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가르비아 장군.”
가르비아는 옅은 녹색이 감도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몬텔로 공.”
사내는 애써 냉정해 보이려 애쓰고 있지만, 목소리에 실린 노기와 살짝 가빠진 숨소리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성미 급하기로 유명한 작자인 만큼 이 정도로 노력하는 것만 해도 할 만큼은 하고 있는 셈이다.
“장군이라는 호칭은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의원이라고 불러주시겠소?”
“그대는 이곳에 장군으로서 온 것 아니오.”
“사실이오. 하지만 장군이기 전에 의원인 것도 사실이지. 공이 이 사람을 존중해줄 마음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었으면 하오.”
“…알겠소. 의원.”
“좋군.”
가르비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창백한 피부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치는 섬뜩한 외관. 그런 얼굴이 히죽 웃으니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징그러운 괴물 놈.’
조나스 몬테로는 그를 내려다보는 뱀 인간을 속으로 실컷 씹어댔다. 나가(Naga)라고 했던가? 자기 말로는 인간과 별로 다를 것 없다고 하지만…….
‘웃기는 소리.’
혐오스러운 외관도 외관이지만, 속내는 그야말로 뱀처럼 음흉하다. 조나스 몬테로는 이 뱀 인간에게 인간의 마음 따위가 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던 것이겠지.
“어찌 그리 태연하시오. 무슨 해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오?”
“해명?”
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짝에 칼자국이라도 내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군을 이끌고 나가, 판니른을 쳤지. 동맹인 우리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일언반구도 없이? 그건 아닌데.”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가버리면 우리는 어쩌라는 말이오.”
“음. 내가 너무 경솔했군. 사과하겠소 장군. 하지만 별일 없었지 않소. 이 일로 북쪽의 황자가 약간 경계심을 품게 되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니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니?”
“어차피 우리가 관문을 넘었을 때부터 그쪽 황자의 위신은 신경 쓸 필요도 없게 된 것 아니겠소.”
“…….”
“우리와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모든 일은 우리에게 맡기시오.”
“그걸 말이라고…….”
“이해해주시오.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해야 알아들을 것 같아서 이러는 거요.”
이제 조나스 몬테로는 최소한의 표정 관리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가르비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흥. 제깟놈이 성질을 부려봤자지.’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르비아는 코웃음 쳤다. 어차피 조나스 몬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말은 감시자라고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처럼 의미 없이 눈만 부릅뜨거나 몇 마디 가시 돋친 말을 뱉는 것뿐.
‘빌어먹을.’
조나스 몬테로가 썩은 고기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사실 가르비아도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조나스 몬테로의 앞에서는 그를 조금 자극하려는 심산으로 태연히 웃었지만, 신나게 헛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놈.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꽤 삭막하게 생겼던 적장을 떠올렸다. 나이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았지만, 흉터가 심심찮게 보이던 얼굴만으로도 백전을 거친 경험 많은 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성에 불을 지르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투 마지막 날. 삽시간에 번지는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은 가르비아로서도 꽤 인상적이었다.
‘되지도 않는 자존심은 아니었단 말이지.’
그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적장이 보여준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직접 성문을 열고 나와 위험을 무릅쓰는 과감함까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가르비아는 사람을 보는 데 있어 결코 후한 사내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판니른에서 마주쳤던 적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
‘역시 카라누르라는 말이지.’
다 쓰러져간다고 해도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던 강국이다. 그런 곳인 만큼 인재가 널려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스르륵
꼬리가 바닥을 밀면서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움직였다. 석재 바닥의 차가운 감각이 그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원하던 것은 얻었소?”
어디선가 들려온 무뚝뚝한 목소리에 가르비아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석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에게 고개를 돌렸다.
“놀리는 건가?”
“그대가 이렇게 경솔한 자인지는 몰랐군. 어쩌면 내 주인께서 실수하신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오.”
“덜 배웠군. 인형은 그냥 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돼. 어쭙잖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앞으로 이런 돌발행동은 하지 마시오. 내가 아니라 내 주인의 말씀이오.”
“난 네 주인의 명령을 받을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오만하게 굴지 마시오. 가르비아 의원. 무대는 곧 만들어질 거요.”
“아, 그래. 익숙한 이야기로군.”
“바라눔 트라소프는 결코 쉬운 자가 아니오. 세간에는 사나운 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사나운 이상으로 치밀하지.”
“그런 것은 내 알 바가 아니야.”
잠시 침묵이 감돌고, 둘은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본들 네놈이 어쩔 것이냐.’
가르비아는 여유로웠다. 물론 이 사내는 조나스 몬테로와는 다르다. 조심까지는 아니어도, 신경 써야 하는 상대임은 분명하다. 사내 본인도 그렇지만, 사내의 주인이라고 하는 작자는 아바시스의 의원인 가르비아로서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자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굽힐 필요는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래.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만큼,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기다리시오. 때가 머지않았으니.”
“본국에서 말이 많아. 여기서 시간만 질질 끌리고 있는 사이에 도련님들끼리 정리가 다 끝나버리면 어쩌냐는 거지.”
사내가 처음으로 반응다운 반응을 보였다. 무뚝뚝하던 목소리가 살짝 위로 튀었다. 그늘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실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알지. 하지만 본국에 있는 자들은 아니야. 그들은 이곳의 상황을 모르니까. 조바심이 들만도 하지.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카라누르가 아바시스에게 이를 갈은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바시스도 카라누르에 이를 갈아왔다.
아바시스는 연합국이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부터 연합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카라누르의 황제가 끝없는 정복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수십 개의 중소국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뭉친 것이 아바시스의 시초다.
태생부터가 그랬으며, 아바시스라는 국가가 생긴 후로도 카라누르와 오랫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아바시스의 역사는 곧 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역사 속에 쌓인 원한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아바시스의 의회에는 벌써부터 카라누르를 정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단순한 놈들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지.’
의원이라고 해서 다 머리가 굴러가는 놈들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를 놈들도 수두룩하다. 아바시스의 의회라는 것이 본래 왕들의 모임이기에 그렇다. 시간이 흐르고, 왕이라는 정체성도 흐려지면서 어느 정도 물갈이가 되기는 했지만…아직도 부족하다.
‘핏줄이 능력인 줄 아는 한심한 것들.’
소위 고귀한 출생이라는 자들. 그저 태어난 것 하나만으로, 온갖 권리를 누리면서 그게 자기들의 능력인 양 착각하는 놈들.
‘전령’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가르비아는 그의 처소로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굼떠.’
본국의 머저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눈에 훤하다. 언제나 그랬듯, 서로 득실을 계산하면서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고 있을 것이다.
‘머리가 수십 개나 되니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이 첫째고, 둘째로는 아바시스가 제대로 공격에 나선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늘 카라누르의 침공을 방어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대협곡 너머로 군대를 보낸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지 실제로 실행해본 적이 없었다. 전략전술을 짜기 좋아하는 자들이야 백 년도 더 전부터 온갖 계획을 다 짜놓았지만, 현실은 또 다른 법이니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사실 가르비아 본인 역시 예상치 못했다. 카라누르의 황제는 죽음마저 피해 가는 괴물이었으니.
신의 사도니 뭐니 하는 것은 헛소리로 치부하더라도, 그가 몇백 년을 살면서 온갖 업적을 쌓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회는 절대 오지 않았을 터.
‘초월자라고 해도 결국 죽긴 죽는군.’
그 죽음이라는 것이 꽤나 석연찮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것 아닌가. 덕분에 지긋지긋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호기가 찾아왔다.
‘작은 괴물들이 몇 남기는 했지만…진짜 괴물에 비하면 애교지.’
무대가 곧 만들어진다고 했다. 어차피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처지지만, 어떻게 무대가 만들어지는지 천천히 가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높이, 웅장하게 지은 탑일수록 더 크게 무너지는 법.’
호사가들이 영원토록 성세를 누리리라 노래를 불렀던 대제국의 몰락이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 * *
군터는 솔롬을 복구하기로 결정했고, 총독으로부터 지원도 약속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돈을 풀어 노동자들을 구하려던 찰나, 그는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모페이브.”
테리브란에 있어야 할 모페이브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간 서신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은 있어도, 그가 판니른까지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쩐 일인가?”
“장군. 연구의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결과물?”
“이것만큼은 제가 직접 장군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모페이브의 목소리에 흥분이 감돌았다. 그가 이렇게 들뜬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길고 길었던 연구의 성공이 감격스럽다는 뜻일 터.
“그건가?”
“예.”
모페이브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돌.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군터는 그 자그마한 돌 안에서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가느다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군.”
“발전…아니, 진화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설명하자면 너무 기니,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모페이브는 몸을 숙이고 손을 뻗어 땅을 한 움큼 팠다. 그런 후에 들고 있던 돌을 그 자그마한 구덩이에 묻고 다시 흙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돌이 묻힌 땅이 몇 번 들썩이더니, 평평하던 흙바닥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건…….”
흙이 일어났다.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솟구친 흙은 점점 커지는 형체를 갖췄다. 숨 몇 번 들이쉴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건장한 성인 남성 정도 크기의 흙 인형이 군터의 앞에 섰다.
“고렘입니다. 장군께서도 이전에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때 보셨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모페이브의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군터는 찬찬히 흙인형, 아니 고렘을 살펴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