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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39화 (639/1,064)

639화

아바시스의 군대가 판니른을 침공했다는 사실을 접한 것은 타이던에 도착하고 열흘가량이 지난 후였다.

“장군. 곧 테리브란에서 전령이 올 겁니다.”

“그래서, 여기 가만히 앉아 기다리라는 말인가.”

케이지 볼타는 ‘그렇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차분해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군터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여기서 그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 가신들 늦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혹시 마음을 돌리는가 싶었지만.

“아닐 수도 있고.”

이어진 말에 그런 기대를 접었다.

“장군께서 마음을 굳히셨다면 제가 어찌 말리겠습니까.”

“테리브란에서 전령이 오면 이쪽 사정을 전해주시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전령이 다시 돌아갈 즈음이면 조정에서도 소식을 접하지 않겠습니까. 아바시스의 침공은 중대사안입니다. 물론, 보고에 따르면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판니른을 침공한 적은 오천 이상, 일만 미만이라고 했다.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어찌 됐든 일만도 되지 않는 군대로 한 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선발대일까. 아니면 떠보려는 것인가.’

아바시스의 군대는 대협곡에 진을 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그들이 대규모로 북상했다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뭐지.’

이치를 따져가며 가능성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으니 적의 의중이 점점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다. 적의 의중이 무엇이든 판니른, 아니 솔롬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성주. 부탁이 있소.”

“음……. 말씀해보십시오.”

케이지 볼타는 그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한 듯했다. 그래도 망설이기는 했어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들어줄 것 같았다.

“병력을 빌려주었으면 하는데.”

지금 당장 솔롬으로 출발한다면 이끌고 갈 수 있는 병력은 고작해야 수십. 솔롬의 전투가 무사히 끝났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기병 삼백.”

“으음.”

케이지 볼타가 망설였다. 생각한 것보다 과한 요구는 아니다. 내심 천 명 이상을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만하면 그래도 양심적인 편이다. 문제는 그 삼백이 보병이 아니라 기병이라는 것인데, 기병 삼백이면 현재 타이던이 보유한 기병 전력의 대부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이고, 거절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도와달라 청하는데 모르는 체를 할 수는 없지. 게다가, 당장 기병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타이던의 병력은 렌에서 창궐한 재앙이 넘어올 때를 대비하여 결집시켰던 것. 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이 병력을 더 유지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내어드리지요.”

“고맙소. 병사들은 언제쯤 준비가 되겠는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오늘이라도 바로 가능하지요.”

“그럼 부탁하리다.”

“바로 떠나시렵니까?”

“사안이 시급하니.”

케이지 볼타는 그가 약속한 것을 성실하게 이행해주었다. 삼백의 기병이 날이 저물기도 전에 군터의 뒤를 따라 타이던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성문을 나서기 전. 케이지 볼타는 군터에게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무운을.”

“언제고 다시 볼 날이 있겠지. 그대의 호의를 잊지 않겠소.”

* * *

이동하는 동안 보급을 위해서든, 경로에 겹쳐서든 들른 마을과 성 등에서 판니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바시스의 군대가 판니른의 동쪽 국경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퍼진 듯했다. 무지렁이 촌민들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퍼진 소식 중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식의 출처와 신빙성이 불분명한 것들뿐이었다.

군터는 길을 서둘렀다. 전장에서 속도를 낼 때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그를 따르는 병사들 입에서는 죽는 소리가 절로 났지만 군터는 그래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서두르는 그를 조금씩 만류했을 할렌과 아드리안도 이번만큼은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

“장군. 솔롬에 문제가 생겼을까요?”

할렌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배어있었다.

“알 수 없지.”

군터는 살라스를 믿었다. 믿었기에 부사령관의 자리에 앉히고, 그의 부재시에 솔롬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었다. 살라스는 부하들을 다스리는 데도 능하지만, 군재 역시 출중했다. 나이에 비해 경험도 많아 노련한 지휘관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살라스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적의 규모와 질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아바시스의 군대는 오천 이상, 일만 이하라고 했다. 적이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면 살라스가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만약 적이 생상 이상으로 강대하다면…….

‘그렇다고 해도 수성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사실 이것은 짐작이 아니라 희망사항에 가깝다.

아바시스의 전력은 미지수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 그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듣기로, 아바시스의 군대는 상당히 괴이한 구석이 있다고 했다. 아바시스는 이종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며, 전장에서 술사들을 사용하는 데에도 제국보다 훨씬 능하다고 했던가.

‘단순히 병력의 규모만 놓고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겠지.’

까다로운 상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솔롬의 성벽은 튼튼하며, 방비 역시 부족하지 않으니 살라스가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

“솔롬이 불탔다고 합니다.”

그런 기대, 혹은 희망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판니른의 국경 인근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그리 크지 않은 성에 잠시 들러 말을 교체하는 와중에 바로 얼마 전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솔롬이 불타? 확실한가?”

“부, 분명 그리 들었습니다.”

소식을 전한 장교는 차가운 군터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던 군터가 다시 물었다.

“그 이야기는 언제 들었나.”

“어제 정오 무렵입니다. 하잘에서 당도한 전령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솔롬에서 커다란 불길이 피어올랐다고 했습니다. 매캐한 연기가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고…….”

군터는 무고한 장교를 더 이상 핍박하지 않았다. 그는 말의 교체가 끝난 즉시 다시 출발을 명했다.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넘어 누렇게 질려가는 것이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군. 만약 솔롬이 변을 당했다면…어찌해야 합니까?”

할렌이 물었다.

“가는 길에 하잘에 들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군터가 답하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말했다. 그는 하잘에 들러 원군을 청하라고 했다. 타당한 조언이었다. 만약 솔롬이 떨어졌다면, 그것은 적의 전력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다. 즉, 적이 진심으로 판니른을 도모하려 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

“솔롬이 침략을 받은 것이 알려지자마자 방위군이 결집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적이 솔롬을 함락시켰더라도 결집한 방위군마저 패퇴시켰을 리는 없습니다. 하잘에서 원군을 얻고, 거기에 방위군까지 모은다면 적과 한바탕 맞붙는다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군.”

그러나 군터는 아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아드리안. 네가 나 대신 하잘로 가라. 가서 총독에게 원군을 청해라.”

“예? 허면 장군께서는…….”

“네 말대로, 솔롬이 공격을 받았으니 인근의 주 방위군도 결집했겠지. 하지만 솔롬이 무너졌다면 누가 그들을 이끌겠느냐. 머리가 없는 군대는 아무리 몸집이 커봤자 무소용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당도한다면, 기껏 결집한 군대가 헛되이 소모되기 전에 수습할 수 있겠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장군. 무운을.”

그렇게 아드리안이 몇 명의 병사와 함께 하잘로 떠났다. 군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른 병사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부여하고, 그들의 안색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다시 길을 재촉했다.

닷새는 가야 할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했다. 이런 강행군이 익숙하지 않은 타이던의 병사들은 이제 거의 말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정 속에서도 아직 기운이 있어 보이는 군터와 소롬의 몇 안 되는 병사들을 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그렇게 숨 가쁜 시간이 계속되던 중.

“장군. 이제 곧 차네스 성입니다.”

할렌의 말처럼, 길을 따라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의 외관도 멀쩡하고 첨탑 꼭대기에 휘날리는 제국기 역시 상처 하나 없는 것이, 아바시스의 군대가 이곳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않은 듯했다.

“이상하군.”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군터는 말끔한 성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을 좁혔다. 할렌 역시 반가움 반, 의아함 반인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성을 살폈다.

그들이 괜히 멀쩡한 성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성은 솔롬에서 이틀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솔롬이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벌써 여러 날 전인데, 솔롬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차네스 성이 이렇게나 멀쩡하다?

쿵!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일단의 기마가 튀어나왔다.

“마중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할렌을 필두로 병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빼 들었다.

“되었다.”

군터는 그런 그들을 만류했다.

“보이지 않느냐?”

“예?”

할렌과 병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군터의 눈에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선두에 누가 있는지도.

“어, 어어?”

거리가 가까워지고, 할렌도 선두에서 다가오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장군!”

선두에서 달려오던 자. 살라스가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죄를 청하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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