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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38화 (638/1,064)

638화

누가 봐도 패잔병의 몰골을 한, 200도 안 되는 인원. 그들이 처음 타이던에서 출발할 때 8천의 대군이었음을 떠올려본다면, 그 외관을 보지 않더라도 패잔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

그러나 타이던의 성주 케이지 볼타는 그들이 렌으로 들어설 무렵부터 병사들을 보내 꾸준히 렌을 정탐했다. 그렇기에 병사들이 전하는 렌의 소식들을 바로바로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변화를 느낀 것은 대략 열흘 전부터였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변화였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는 그 자그마한 변화들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떠날 때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해진 몰골의 군대를 가벼이 대하지 않았다.

“변함없는 환대로군. 이 꼴을 보면 의심할 법도 한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케이지 볼타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이게 어딜봐서 패잔병을 이끄는 장수의 모습이란 말인가.’

비록 행색은 궁핍할지언정 태도는 변함없이 당당하다. 휘하 병사들을 다 잃고 임무까지 실패했다면, 어찌 이리 당당할 수 있겠나.

“하온데 장군. 모라크 장군은…….”

“그는 죽었다.”

“…그렇습니까.”

임무는 어찌 됐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차마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대뜸 추궁하는 모양새가 되면 곤란하니까.

“용맹한 군인이었다. 명예로운 죽음이었지.”

“다행이군요.”

빈말이 아니라, 모라크 가문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애덤 모라크는 과오가 있는 몸이었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위험한 임무를 자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임무마저 실패했다면 목숨을 부지한들 그와 모라크 가문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졌겠지. 하지만 그가 임무를 수행하다 전장에서 죽었으니, 설령 임무가 실패했다 해도 참작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 셈이다. 물론 임무가 성공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임무는 성공했소. 앞으로 렌의 상황이 어찌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아마 전보다는 나아질 거요.”

“아아. 그 말씀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군께서 렌으로 떠나신 날부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자, 자. 안으로 드시지요.”

그거면 충분했다. 케이지 볼타는 환히 웃으며 군터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그래. 이게 사람사는 세상이지.”

아드리안이 육즙이 흘러넘치는 고기를 통째로 뜯으며 중얼거렸다.

케이지 볼타가 준비한 연회는 제법 성대했다. 특히 음식이 훌륭했다. 렌에 있는 동안 식사다운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맛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테리브란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곧 호출령이 떨어지겠지요.”

“그렇겠지.”

케이지 볼타의 말에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브란 조정은 물론이고, 황자까지 관심을 두었던 사안이다. 의심을 해서는 아니겠지만, 일단 직접 보고를 듣고 싶을 터. 거기다, 성공은 했다지만 병력의 피해가 너무 컸다. 사실상 전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사실 이건 상을 내리기도 애매하다. 물론,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려운 임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그것을 어찌 증명한단 말인가. 조정의 중신들은 그토록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며 공로를 인정하는 것보다, 임무를 성공시키기는 했으되 피해가 너무 컸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할 것이다. 어쩌면 황자가 조금은 편을 들어줄지도 모르지만, 글쎄.

‘손해가 너무 컸지.’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짜증나는 임무였다. 타이던의 병력도 병력이지만, 솔롬에서 끌고 온 정예병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특히 바크렌에서부터 그를 따랐던 고참병들을 다수 잃은 것이 뼈아팠다. 진정 손발처럼 움직일 수 있는 수하들을 구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자질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해 충분한 시간까지 필요하다. 자질 있는 병사야 어떻게든 구한다 쳐도 시간은 어쩐단 말인가.

거기다, 렌의 일을 처리했다고는 해도 그곳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면 얼마나 걸릴 것인가.

결국 피해만 끔찍할 정도로 크게 입었을 뿐, 당장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크게 손해를 볼 줄은 몰랐지만, 만약 알았다고 해도 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렌의 재앙은 누가 되었든 걷어내야 하는 것이었고, 군터는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질질 끌렸을지 몰랐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또, 아주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얻은 것도 있었다. 렌에서의 혹독한 경험들은 결코 쉬이 겪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보잘 것 없는 곳이지만, 며칠만이라도 푹 쉬십시오. 부족하나마 장군께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고마운 말이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군터 역시 적잖이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특히, 봉인지에서 치렀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은 아직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피륙의 상처도 상처지만, 비오듯 쏟아졌던 저주의 영향이 컸다.

그렇기에 그는 케이지 볼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판니른의 소식을 알아봐야겠다 생각은 해보지도 않은 채로.

* * *

“빠져나간다!”

선두에 선 지휘관의 호령에 수백 기의 기병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이는 그 모습은 참으로 근사했다. 물론 그 근사함을 빛내기 위해 짓밟히고, 베이고, 찔리는 아바시스의 병사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멋지군.”

그는 태평한 소리를 해대는 상관을 힐끗 곁눈질했다. 진지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저기 죽어나가는 병사들이 자기 부하들이라는 것을 잊기라도 했는지, 꼬리까지 들썩거리면서 아주 신이 났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어 한 마디 했다.

“장군.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저기 쓸리고 있는 병사들이 어디 병사들 같으십니까?”

“이봐. 전장에 나왔으면 목숨은 내놓고 나온 것 아닌가.”

“그런 게 아니라…….”

“이보게 로츠. 당연히 나도 내 병사들이 죽는 것이 안타깝네. 하지만 어쩌겠나. 저놈들이 예상 이상으로 잘 싸우는 것을.”

사내, 로츠는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애써 가라앉혔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 한 방 먹여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조잡한 나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주먹 한 방 제대로 먹이기도 전에 저 두툼한 꼬리에 맞아서 나가떨어지겠지. 로츠는 그의 상관이 저 꼬리치기 한방으로 두꺼운 철방패를 우그러뜨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참자. 참아.’

이 작자가 제멋대로인 것이 어디 하루이틀이던가. 오늘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이런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래도 잘 참아오지 않았나.

“가르비아 장군님. 놈들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으면 어찌 합니까?”

“눈치채지 못했다.”

“어찌 확신하십니까? 작업을 하고 있는 곳과 놈들이 지나친 곳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놈들의 눈보다 내 눈이 더 좋으니까. 확실해. 놈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여유롭게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지. 아니면 미쳤다고…….”

“…여유롭게 구경이요? 저기 병사들은 어떻게든 놈들을 잡겠다고 피를 흘리고 있습…….”

“잘못 들은 걸세. 자네 귀가 영 좋지 않군. 아니면 귀를 좀 팔 때가 된 것 아닌가?”

“장군!”

장군, 가르비아는 쉭쉭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그 즈음, 적 기병은 끝내 추격을 뿌리치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가르비아는 마지막으로 멀어지는 적 기병을 힐끗 보고 말했다.

“적당히 설치게 두는 것도 좋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들이 저렇게 설치고 무사히 돌아가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저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방 먹였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저 정도면 틀림없이 놈들이 보유한 최정예야. 그런 놈들이 뛰쳐나온 것을 보면 놈들의 불안과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 게지. 다른 돌발행동을 하느니, 이렇게 적당히 설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돼.”

‘우리라고?’

피식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이 전투, 이 전쟁 아닌 전쟁은 모두 가르비아 한 사람의 것이다. 그가 원했기에 저 병사들이 이곳에 왔고, 이곳에서 싸우며, 이곳에서 죽는다.

물론 그는 이곳에 온 14군의 지휘관이다. 하지만 아무리 독립적인 작전권을 인정 받은 그라고 해도 이런 일을 무턱대고 벌일 수는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가능한 것은, 그가 14군의 장군이면서 동시에 의회에 자신의 의석을 가진 의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용감하게 그에게 주먹을 뻗지 못하는 까닭도 그가 상관이어서가 아니고, 꼬리에 맞아 피떡이 될까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그건 다 이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인 뱀 인간이 아바시스의 의원이기 때문이다.

비겁하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로츠는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되묻고 싶었다. ‘그럼 넌 나와 다를 것 같으냐’라고.

“냄새가 나. 냄새가.”

몇 번 코를 벌름거리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정 마음이 불편하다면 이건 어떤가. 크게 흘릴 피를 작게 흘린다고 생각하게. 그럼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지 않겠나?”

“애초에 굳이 군사를 끌고 올 필요가 있었습니까? 어차피 요금이라는 것이 카라누르의 상인들을 통해 풀리고 있지 않습니까. 조용히 그것들을 모으거나, 아니면 직접 거래를 제안해도…….”

“오. 늘 생각하지만, 자네는 참 군인다워.”

“…감사합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하다는 뜻이네. 칭찬이라면 칭찬인가?”

“…….”

“놈들이 가지고 있는 게 단지 요금이라면 나도 그렇게 했을 거야. 얼마나 있는지도 모를 요금을 얻기 위해 이렇게 군사까지 몰고 오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니까.”

“허면 어째서.”

“말했지 않나. 냄새가 난다고. 그 요금은 분명 채취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어. 내 코를 속일 수는 없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놈들은 요금을 가진 게 아니야. 금을 낳는 뱀을 가진 거지.”

가르비아가 씩 웃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놈들에게 뱀을 내놓으라고 하면 순순히 내줬을까? 응? 아무리 군인의 표상 같은 자네라도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겠지?”

진하게 걸린 조소에 로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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