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군터가 망령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고 한 것은 병사들이 상관의 지휘를 받듯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완전한 복속.
[이 싸움 뒤에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줄 것을 약속할 수 있겠나?]
망령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병졸의 복장을 한 이들이 대다수였고 일부는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기도 했는데, 그들이 바로 ‘제사장’을 따르던 ‘사제’들 같았다. 그리고 병졸도, 사제도 아닌 마지막 부류.
[약속하지.]
생전에 이 병사들을 이끌었을 것으로 보이는 지휘관들. 그들의 모습은 병졸들보다 더 뚜렷했다. 품고 있는 기운도 더 컸다. 국가가 몰락하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 사투를 벌였던 이들이어서 그런지, 이미 오래전에 죽어 영혼만 남은 존재임에도 발하는 기운이 상당했다.
[그렇다면 따르겠다.]
그들이 제안을 수락한 순간. 군터는 그에게로 밀려드는 막대한 중압감에 이를 악물었다. 수천 개의 혼이 그의 의식하에 놓이는 기분은,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한 것이었다.
머리가 멍하고 속이 거북해졌다. 제대로 정신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이 거친 영의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버릴 것이다.
군터는 가득 들이마신 숨을 토하듯 망령들을 쏟아냈다.
시체에 깃들지 못한 채 허공만 떠돌던 망령들이다. 그들은 품은 원한이 깊은 만큼 평범한 망령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육신도 없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들도 아니었다.
그 어떤 장사도 두 다리로 땅을 밟지 않는 이상 제힘을 쓰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수천 망령들이 품은 기운이 상당하다 한들 받쳐줄 그릇이 없으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군터는 그들의 그릇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비로소 제힘을 낼 수 있게 된 망령들을 그의 수족처럼 부렸다.
[날개를 노려라.]
그가 토해낸 망령들은 벌떼처럼 우르르 날아가 쇠락한 신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비처럼 내린 저주가 군터에게 상처를 입힌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게걸스럽게 신의 영(靈)을 갉아 먹었다.
[캬아아아아-!]
연기처럼 변해있던 것이 점차 괴조의 형상으로 변했다. 결계를 뚫는 것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고통을 참지 못한 것인지 거칠게 날갯짓을 하며 망령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날갯짓 한 번에 수십의 망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도, 곧바로 그 배는 되는 망령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카아아악!]
괴조는 필사적으로 발악했지만, 수천이나 되는 망령들의 총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수백, 그 이상의 망령들이 날개에 달라붙어 공격을 가하자 괴조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추락했다.
“흡!”
군터는 바로 그 순간 달려들었다. 저주에 시달린 데다, 망령들을 부리느라 기력과 심력을 소비한 탓에 달려가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있는 힘껏 부지런히 달렸다. 그 덕에, 추락한 괴조가 다시 발악을 몸부림을 치기 전에 괴조의 몸뚱이에 박힌 창을 다시 손에 쥘 수 있었다.
군터는 창을 뽑지 않았다. 힘을 주어 창을 더 깊숙이 찌르고, 베었다. 살과 뼈에 걸리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물을 베는 것과 비슷했지만, 비할 수 없이 무거웠다.
[캬아아아아악-!]
괴조가 발광을 했다. 군터는 더욱 힘을 주어 창을 내리그었다. 창을 더 깊숙하게 내리긋는 데 필요한 것은 근력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기진맥진하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육체와 혼이 분리되는 것 같은 아찔한 위기가 쉴새 없이, 몇 번씩이나 닥쳤다.
“쿨럭!”
몸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치는 괴조와 그를 제지하는 망령들. 그리고 창을 놓지 않는 군터. 그 치열한 힘겨루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괴조는 힘이 줄지 않는 데 비해, 군터와 망령들은 빠르게 그 한계를 보였다. 수천의 망령은 어느새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군터는 창을 내리긋는 것이 아니라 창을 붙들고 어떻게든 버티는 데 급급했다.
쿵!
하지만 괴조가 기세를 올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육중한 굉음이 들리더니 괴조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군터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으아아아!”
그는 모든 힘을 쥐어짜 창을 찔렀다. 깊숙이 박힌 창끝에서 사기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괴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더니, 환한 빛이 되어 비산했다.
* * *
쿵!
봉인은 굉음과 함께 가라앉았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은은한 빛무리만이 이곳에 무언가가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
제사장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흙먼지만 날리는 땅을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테론 아바예크는 어찌된 건가.]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뒤편. 사라진 결계의 경계 즈음에, 만신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몰골을 한 군터가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일은 마무리 된 건가.]
[보다시피.]
[그럼…이제 끝난 거군.]
[그래. 끝났다.]
그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그들을 놓아줄 텐가.]
[그러기로 약속했었지.]
초췌한 얼굴의 군터가 가볍게 손을 털자 그에게 묶여 있던 망령들이 자유롭게 흘러나왔다. 그들은 얼마간 허공을 맴도는 듯하더니, 곧 제사장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깝지 않은가?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사령술을 다루는 그대에게 우리는 제법 군침 도는 소재일 터인데.]
[약속을 했으니 지킬 뿐이다.]
[신의 있는 사내로군.]
애초 달리 방도가 없기도 했지만, 믿을만한 자라는 판단도 있었기에 이 거래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다만 확신은 없었는데, 다행히 판단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신은 봉인되었으나, 그 봉인은 이전보다 단단하지 않다. 준비가 부족했고, 술사의 역량이 부족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말에 군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르지. 그러나 비슷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번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리가 없을 테고, 신이 품었던 악의 역시 한층 묽어졌으니. 그건 그대의 공이라고 봐야겠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 봉인으로 빨려 들어간, 악의로 똘똘 뭉친 또 하나의 신은 그 기운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간 날뛰면서 힘을 소모한 탓도 있겠지만, 얼핏 느낀 상처들을 보면 결계 밖에서 꽤나 고초를 겪은 것 같았다.
[놀랍군. 난폭한 신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버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나 보군.]
[기대보다는 희망이었지.]
[그들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제사장은 힐끗 동료들을 보았다. 수가 많이 줄어있었고, 남은 자들 역시 적잖게 기운이 상해 있었다.
[이들을 싸우게 한 것도 그대의 능력이지. 아무튼, 감사를 표하지. 그대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뭐지? 그대로 사라지는 건가?]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제사장은 붙들고 있던 끈을 놓았다. 물결에 밀리듯, 그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육신을 빠져 나왔다. 감은 눈을 떴을 때, 그는 동료들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옛 생각이 나는군.]
고통이 사라지니 분노가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니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지. 이곳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숨 가빴던 전투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건만, 전투의 현장은 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백 년이 넘었다고 했던가?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뿐인데 세상이 변했다. 알아보기 힘들 만큼.
[내가 있을 세상이 아니라는 게지.]
흘러간 역사가 되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눈치 없게 남은 한 줌 흙일 뿐이다. 그늘에 숨어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인 것이다.
[오는군.]
기운이 흩어지고, 의식이 흩어진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침대에 누우니 그렇게 안락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미루고 미룬 잠에 빠져드는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편안했다.
의식과 함께 기억들도 흩어져갔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사라지고 자그마한 점 하나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점이 계속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는 완전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후의 전투는, 솔직히 말해서 싱거웠다. 병사들이 들으면 욕할지 몰라도, 할렌의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쓰러지지 않는 시체들은 든든한 벽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은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이 너무 튀어나가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면서 시간을 버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괴물들이 일제히 비명인지 뭔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뭔가 또 일이 벌어지나 싶어 잔뜩 긴장했지만, 뜻밖에도 괴물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허무한 결말이었다.
괴물들이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대로 쓰러질 것 같지 않던 시체들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제야 할렌은 이 끔찍한 싸움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 * *
“사령관. 기침하셨습니까.”
살라스는 퍼뜩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시야가 흐릿했고, 머리는 무거웠다. 잠깐 눈을 붙였지만 누적된 피로가 피로인지라 조금도 개운한 느낌이 없었다. 몸은 오히려 잠들기 전보다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래.”
몸은 일어나지 말고 다시 눈을 감으라고 애원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서자 차가운 새벽바람이 그를 맞았다. 마음 같아서는 냉수에 얼굴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조차도 없었다.
“적의 동태는?”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날이 밝으면 몰아칠 듯합니다.”
“…….”
살라스는 빠른 걸음으로 성벽을 올랐다. 그리고 보았다. 저 아래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의 모습을.
“오늘도 사흘 째였던가?”
“예.”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 보였다.
맞물린 두 개의 원. 얼핏 보면 낙서인가 싶을 정도로 성의 없는 문양이지만, 감히 누구도 저 조잡한 기를 비웃지 못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