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솔롬의 재건은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됐다. 모페이브의 고렘은 고작해야 오십 기도 되지 않았지만, 그 효율은 장정 오백 명보다도 월등했다.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일하는 고렘들은 열흘은 걸릴 일을 이틀도 되지 않아 해치웠고, 그에 힘입어 솔롬은 빠르게 옛 모습을 되찾아갔다.
“본래 성벽은 크게 상하지 않았었습니다. 불에 탄 건물들이 문제였지요.”
야스메티가 말했다. 후방으로 피신해 있던 그는 그새 안색이 더 안 좋아져 있었다. 입술이 마르고 안색이 창백한 것이, 솔롬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기 몸부터 살펴야 할 것처럼 보였다.
“이달 안으로 복구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페이브 공의 공로지요.”
야스메티는 고렘이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대단한 물건이라고 했다. 군터도 세상을 바꿔놓을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렘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고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 아쉽군요.”
“무엇이 말인가.”
“이 한계 없는 노동력을 독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이득이겠습니까. 금을 낳는 뱀보다 더 귀한 보물이 됐을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페이브는 고렘을 연구하는 데 있어 호닝거는 물론이고, 테리브란에 있는 다른 술사들의 도움도 받았다. 그들의 협력이 아니었다면 고렘을 완성하지 못했거나, 완성했어도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호닝거는 고렘을 군사용으로 개조하는 데 몰두한다고 들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도 고렘의 가치를 알아본 자들이 있을 겁니다.”
“글쎄. 효용이야 확실하지만, 모페이브의 말에 따르면 생산이 쉽지 않은 것 같던데. 또한, 핵이라는 것도 계속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고.”
고렘의 몸체 형성과 움직이게끔 하는 힘, 즉 동력은 핵에서부터 나온다. 고렘의 핵은 지기(地氣)와 융합하여 힘을 내는데, 모페이브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은 핵에 부하를 안겨준다고 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했지만, 그럼에도 고렘을 쉬지 않고 부린다고 가정할 시 짧으면 열흘에서 길면 보름 정도면 핵에 손상이 생긴다던가. 한 번 손상이 가면 핵은 그 즉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니, 고렘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 보름이라는 소리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쉬지 않고 운용했을 때의 이야기고, 조금씩 사용하며 핵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 한다면 더 오래 쓸 수 있다고 했다. 추후에 핵을 더 많이 생산하게 된다면 조금씩 돌려서 사용하는 식으로 효율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도.
그러나 여기에도 걸리는 점이 있으니, 고렘의 생산 자체가 쉽지 않다. 솜씨 좋은 술사들이 여럿 동원되어야 할 만큼 핵을 이루는 술식이 복잡하고, 무엇보다 제작 비용이 상상 이상이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요건을 고려한다면, 고렘이 당장 널리 쓰이는 것은 어렵지 싶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단 마흔여섯 기의 고렘이 장정 오백은 동원되어야 할 수 있을 일을 해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장군께서는 이 점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없지는 않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여러 가지. 모두 군사적인 활용 방안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진지의 구축. 밤낮없이, 쉬지도 않고 힘을 쓸 수 있는 고렘이 있다면 전투 중에도 빠르게 진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전장에 따라서 목책이 될 수도, 약식 요새가 될 수도 있을 터. 적을 잘 교란하여 감시의 눈을 적절히 피할 수 있다면 하루아침에 든든한 버팀목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또 하나는 보급이다. 말이 끄는 수레를 고렘으로 하여금 대신 끌게 하면 말에게 휴식을 주면서 보급의 운송 속도를 한층 더 높일 수 있을 터. 전쟁의 속도 자체가 달라지게 되리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당장 떠오르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더 다양한 활용 용도가 있을 것이다. 관리자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범용성이 뛰어나고, 고렘의 핵이 크지도 무겁지도 않아 옮기는 데 제약이 없다는 점이 크다. 원하는 장소, 원하는 때에 막대한 노동력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비단 전장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빛을 볼 수 있는 이점이다.
“조만간 테리브란에서 사자가 올 겁니다.”
“사자?”
“모페이브 공이 있으니 장군께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고렘을 생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것을 바라지 않겠지요. 고렘의 가치는 거대합니다.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앞으로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통제하고 싶겠지요.”
비술 하나의 값어치가 얼마나 될까. 물론 비술도 비술 나름이고, 거래가 되는 것이 아니니 그 가치를 재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막연하게나마, 그 가치가 막대하다는 것만은 술법에 문외한인 자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고렘이라는 것은 어떨까.
“모페이브 공에게 물어보니 핵에 각인된 술식은 일부러 복잡하게 꼬아놓은 데다, 술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손을 써두었다는군요. 하지만 고렘의 핵이 솜씨 좋은 술사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시간이 걸릴지라도 어떻게든 비밀을 파헤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조정은 고렘의 비밀을 최대한 오랫동안 지키고 싶을 겁니다.”
“그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나?”
고렘의 연구는 본래 모페이브의 것이었다. 호닝거와 몇몇 술사들이 도움을 줬다고는 하나, 그것을 빌미로 이쪽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권리를 주장하더라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명분이 없다면 모를까, 명분이 있는데 그들의 강압에 휘둘릴 필요는 없으니.
“만약 사자가 온다면, 그건 조정의 뜻이기 전에 황자의 뜻일 겁니다.”
“…….”
“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황좌의 주인이 되어 제국을 다시 통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군께서도 떠올리셨듯이, 고렘은 그 자체로 강력한 전쟁 병기가 될 수 있으니 황자의 입장에서도 비밀을 지키고 싶을 겁니다. 적어도 형제들과의 내전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얼토당토않은 강압에 굴하고 싶지는 않다.”
이익을 떠나서 자존심의 문제다. 황자든 조정이든,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굴복하는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심히 불쾌해졌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야스메티는 짐작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어째 처연해 보였다. 힘이 빠져있다고 해야 할까. 병자처럼 창백한 얼굴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 짐작이 맞다면, 황자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방적인 요구나 강압이 아니라 주고받는 거래의 형식이 되겠지요.”
“음.”
“만약 제 말대로 된다면, 적당한 선에서 거래를 받아들이십시오. 어차피 고렘이라는 것은 장군께서 마음대로 다루기에는 너무 큰 보물입니다.”
“…….”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야스메티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야스메티는 자신을 위해, 현실을 직시하며 조언한 것이다.
“네 말대로 하겠다.”
정말 고렘의 가치가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야스메티의 조언을 따라 일이 크게 틀어진 적은 없었으니, 군터는 이번에도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사실,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그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해들리르의 가주가 늙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리 들었다.”
군터가 처음 판니른에 왔을 때부터 해들리르 가주는 와병 중이었다. 때문에 군터는 그와 서신으로 안부를 주고받은 적은 있어도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공식 행사에서도 해들리르의 후계자인 퀄릭 해들리르와만 만났을 뿐.
“근자에 그의 병세가 더 심각해진 모양입니다. 해들리르는 정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만, 어렵게 알아낸 바에 따르면 현재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 합니다.”
“흠.”
해들리르는 판니른에서 손꼽히는 명문이자 권력가(家)다. 그런 곳의 주인이 죽는다면 그 여파는 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야스메티가 그런 이야기를 어째서 이렇게 심각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안 이야기를 이렇게 신경 써야 할 정도는 아니다. 어찌 됐든 해들리르는 후계자도 명확하게 세워 놨고, 그 기반 역시 튼튼하니까 말이다.
“아직까지는 짐작입니다만, 해들리르의 후사에 대해서…누군가 야료를 부리려는 것 같습니다.”
야료라.
“해들리르의 후계자는 이미 정해진지 오래 아니더냐.”
퀄릭 해들리르. 군터도 몇 번 본 적 있는 젊은이다. 그 수완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어찌 됐든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의 지위는 굳건하다.
“예. 일찍이 퀄릭 해들리르가 가문을 잇기로 결정되었지요. 하지만 마음먹고 손을 쓰면 난장을 피우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누가 손을 쓴단 말이냐.”
“이 역시 아직은 짐작입니다만, 누군가 해들리르의 후사를 가지고 손을 쓴다고 하면 한 곳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몰던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몰던과 해들리르는 앙숙이다. 현 가주인 뮬리츠 몰던이 후계자였던 시절에 쌓인 원한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몰던이 해들리르에 이를 가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뮬리츠 몰던이 직접 인정한 부분이었다.
“대놓고 손을 쓸 수는 없을 텐데.”
지금 같은 시기가 아니었다면 공개적으로 손을 쓰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부의 귀족 가문들이 힘을 합쳐서 중앙 귀족들에게 맞서고 있는 형국. 이런 상황에서 ‘동지’에게 이를 드러냈다가는 아무리 몰던이라도 대대적인 지탄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일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습니다.”
“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몰던이 해들리르에 손을 쓴다고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몰던은 군터의, 크렘보르의 비밀 동맹이다. 그들이 음습한 수를 써서 앙숙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다 해도 그것을 제지하거나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반대입니다.”
“음?”
“우연히 얻은 정보입니다. 이 정보가 퀄릭 해들리르에게 전해진다면 몰던은 상당히 곤란해질 테지요.”
“몰던을 거들라는 뜻이냐?”
“제 짐작이 맞다면, 몰던은 큰 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몫 챙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단순히 해들리르에게서 얻을 이득뿐만이 아닙니다. 장군께서 이 일에 개입하신다면, 몰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으시게 되는 겁니다.”
야스메티의 나직한 말에, 군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