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뮬리츠 몰던은 책에서 눈을 뗐다. 그가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을 중간에 놓는 것은 꽤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야스메티입니다. 크렘보르 장군의…….”
“알고 있다.”
뮬리츠 몰던은 제 머리는 비우고 수하들에게 의지하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는 머리가, 특히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판니른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야스메티. 이름이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그가 솔롬 성주의 측근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뜬금없군.”
“형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최대한 빠르게 방문하고 싶다고 합니다.”
“솔롬 성주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으로?”
“예.”
“건방지군.”
솔롬 성주의 측근이라고 해봐야 결국 귀족도 아닌 평민에 불과하다. 설령 그자가 솔롬의, 크렘보르의 2인자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 크렘보르라는 이름도 몰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데, 감히…….
“허면, 거절할까요?”
“……,”
뮬리츠 몰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도 아니라 그냥 무시를 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야스메티라는 놈이나, 크렘보르 가문은 가볍게 보아도 괜찮지만 솔롬의 성주는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현재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솔롬의 성주를 두고 한창 논의가 진행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렌에서의 성과를 공으로 인정할지 말지에 대해서라는데, 사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별로 의미는 없다. 공으로 인정하더라도 결코 대공으로 인정받지는 못할 테고,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책임을 묻지는 않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이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비록 몸은 동쪽 끝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 존재감은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겠나.
‘늙은이들이 몸이 닳겠군.’
동부의 대귀족들은 여전히 솔롬 성주와 이렇다 할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투적인 말들이야 수십 번도 더 넘게 오갔지만, 이렇다 할 유의미한 결과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솔롬 성주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으니,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고 안달이 난 그들이 몸이 닳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그래. 선의를 베푸는 셈 치지.’
야스메티라는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너그러움을 보임으로서 솔롬 성주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분수도 모르는 놈이 허튼 소리를 해댄다면, 그때 따끔한 맛을 보여주면 그만일 터.
“와도 좋다고 해라.”
“예.”
“아, 잠깐.”
뮬리츠 몰던은 동생, 비오르 몰던이 방을 나가기 전에 불러세웠다.
“야스메티라는 녀석, 무슨 생각인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 허튼소리나 하려고 오는 건 아닐 테지요.”
상술했듯, 야스메티라는 이름은 그가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자인지, 무슨 재주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비오르 몰던은, 그렇기 때문에 야스메티라는 자가 녹록하지 않은 사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재주 있는 자는 많다. 하지만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이는 더더욱 드물고.
그런 면에서, 야스메티라는 자는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다. 그런 자가 빤히 보이는 무례를 저지른다는 것은, 나름의 계산속이 있다는 것일 터. 그렇다면 마땅히 그게 무엇인지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나.
* * *
“이렇게 따로 인사를 드리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앉게.”
뮬리츠 몰던은 답신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찾아온 야스메티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몰던의 가주에게 무례를 범한 주제에, 상대의 안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인상을 보자면, 낯빛이 조금 희멀건 것이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약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눈에는 빛이 형형하다. 드러내지 않아도, 자신을 꾸미려 입을 열지 않아도 눈빛에서부터 총기가 엿보였다.
뮬리츠 몰던의 머릿속에서 상대에 대한 인상이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놈’에서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 건방진 놈’으로 바뀌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가주님께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다시 바뀌었다.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지만, 심하게 건방진 놈’으로.
“제안? 자네가? 내게?”
“어찌 제가 감히. 저는 단지 저희 장군의 말씀을 대리할 뿐입니다.”
심하게 나빠졌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불쾌한 것은 여전했다. 주제넘는 말을 떠들어대고 있는 눈앞의 비리비리한 놈도 그렇고, 이런 놈을 보낸 솔롬 성주도 그렇고, 감히 몰던 가문을 어찌 보고 이런 무례를 범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됐으니, 그 제안이라는 것을 들어는 보기로 했다.
“말해보게. 솔롬 성주가 내게 무엇을 제안하려는 것이지?”
“저희 장군께서는, 가주께서 벌이고 계시는 사업에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계십니다.”
“사업?”
뜬금없는 말에 뮬리츠 몰던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야스메티의 말에, 그는 비스듬히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워야 했다.
“해들리르의 후사를 두고 벌이시는 사업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부인부터 하고 본 것은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뮬리츠 몰던은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애당초 이렇게 물어왔다는 것은 뭐가 되었든 정황을 포착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설마하니 조금의 물증도 없이, 심증만 가지고 떠보기 위해서 이렇게 나올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조금 실망스럽군요. 가주께서는 저희 장군과 함께 가시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
뮬리츠 몰던은 입을 꾹 다물고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그가 원하는 게 뭔가.”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철저하게 진행한다고 했지만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나간 것이 틀림없다. 다만 문제는, 그렇다고 한다면 새어나간 정보가 과연 솔롬 성주의 귀에만 들어갔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 이것이 해들리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몰던의 일처리는 아주 은밀했습니다. 저희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입니다. 해들리르에서는 모르는 일일 겁니다.”
“별로 위로가 되진 않는군. 아무튼 좋아. 다시 묻지. 솔롬 성주가 원하는 게 뭔가.”
“말씀드렸듯이, 몰던의 사업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이번에 아바시스의 급습이 있었던 터라, 솔롬이 크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장군께서는 피해를 입은 솔롬을 재건하기로 하셨지요.”
“알고 있네.”
“주 정부의 지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필요한 것이 많아서 말이지요. 돈이 나갈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말이지요.”
“…….”
“몰던과 해들리르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원한을 갚기 위해 일을 계획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줄 알고 함께하자 하는 것인가?”
“저 같은 하찮은 자가 어찌 장군의 마음을 알겠습니까마는, 아마 가주님의 수완을 믿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는군.”
“그러시다면 제 불찰입니다. 보잘것없는 말주변을 용서해주십시오.”
보잘것없는 말주변? 뮬리츠 몰던은 내심 조소했다. 눈앞의, 야스메티라는 놈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이쪽을 과하게 자극하지는 않으면서도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착실하게 입을 놀리고 있지 않나.
‘속이 좀 쓰리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일 수도 있다. 해들리르는 몰던으로서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권세가이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렸다고 해도 어느 정도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롬 성주가 함께 한다면, 그 부담을 어느 정도는 덜 수 있을 터. 물론 일을 통해 얻게 되는 이득을 나눠야겠지만…이득을 조금 줄이는 대신 위험부담을 던다고 생각하면 크게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 알고 있나?”
“말씀드렸지만, 우연에 우연이 겹쳐 얼핏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말해보게.”
“퀄릭 해들리르를 쳐내려고 하신다는 것…정도입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도 야스메티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뮬리츠 몰던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짐작은 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복형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는 동생을 움직이시려는 계획, 이겠지요.”
“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형제간의 쟁투는 흔하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명분이 너무 부족합니다. 해들리르 가주는 일찍부터 후계자를 정해놓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주의 사후에 권리를 주장하려고 해도 누가 그의 편에 서겠습니까. 첩실의 자식이라는 것도 약점이겠지요.”
“자네 말이 맞아.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가?”
“지금 말씀드린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계획이겠지요.”
뮬리츠 몰던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이 맞네.”
“…….”
“조만간 해들리르 가주는 죽는다. 그와 동시에 소란이 일게 될 것이야.”
“라샤 해들리르입니까?”
“맞아.”
야스메티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샤 해들리르.
해들리르 가문의 삼남. 현 해들리르 가주의 총애를 받는 자. 그러나 첩실에게서 난 자식이라는 약점 때문에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퀄릭 해들리르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어떤 식으로든 낭패를 보리라고 점쳐지는 자이기도 했다.
‘동기는 충분하지.’
몰던이 그를 회유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복형이 가주가 되면 자신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테니까.
여기까지는 예상, 아니 확신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비참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 들고 일어나는 서자. 여기까지는 전형적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 끝은 너무나 명확하다. 해들리르를 뒤엎기 위해서는 이 뻔한 줄거리에 반전을 줘야 할 텐데, 뮬리츠 몰던은 과연 무엇을 준비했을까.
야스메티는 뮬리츠 몰던의 말이 이어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