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화
“자네들도 들어 알고 있었겠지만, 빌리치 아조프 장군의 전사가 공식 확인되었다.”
왕성에서 나왔다는 관리는 처음부터 무거운 이야기를 잘도 지껄였다. 보리스는 그가 제대로 된 전장에 나가본 적도, 생사의 위기에서 헤쳐나와 본 적도 없는 자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감흥 없는 얼굴과 목소리로 저런 말을 지껄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록 그가 맡았던 임무가 비밀스러운 것이었기는 하나, 분명 정식으로 황자의 명령을 받고 나선 일이다. 위험을 알고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비록 그 끝이 좋지는 않았지만, 보리스는 그의 상관이 최후까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으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는, 결코 이런 쭉정이 같은 자가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가신 일이 생겼다는 듯, 무슨 먼지를 털어내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
마음 같아서는 최후까지 명예로웠을 군인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주먹을 꽉 쥐면서 타는 속을 달래는 것이 보리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빌리치 아조프 장군의 빈 자리는 빈센트 컬몬 공이 채우기로 결정됐네. 아직 공식적으로 서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조만간이겠지. 자네들에게 미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호장직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자네들이 해줘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일이라 하시면?”
옆에 있던 판셀 자하브가 가볍게 대꾸했다. 모르는 척 물어보고 있지만, 그 말투에는 조금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이 자리에 불려왔을 때도 그렇고, 빈센트 컬몬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렇고, 그의 반응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을 재차 확인하듯이.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
판셀 자하브는 자하브 가문의 삼남. 즉, 직계다. 그런 만큼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일어나는 일들뿐만 아니라 일어날 일들도 다 알고 있을 터.
“인수인계라는 것이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 일을 해야 할 전임자가 없으니, 자네들이 그 역할을 대신해줘야 하지 않겠나?”
“과연.”
과연은 무슨 놈의 과연.
‘어설픈 연기를.’
뻔하고 무의미하다. 보리스는 왜 자신이 짜고 치는 연극 속에 존재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짜증과 따분함을 안겨주려는 의도였다면 훌륭하게 성공했다고 말해주리라.
“염려 마십시오.”
“그래.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믿고 맡기도록 하겠네.”
“예.”
의미 없는 시간이 끝나고, 왕성에서 나온 자가 다시 온 길로 돌아갔다. 그 후, 보리스는 주인을 잃은 집무실에서 달갑지 않은 동료와 대화를 나눴다.
“자네도 들었겠지?”
“내 귀는 멀쩡하네.”
“까칠하기는. 뭐, 아무튼 좋아. 인수인계라고 해봐야 별 것 없지 않나. 우리가 각자 하던 일을 대충 분류해서 컬몬 장군께 올리면 되겠지.”
성문을 관리한다는 것이 물론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서 할 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네 개의 성문을 시간에 맞춰 여닫고, 지나는 이들을 감시하고, 역시 시간에 맞춰 성내에 순찰대를 돌리는 정도다. 업무량만 놓고 보면 상당하지만, 어차피 그 모든 일은 모두 하급 장교들의 선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을 관리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은 것이고, 간혹 일선의 장교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만 나서서 상황에 맞게 처리하면 된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일은 한 달에 한 번이나 일어날까 말까다. 감히 주도, 그것도 황자의 궁이 있는 도시에서 말썽을 피우려는 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인수인계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실상 궁에서 나온 작자가 전하고 간 말의 요지는, 새로 부임하는 빈센트 컬몬이라는 자를 성대하게 맞이하라는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새로이 부임하시는 빈센트 컬몬 장군은 내가 잘 알아. 컬몬 가문과 우리 가문은 예전부터 교류가 있었고, 때문에 나도 어렸을 적부터 컬몬 가문의 직계들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거든.”
판셀 자하브가 빈센트 컬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곧 부임하게 될 새로운 상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이야기가 껄끄러운 동료의 입에서 나오니 영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니나 다를까, 곧 빈센트 컬몬에 대한 이야기가 자기 자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판셀 자하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할 때,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자네 입으로 인수인계가 별 것 없다고 했으니, 특별히 뭘 준비할 필요는 없겠군.”
“아니. 그건 아니지. 인수인계야 전임자의 몫을 우리가 대신한다는 거라고 치고, 우리도 새로운 상관을 맞이하게 된 하급자로서 마땅히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내가 말했듯이, 새로 부임하시는 빈센트 컬몬 장군은 명가의 자제답게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시는 분이거든.”
체면은 그렇다 치고, 명예와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어지는 말은 뻔했다. 병사들을 동원, 사열식을 하든 뭘 하든 해서 새로 부임하는 장군을 맞이하자는 이야기였다. 보리스는 알겠다고 대충 답한 뒤 자리를 나왔다.
* * *
“무슨 일인가?”
가볍게 마련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자마자, 자밀이 툭 하고 물었다. 표정관리를 못했었나?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살짝 더듬었다.
“표정이 아니라 기색을 읽은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어떤가?”
“자네한테만 읽히는 거면 상관없어. 밖에서도 그럴까 싶어서 그런 것이지.”
“어설펐을 적부터 자네를 봐온 내가 아닌가. 그런 내가 자네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자네가 신경 쓰는 자들은 자네의 마음을 읽지 못할 테니 걱정 말게나.”
“그렇다면 다행이군.”
피식 웃은 보리스는 곧장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판셀 자하브에 대한 험담을 시작했다. 둘 다 밖으로 새어나가면 곤란한 이야기들이지만 욕설 섞인 말을 쉬지 않고 이어가는 보리스에게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자밀 우슈무르는 그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자 가장 신뢰하는 친우였으며,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빈센트 컬몬. 빈센트 컬몬이라…….”
자밀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는 자인가?”
우슈무르 가문은 귀족가이며, 한때는 장군가였다. 그런 만큼 다른 귀족들에 대해서도 그럭저럭 아는 편이었다. 일부와는 교류도 했었고. 그러니 우슈무르 가문의 후계자였으며, 현재는 당주가 된 자밀이 빈센트 컬몬에 대해 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름은 들어봤네만,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은 아니었던 것으로 아네.”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불미스러운 일로 이름이 알려진 망나니가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는 재주가 출중하여 명성을 떨치는 인재도 아니라는 것.
“나도 잘은 모르지만, 평범한 귀족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군.”
장군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띄는 공적을 쌓아 그 자리에 오른 것이라면 진작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가문의 덕을 적잖이 보았다고 봐야 할 터.
“평범한 귀족이라.”
보리스는 적당히 권위적이며 적당히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 없는 사내를 떠올렸다.
“걸리는 점은…판셀 자하브가 그자와 친분이 있어 보인다는 것인데.”
“허풍일 가능성이 크지. 그놈은 자기와 관련된 건 뭐든지 부풀리기를 좋아하니까.”
“글쎄.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리고 설령 자네 말이 맞다고 해도, 자네는 이제부터는 꽤나 고달파질 것이야.”
“음…….”
그게 문제다. 보리스의 심기가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판셀 자하브와 보리스의 관계는, 과장 좀 보태서 앙숙이라고 할 만했다. 처음 시작은 유치한 치정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시작된 불편한 관계는 공무로 자주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더 심각하게 변해갔다. 판셀 자하브는 보리스의 꼿꼿함을 아니꼽게 여겼고, 보리스는 가문만 믿고 멋대로 설쳐대는 판셀 자하브의 방만함을 혐오했다.
“아조프 장군께서 안 계시니, 이제 놈이 본격적으로 손을 쓰려 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분명 그럴 걸세.”
자하브 가문은 북부의 수많은 귀족 가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명문가 중 하나다. 그에 반해 크렘보르 가문은 당주가 황자의 총신이라지만 신생 가문이고, 무엇보다 기반이 없다. 그나마 기반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지도 동쪽 끝의 판니른에 있으니, 중앙 조정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자하브 가문이 대놓고 크렘보르 가문을 적대할 리는 없다. 상술했듯, 크렘보르의 당주가 황자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본래 정계에서 뿌리가 깊은 이들일수록 적을 만드는 일이 적다. 그들은 치려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는다. 어설프게 손을 써서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쩌다 그런 유치한 놈과 엮였는지 모르겠군.”
여기까지만 보면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판셀 자하브라는 놈이 보통 유치한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에 치정 때문에 생면부지의 남에게 대놓고 적의를 보였을 정도다. 가문 내에서 곱게 자라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제 감정에 과할 정도로 충실하다.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야.’
판셀 자하브는 뒷감당을 걱정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너무도 쉬울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자하브라는 이름 앞에서는 다 없던 것으로 변해왔을 테니까.
“자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놈에게 빌미를 주지 말게. 빌미만 주지 않는다면, 놈이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시비를 걸었을 때, 혹 사고가 터지더라도 자네가 할 말이 생길 게야.”
“그래야지.”
자하브 가문에 비하면 초라하다지만, 보리스의 배경 역시 만만치는 않다. 크렘보르 가문은 신생 가문이지만 군부 내에서는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처가인 우슈무르 가문 역시 명망 있는 무가다. 자밀의 말처럼 빌미를 주지 않는 이상, 판셀 자하브가 억지를 부려도 꿇리지 않을 정도는 됐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들지.”
보리스는 자밀이 채워준 잔을 단번에 비웠다. 간만의 술인 만큼 오늘은 제대로 한번 취해볼 생각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