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어찌 된 일이냐?”
솔롬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군터는 어쩌면 살라스가 옥쇄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때때로 책임감을 과하게 가진 자들은 하지 않아도 될 선택을 하곤 하니까, 혹 살라스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표정은 어두웠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크게 다치지도 않은 듯했고.
“면목이 없습니다.”
“적은?”
“물러갔습니다.”
물리친 것이 아니라, 물러갔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겠군.”
계속 밖에 세워두고 말을 시킬 수는 없으니, 성내로 들어가서 마저 듣기로 했다.
“이곳의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이천을 조금 넘습니다.”
솔롬에 있던 병력이 상당수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조금 전 이야기를 듣고 짐작했던 대로, 솔롬을 잃었어도 크게 피해를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면서 솔롬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만, 어찌 된 거냐.”
군터의 물음에 살라스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그간의 일들을 설명했다.
“아바시스의 군대가 솔롬에서 이틀 거리에 나타날 때까지 그들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습니다.”
짙은 안개가 그들의 움직임을 가렸다고 했다. 군터는 아마 그것이 아바시스가 자랑하는 술수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했다. 수천이나 되는 인원을 가릴 수 있다니, 터무니없이 위험한 술법이다. 모르는 상태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근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백성들을 피신시켰습니다.”
정석이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할 일은 다 한 셈. 칭찬을 해줘도 좋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니…….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을 했습니다. 성에 물자가 부족하지는 않았으니,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지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성을 포위한 적은 공격은 물론이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기껏 은밀하게 쳐들어 와놓고 하는 것도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적의 모습은 수상하다 못해 어처구니없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기다렸다. 적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이상 신중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순식간에 며칠이 지나자 살라스도 더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휘저었다. 크게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큰 피해 없이 한바탕 날뛰었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였습니다. 적이 성내로 땅굴을 파고 쳐들어왔습니다.”
“땅굴?”
군터가 미간을 좁혔다.
“모든 상황을 가정하고 경계를 철저히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굴을 판 것이…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상술했듯, 아바시스는 이종에 관대하다 못해 구분을 두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들은 효율적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종의 힘, 이종의 존재, 그야말로 무엇이든지.
“그렇게 성이 함락당한 건가?”
“변명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솔롬은 함락당하지 않았습니다.”
“음?”
“솔롬에 불을 지른 것은 소관입니다. 적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
군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살라스가 한 말도 변명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살라스가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가 아는 살라스는 훌륭한 군인이지만, 그렇기에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녀석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비정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녀석은 아니었다.
“솔롬의 백성들은?”
“…상당수가 죽었겠지요.”
“아무렇지도 않으냐?”
“움직임을 보고 전면적인 침공은 아니리라 확신했지만, 그렇기에 놈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을 질렀나?”
“적이 성내로 진입한 순간, 승기가 기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살라스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날뛰는 백성들을 방패로 삼았습니다. 혼란을 이용해 시간을 벌고, 적들이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앴지요.”
이 정도의 비정함. 이전의 살라스에게는 없던 것이다. 세월과 경험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지만, 이건 조금 심한 수준이다. 하지만 군터는 살라스의 이런 변화가 나쁘다고는 보지 않았다.
“빠져나올 사람은 다 빠져나왔나?”
“예. 야스메티 공을 비롯한 인사들은 산토르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어문드는 피보조르에서 혹 있을지 모를 적의 재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야스메티도, 시어문드도, 그 밖에 다른 부하들도 무사하다. 물론 솔롬을 잃은 것은 크지만, 그래도 이곳으로 달려오면서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군터는 한결 기분이 괜찮아졌다.
“장군. 하옵고…….”
“음?”
“장군께서 솔롬 성 지하에 가둬두셨던 괴물을 성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처분했습니다. 아바시스군이 노릴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네 생각이었느냐?”
“야스메티 공. 그리고 시어문드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결정은 소관이 내렸습니다.”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깝기는 하다. 꾸준히 금을 생산해내는, 살아있는 금맥을 잃어버렸으니.
하지만 성내로 적이 침입해 들어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괴물을 빼내기는 불가능했을 테니, 적에게 넘어가게 두기보다는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것은 너다. 네가 알아서 잘 판단했으리라 믿는다.”
“송구합니다. 장군께서 믿고 솔롬을 맡겨주셨는데, 저는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어떤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벌이라. 물론 상벌은 공정하게 내려져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살라스가 솔롬을 상실한 것은 사실. 그러므로 그에게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 옳겠지만, 당장은 아니다.
“벌은 일단 미루겠다. 적은 물러난 것이 확실하냐?”
“예. 솔롬을 포위했던 군대는 솔롬이 불탄 그 날 바로 물러났습니다.”
“음.”
땅굴을 파면서 진득하게 진을 쳤던 것치고는 너무 빠르게 물러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시일을 지체한 만큼 아군이 결집할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것치고도 뭔가…너무 신속하게 발을 뺀 느낌이었다.
“적장은 어떤 자였나.”
“알지 못합니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문장기 뿐이었습니다.”
당장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괜찮다. 문장기를 보았으니 조금만 수소문해보면 적장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터.
‘이 빚은 반드시 갚아주지.’
군터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적에게 조용히 분노했다. 언제고 전장에서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그때 이 빚을 열 배로 쳐서 갚아주리라.
“피해는?”
“솔롬과 베텔. 초소 일곱이 전소되었습니다.”
“전소?”
“송구합니다. 물러나는 적의 뒤를 쫓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깔끔하게도 당했다. 이 정도면 정말 귀신에게 홀렸다고 해도 될 정도다.
“술법의 힘이 정말 대단하구나.”
이제껏 술법을 과소평가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술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력적일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술법이라…….’
아바시스가 이제껏 이 거대한 제국에 맞설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그 안개를 부리는 술법은 아바시스의 비술 중 하나일 것이다.
“피보조르로 가겠다.”
“따르겠습니다.”
군터는 살라스와, 차네스에 주둔 중이던 병력 일부를 이끌고 시어문드가 있다는 피보조르로 향했다.
“장군.”
살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시어문드도 일찌감치 성문을 열고서 마중을 나왔다.
“상황은 어떤가.”
“주 경계 밖까지 정찰병을 보냈습니다만, 적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적은 완전히 물러간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 물러난 것일까? 오천 이상의 대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것치고 너무 싱겁게 발을 뺐다.
“어찌 생각하느냐.”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쪽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찔러보았을 경우입니다.”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찔러본다? 무슨 뜻이냐.”
“적의 병력 규모는 대략 육천 가량. 그 정도 병력으로 판니른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적장은 바보가 아니니 그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테지요. 실제로, 그는 기습을 택했습니다. 국경 부근의 다른 요새들은 건너뛰고, 최단거리로 파고들어 솔롬을 쳤지요. 덕분에 판니른 동부에 퍼져 있던 방위군이 모두 이곳으로 몰렸습니다. 또한, 지금쯤이면 테리브란에도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겠지.”
“병력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아바시스가 우리를 쳤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솔롬이 무너지기까지 했으니, 아군은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선을 돌렸다는 것이냐? 무엇을 위해서?”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좋다. 하나라고 했지. 그럼 둘은 무엇이냐.”
“적은 대협곡에서 왔을 것입니다. 이 말인즉, 제국의 중부를 지나왔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였어도 족히 서너 달은 걸릴 원행입니다. 그 정도의 위험부담을 지고서라도 움직일 만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봤습니다만,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뭐지?”
“금입니다. 장군께서 가둬두셨던 그 괴물이 생산한 금. 그것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야스메티 공도 동의하셨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금? 물론 귀하다. 금을 만들어내는 괴물은 그보다 더 귀하다. 하지만 그것이, 육천 가량의 정예병이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일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면…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군터는 그리 생각했다.
“물론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이 생산한 금이 대협곡에 흘러 들어간 것 외에, 우리와 아바시스는 접점이 없었습니다.”
대협곡에 주둔중인 아바시스군이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고 북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움직인 병력이 너무 어중간했다. 그래서 헷갈리는 것이다.
“추격하시겠습니까?”
군터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시어문드가 물었다. 군터는 그를 보며 반문했다.
“추격한다면, 따라잡을 수는 있겠느냐.”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주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추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여러 부담을 지고서라도 당장 출발하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희박한 확률을 기대하며 무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대답에 안심이 되었는지, 살짝 굳어있던 시어문드의 얼굴이 다소 풀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