼 두어 번 정도는 더 상행을 보낼 터. 그리고 두어 번 더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는 상황을 파악하고 발을 빼겠지만, 그때는 이미 상당한 피해를 본 후일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든 일이 야스메티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퀄릭 해들리르는 세 차례 더 상행을 시도했지만, 바오룸은 사냥감을 사냥하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쓸어버렸다.

그즈음, 퀄릭 해들리르는 이것이 그에 대한 공격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확신했다고 해도 마땅한 방도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호위를 더 늘리고, 상행 경로 인근의 가문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뿐이었으나 해들리르 가문이 가주 자리를 놓고 혼란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아는 다른 가문들은 섣불리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를 주저했다.

어쩔 수 없이 방위군에게 호위를 부탁하기도 했으나, 방위군은 사적인 용도로 군을 움직일 수는 없다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원칙적으로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던데다, 군터가 미리 각지의 사령관들에게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퀄릭 해들리르는 파타니아와의 거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 *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내 분명 쉬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흐흐.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걱정을 안 해. 거울은 보고 사는 게냐? 이게 사람의 몰골이야?”

그렇게 심각한가? 야스메티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확실히 살이 빠지기는 한 것 같지만, 매일 보는 얼굴이라서 그런지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심각하다고 생각이 들었더라도 생활에 변화를 주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난 괜찮으니 내 걱정은 마십시오. 그보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신 것 같소?”

“음? 그래 보이느냐?”

“예. 그러니 어깨에 힘 좀 빼십시오.”

“하하. 좀 들어가면 어떠냐. 내 이번에 장군의 밀명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않았더냐.”

“잘 나갈 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못 나갈 때 고개를 숙이면 비굴하다 할 테지만, 잘 나갈 때 고개를 숙이면 존중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내 그리 하마.”

야스메티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그러겠노라 하는 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형님.”

“응?”

“우리 형제가 고향을 떠나온 지도 벌써 꽤 오래되었군요. 이제는 두 손으로도 햇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간 몇 번 정도 어려운 일도 있었습니다만, 그때마다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형제가 서로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낯간지러운 말을…….”

“돌이켜보면 말입니다. 꽤 괜찮지 않았습니까?”

야스메티가 웃으며 물었다.

활짝 웃는 동생을 바라보던 바오룸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꽤 괜찮았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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