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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47화 (647/1,064)

647화

퀄릭 해들리르는 끙! 소리를 내며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그대로입니다.”

수하의 말에 그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는 요즈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병세가 위독해진 부친 때문이었다.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부친 덕에 퀄릭 해들리르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오래도 버티시는군.’

위독한 부친을 떠올리며 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부친이 거동도 못할 정도로 누워버린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 부친이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앓았을 때는 그도 제법 근사하게 착한 아들의 흉내를 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하루, 이틀, 열흘, 한 달이 넘게 시간이 흐르자 잘 빚어낸 가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친이 의식까지 잃어버리고 숨만 어렵게 쉬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다 집어치우고서 곧 올 것 같은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셔야 할 텐데.’

한때, 그의 부친은 서릿발 같은 위엄을 뽐내며 가문을 다스렸었다. 어렸을 적, 부친의 숨소리 하나에도 몸을 움츠리며 눈치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부친은, 그에게 있어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산송장에게서 그때의 두려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늙은이들도 지금쯤 눈 밑에 그늘이 잔뜩 꼈겠군.”

“그렇겠지요.”

가주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후계자뿐만이 아니다. 가문의 원로들도 만만찮게 마음을 졸이고 있을 터였다. 가주가 죽었을 때, 누가 먼저 새로운 가주의 옆으로 달려와서 눈물을 쏟아낼 것인지를 경쟁하겠지. 사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하는 일 없이 가문의 녹을 받아먹고 있는 늙은이들에게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내가 가주가 되면 그 쓸모없는 늙은이들부터 싹 정리해버릴 것이야.”

“원로들이 실권은 없지만, 가문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수하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퀄릭 해들리르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더 문제다. 가문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퇴물들이 영향력만 행사하려고 하니까 말이야. 가문을 위해서, 그런 짐덩이들은 치워내야 해.”

퀄릭 해들리르는 젊었고, 야심에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내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갈 새로운 가문은 지금까지의 가문보다 훨씬 더 근사할 것임을 확신했다.

‘우리 가문이 언제까지 몰던의 그늘 밑에 있을 수는 없지.’

그는 자신이 가주가 된 이후에 할 일들을 생각했다. 어제가 오늘 같은 요즈음,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그가 가진 취미 중 하나였다.

우선 가문을 재정비한다.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는 것들을 정리하고, 젊고 유능한 이들을 가문의 요직에 임명하는 거다. 그렇게 가문 내의 일을 처리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문의 힘을 계속 키우면서, 종국에는 몰던을 넘어서서 판니른 제일의 가문으로 우뚝 선다.

그때가 되면, 퀄릭 해들리르라는 이름은 판니른 전역은 물론 주외(州外)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겠지.

“공자님.”

상념에 잠겨 있던 퀄릭 해들리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달콤한 상상을 방해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부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공자’라니. 물론 현재의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것이 맞았지만, 그래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

철부지 도련님이었다면 여기서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수하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그는 체면을 중시했고, 무엇보다도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직 ‘가주’라고 불리는 것은 이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삼공자 쪽에서 묘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묘한 움직임?”

“간밤에, 삼공자가 호위 두 명만 거느리고 저택을 나섰다는군요. 새벽녘 즈음에야 돌아왔는데, 자기 발로 걷지도 못할 만큼 만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신경 쓰이는 소식에 살짝 치켜 올라갔던 눈이 제자리를 찾았다. 퀄릭 해들리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놈도 답답한 모양이지.”

그의 이복동생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자신의 처지,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시기에 그런 추태를 보였겠지.

“눈을 더 붙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곧 사라질 녀석 아니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이라도 마음껏 하게 두어라.”

혈육에 대한 정이라기보다는, 평소 말끔한 척은 혼자 다 하던 녀석이 한계를 보이면서 망가져 가는 꼴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싶은 탓이었다.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다.”

“기별하겠습니다.”

매일 가주의 병문안을 가는 것은 벌써 몇 달이나 계속되고 있는 그의 일과다. 지루한 일이지만, 퀄릭 해들리르는 이런 일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가문 내 모든 이들에게 계속해서 확인시키고 있었다.

“음?”

그렇게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가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퀄릭 해들리르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수십 명을 거느린 그와 대비되는, 하인 한 명만 달랑 거느린 젊은 사내. 그 사내를 본 퀄릭 해들리르는 자신도 인상을 찡그렸다.

“형님.”

그가 사내를 보았듯, 사내 역시 그를 보았다. 사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아버님의 병문안을…….”

“쯧! 이제 와서? 문안을 드리려거든 널 알아보실 수 있을 때 드리지 그랬느냐.”

“…….”

“술 냄새가 심하구나. 이만 물러가 보거라.”

“…예.”

퀄릭 해들리르는 낙심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서는 배다른 형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병문안? 어렸을 때처럼 아버님께 매달리기라도 해볼 참이었더냐?’

과거에는 그런 투정이 통했었다. 하지만 때를 놓쳐도 한참을 놓치지 않았나. 투정을 들어줄 부친은 이미 반쯤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 * *

“보았느냐?”

치욕을 당하고 돌아 나오는 길. 해들리르의 삼남, 라샤 해들리르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았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행태만 보면 이미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그가 오만과 착각에 빠져있을수록 공자님께는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병문안은 핑계였다. 의식도 없는 사람의 얼굴을 봐서 뭘 한단 말인가.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병상에 누워 있는 부친이 아니라, 그를 깔보고 무안을 준 증오스러운 형님이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더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오만한 형의 눈길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그가 얼마나 경계를 하고 있는지.

“오만이 눈을 가렸어. 후계자로 지낸 시간이 긴 만큼, 이미 반쯤은 자기가 가주인 줄 아는 게지.”

“바로 그 점이, 공자님께서 유일하게 파고들 수 있는 허점입니다.”

“그들이 사람을 보낸다고 한 것이 언제였지?”

“내일 밤입니다.”

“빠르군.”

“그들도 애가 닳은 것이겠지요.”

“아버님께서 최소한 앞으로 열흘은 버텨주셨으면 좋겠군.”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부친에게 붙어 있는 사제와 의사들은 부친의 목숨이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고 선언한 지 오래. 이제는 정말 신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얘기했던 대로, 오늘 밤 그들에게 서신을 전해라.”

“예.”

* * *

군터는 하루가 다르게 옛 모습을 찾아가는 솔롬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나마 멀쩡한 첨탑에 머물며 솔롬의 재건 작업을 지켜보는 한편, 일전에 떠올린 사령술의 활용법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망자들의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이 혼이 없는 영만으로 움직이는 시체이기 때문이다.’

시체에 깃드는 영혼의 상태가 좋을수록 전투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걸 알았다고 해도 마땅한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시체에 불어넣을 영혼을 따로 준비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잠깐.’

영혼을 따로 준비해놓는다고? 그게 마냥 불가능한 일인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령술이라는 것이 본래 죽음과 영혼을 다루는 술법 아니던가. 비록 아직 그가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은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제대로 연구와 실험을 해본다면 방도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시체에 붙어 있는 망령이 아니라, 상태가 좋은 영혼을 매개로 쓴다면…가능할지도 모르지.’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도 문제는 있다.

첫째, 영혼을 어찌 보관해 둘 것인지. 둘째, 그렇게 보관해놓은 영혼이 일으키려는 시체와 합이 맞을 것인지.

그러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부터 어떻게 짚어나가야 할지, 길을 찾은 것 같았으니까.

“장군. 야스메티 공이 돌아왔습니다.”

“들라 해라.”

반사적으로 그리 답한 군터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관저에서 보도록 하지.”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잠시 후. 군터는 아직은 어수선한 느낌이 있는 관저에서 야스메티와 만났다.

“지친 것 같구나.”

“답지 않게 바삐 움직여서 그런가 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야스메티의 얼굴은 솔롬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초췌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쉬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몰던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네 예상대로군.”

“예. 그들의 계획은, 이미 꽤 진행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래. 무슨 계획이었지?”

“그들은 해들리르의 삼남을 움직일 계획이었습니다.”

“삼남?”

“라샤 해들리르. 퀄릭 해들리르의 이복형제지요. 일찍이 현 가주의 총애를 받았었다더군요.”

“가능성은 어때 보이던가.”

“충분해 보였습니다. 한 가지 행운만 따라준다면 말입니다.”

“행운?”

“해들리르의 가주가 버텨주어야 합니다. 최소한 앞으로 이틀 정도는…….”

“그렇다면 앞으로 며칠 안에 판가름이 나겠군.”

“닷새. 아니, 엿새 안에 소식이 들려온다면 실패입니다.”

“들려오지 않는다면 성공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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