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시어문드를 만나고 난 후. 군터는 솔롬으로 향했다.
“이런.”
미리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확인해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살라스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죄를 청했지만, 군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솔롬에는 활기가 넘쳤었다. 수천이 넘는 주민들이 거리를 거닐었었고, 물건을 팔기 위한 상인들은 쉰 목소리를 냈다. 분명 솔롬의 미래는 밝았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한 번의 전란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번성하던 성은 폐허가 되었고, 활기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군터는 이전의 솔롬보다 지금의 솔롬이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성에서 느껴지는 농밀한 사기가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꺼림칙함을 느꼈겠지만, 군터는 그 반대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크게 상하지는 않았군.”
“예?”
“불길에 휩쓸린 것은 대부분 내성이고, 외성은 그럭저럭 괜찮지 않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혹시 장군께서는 솔롬을 재건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면 안 되느냐?”
“아, 아닙니다.”
살라스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 모두 당황한 기색이었다. 군터의 말처럼 솔롬은 내성 구역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멀쩡한 편이었지만, 누구도 그가 솔롬을 재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얼마 전에 이 성에서 주민 수천 명이 불에 타죽었다. 거기에 치욕적인 패배의 흔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런 곳을 굳이, 물론 다른 곳에 새로 성을 짓는 것보다는 쉽겠지만, 재건하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장군. 차리리 다른 곳으로 본성을 옮기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살라스가 대표로 나섰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제껏 솔롬이 판니른 동부의 요충지 역할을 하긴 했지만, 대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군터가 조정에 상신한다면 그가 주둔할 수 있는 적당한 성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솔롬을 잃은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치욕을 그저 묻어버리고 잊어버리려 드는 것은 비겁한 행위지. 부끄러운 상처를 입었다면 그저 감추기보다는 그것을 잊지 않고 되새기며,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대응 아니겠나.”
반은 둘러댄 구실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
그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살라스를 비롯한 수하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특히 살라스는 느끼는 바가 많은지,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 * *
“크렘보르 장군. 오래간만에 보는데 좋은 일로 보는 게 아니어서 아쉽구려.”
아바시스군이 완전히 물러간 것이 확실시 되자, 군터는 곧장 하잘로 가서 총독과 만났다.
“공교롭게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터져버렸소.”
“아바시스의 침공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오.”
“누군들 예상했겠소. 도적들처럼 은밀히 쳐들어오더니 곧바로 도망을 쳤지.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솔롬은 참변을 당했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전투 마지막 날 솔롬에서 발생한 화재는 아바시스군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살라스는 그것이 조금 불편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백성의 수호자여야 할 군대가 도리어 불을 놓아 그들을 해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그림이 좋지 않아질 테니까 말이다.
“솔롬을 지원하기 위해 구원병을 급파했으나, 너무 늦었던 모양이오.”
판니른에 들어오자마자 아드리안을 보내 원군을 요청한 군터였다. 총독은 그 요청에 응해 원군을 급파했지만, 그마저도 너무 늦어버렸다.
“적이 솔롬의 상황을 철저하게 은폐했었소. 이쪽이 솔롬의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솔롬에서 불길이 솟구친 다음이었지.”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는 혹 군터가 제때 원군을 보내지 못한 것을 책 잡을까 우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염려와는 달리, 군터는 그에게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적장의 수완이 대단했을 뿐. 총독을 탓할 이유는 없소.”
“그렇다 한들 내 마음이 편치는 않구려.”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한결 편해졌다. 군터는 그런 그를 못본 척하며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몰라볼 만큼 바뀌었군.”
총독 관저에서 내려다보는 하잘의 모습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도시를 덮고 있던 음울함은 거의 다 사라졌고, 휑하던 거리는 과장 좀 보태서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사람과 건물로 가득 찼다.
“본래 융성했던 도시였소. 전란이 잠시 그 융성함을 앗아갔었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피어날 곳이었지.”
겸손한 척을 하지만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자부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인정할 만한 부분이었다. 결국 다시 융성해질 곳이었다고 해도, 그 융성함을 직접 일궈낸 것은 그였으니까 말이다.
“솔롬을 재건할 생각이오.”
“으음.”
아마 그 역시 ‘굳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군터가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지원을 해주기를 바라시오?”
“솔롬은 판니른을 대신해 희생했소. 제 역할을 다한 거지.”
“동의하오.”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판니른의 총독인 이상 어렵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지. 솔롬의 재건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고맙소.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로드니 캄브라이가 순순히 요청을 수락한 덕에 조금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가볍게 풀어졌다. 본론이 끝났으니 남은 것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주제는 아니었다.
“대협곡에 주둔 중이어야 할 아바시스군이 판니른까지 올라온 것이 무슨 연유에서겠소?”
“모르오. 총독은 알고 있소?”
“짐작조차 가지 않소.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한 것이라면 충분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군.”
피해를 입기는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바시스의 입장에서 그리 이로운 결과는 아닐 터였다. 기습을 가하려면 확실하게 대군을 몰고 와서 가했어야지, 수천 밖에 안 되는 소규모 병력으로 괜히 어설프게 생채기만 낸 꼴이 아닌가. 덕분에 판니른은 약간의 군사적인 피해를 있었지만, 그 덕분에 외적에 대한 경계심이 잔뜩 생겼다. 차후에 아바시스가 판니른을 도모하려고 해도 그때는 일이 훨씬 어려워질 터.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도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하오. 아직 전하께서 뜻을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로드니 캄브라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대협곡에 있던 아바시스의 군대가 판니른까지 왔소.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 특히…아말로페 황자는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요.”
“잡아떼면 그만 아닌가. 지금까지처럼.”
처음 대협곡을 내줬을 때부터 13황자 아말로페 트라소프는 여러 안 좋은 구설수에 휘말려야 했다. 아바시스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최소한의 체면은 지켰지만, 무능하다는 인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솔롬이 공격받아 불탄 것은 사실이오. 또한 아바시스의 깃발을 직접 목격인 이들이 적지 않지. 그가 잡아뗀다고 해도…역시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요.”
“그렇게 치면 황도도 마찬가지 아닌가.”
적이 대협곡에서 출발했다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황자만이 아니라, 황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비난도 함께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황도는 건드리지 않을 거요. 그럴 수가 없지. 전하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황도를 거론하려 들지는 않을 거외다.”
“어째서?”
“중립을 표하고 있는 수호자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적의가 아니라 사소한 앙심이라도 사기 싫겠지. 나라도 그럴 거요.”
황도에는 황실 근위대가 있다. 3만에 달하는 대군이며, 제국 제일의 강병이다. 과거 정복 전쟁 당시 황제와 함께하며 숱한 무공을 세운 전적이 있다. 비록 현재의 근위대가 당시 전설을 써 내려갔던 그때 그들은 아니라지만, 그 이름을 이은 만큼 허투루 볼 수 없는 막강한 전력임은 틀림없다. 적으로 돌린다면 누구라도 골치가 아파질 것이 분명한.
게다가, 무엇보다 황도에는 그가 있다. 제국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첫 번째 군주가.
“황도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는 순간, 황좌의 주인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우리 전하께서도, 다른 황자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소. 그렇기에 서로 이를 드러내며 싸우는 와중에도 황도만은 존중하고 거스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황자들은 황도를 향해 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아무튼, 기다려 봅시다. 전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거요.”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예상했던 대로, 7황자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하게.
그는 아바시스의 군대가 판니른까지 쳐들어온 사실을 분명히 하며, 13황자의 무능함을 꼬집었다. 대협곡에 주둔중인 적을 지척에서 감시하고 있을 그가 수천이나 되는 군대가 빠져나가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냐면서 혹 그의 무능한 형제가 아바시스와 내통이라도 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황자의 성명은 곧 제국 전역에 퍼졌다. 애써 퍼뜨리려고 노력할 것도 없었다. 제국의 세 주인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한 황자의 공식 발언인 만큼, 평소 귀 기울이고 있던 자들은 그 말을 열심히 퍼 날랐다.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흘러나온 말은 곧 소루모의 왕성에 거하고 있던 13황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의 반응은, 군터와 로드니 캄브라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는 아바시스의 군대가 대협곡을 빠져나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으며, 7황자의 발언을 비겁한 변명이라고 비난했다. 도적 무리에게 성이 약탈당한 것을 체면 때문에 아바시스의 침공을 받았노라고 거짓말을 한다는 거였다. 어차피 7황자 측에서 내놓을 수 있는 증거라고 해봐야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나 백성들의 증언뿐이었기에 그리 나올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입증할 수는 없다고 해도, 솔롬이 불탄 것은 사실이었고 많은 병사들이 아바시스의 깃발을 본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진즉부터 아바시스와 모종의 밀월 관계를 맺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던 13황자였다. 이번 일은 안 그래도 불안하던 13황자의 입지를 조금 더 추락시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