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본래 영혼과 육신은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라, 억지로 그 연결고리를 끊거나 끼어들기는 쉽지 않다. 설령 강력한 힘으로 그걸 해낸다고 해도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육이 타격을 입어 기력이 크게 쇠한다거나, 심지어 백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술수를 쓰거나, 영육의 고리가 헐거워지는 상황이거나 할 경우.
지금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이 됐다. 테론 아바예크의 정신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고, 제사장의 술법이 자연스럽게 그 위축된 정신을 재웠다. 일시적으로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에 그의 정신을 깃들게 했다.
그는 생전에 한 나라의 최고 술사였으며, 그 솜씨는 제국의 군주마저 인정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 그에게 이 정도 일은 손쉬웠다.
흐리멍덩해졌던 눈이 강렬한 빛을 머금었다. 테론 아바예크, 아니 제사장은 아주 오랜만에 갖게 된 육신이 낯설어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낯선 감각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여유를 가지고 이 기분 좋은 생의 감각을 만끽했겠지만…….
[캬아아아아악-!]
안타깝게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강력한 기운은 그가 감상에 빠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그가 크게 일갈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기운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비틀거리던 술사들을 일깨웠다.
“들어라!”
그는 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테론 아바예크의 기억을 빌리는 것이기에 어려울 것 없었다.
“남은 술력을 모두 내게 집중시켜라! 술식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짤막하게 명령한 그는 테론 아바예크가 마무리 짓지 못한 술식을 단숨에 완성 시켰다. 다섯 개의 가시가 신을 찔러 그 피를 빼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다. 굳이 따지자면 원기(元氣)라고 할 수 있으리라.
[캬아아아아악-!]
다섯 개의 가시가 창처럼 신을 찔렀을 때, 비명은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들려왔다.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저것’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그 비명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둘로 나뉘었으나 뿌리는 하나.’
뿌리가 갇히게 되면 밖으로 뻗어 나간 가지도 무사할 수 없다. 아무리 크고 길게 뻗었다고 해도, 뿌리와의 연결이 단절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금 ‘저것’이 저리 활개를 칠 수 있는 것도 봉인에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틈이 사라지면, ‘저것’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를 원망하시오?’
기둥 속에서, 가시에 찔린 채 몸을 움츠리고 있는 존재가 보인다. 테론 아바예크는 보지 못했으나 그는 그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존재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눈에 담긴 고통, 분노를 이해했다.
‘나 또한 그대를 무던히도 원망했었소.’
상념에 잠기면서도 해야 할 일을 늦추지는 않았다. 술사들이 쥐어짜서 보낸 술력을 즉각 술식으로 변형시켰다. 테론 아바예크가 그렸던 흐릿한 형상과는 달리, 그가 그리는 술식은 실제 눈앞에 존재하는 물건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듯 선명했다.
‘나는, 우리는 그대에게 기댔었지.’
문득 그는 저 존재와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저 존재에게 대화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게 다 부질없는 미련이라는 것을 알지만.
‘일방적인 믿음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배신이라는 것도 우습다.
‘처음부터 틀렸던 게지. 나의 운명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이었는지.’
하늘에다 대고 내년 이맘때쯤 비를 내려달라 청하는 것과 같다. 단지 손이 닿지도 않는 하늘과 달리, 눈에 보이며 가까이에 실존한다는 것만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헛된 기대를 걸었다. 말 그대로, 헛된 기대를.
‘그것이 신의 방식이라면, 이것이 인간의 방식이오. 태생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제멋대로 이용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족속이 인간이라는 족속이오.’
분노해도 좋다. 원망해도 좋다.
본래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하고, 살 곳을 얻기 위해 본래 살아가던 것들을 쫓아내고. 모든 존재는 이기적이다. 이기적이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
‘오래된 왕이여. 그대를 위한 왕관을 씌워주리다.’
물론 제대로 된 왕관은 아니다. 방향이 거꾸로 된 그것은, 왕관이라기보다는 형틀에 가까웠다.
“……!”
점차 형체를 갖춰가던 왕관이지만, 제사장은 그것이 완성되기도 전에 몸을 틀어야 했다. 그의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저것’ 때문에.
‘요잔의 성벽.’
왕관을 그리던 것을 멈추고, 그 무엇도 뚫을 수 없는 굳건한 성벽을 떠올렸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은 손짓 한 번에 삼엄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것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성벽을 일으켜 세워 주변을 감쌌다.
“겨, 결계?”
주변의 술사들은 이 변화를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그들은 테론 아바예크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대단한 술사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런 이적을 부릴 수 있을 정도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었다. 보통사람의 눈에는 충분히 기적으로 보일 만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그들에게조차, 손짓 한 번에 이런 ‘결계’를 세우는 일은 기적처럼 보였다.
그렇다. 그들이 선 땅을 중심으로 제법 널찍이 펼쳐진 그것은 결계였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체…….”
술사들은 감탄하면서도 의아했다. 그들이 알던 테론 아바예크는, 물론 대단한 술사였지만 이 정도로 엄청나지는 않았다.
그들이 눈빛으로 물었지만, 당연히 제사장은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결계를 쳤지만 어디까지나 약식이다. 그마저도 성지의 지력을 끌어와 쓴 터라 불완전하다. 오래 버틸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인,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 * *
[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악!]
귀가 멀어버린 것 같다. 머릿속에 끝도 없이 메아리치는, 수천 명의 절규를 듣고 있자니 아찔하여 세상이 통째로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캬아아아아악!]
기괴한 광경이었다. 반투명한 막이 펼쳐져 있고, 연기처럼 퍼진 검은 형체가 그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려고 발악을 하는 듯, 괴성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를 막고 있는 반투명한 막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어,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봐라!]
군터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양손에는 칼과 창을 들고서, 연신 괴성을 터뜨리고 있는 검은 연기를 향해 달려갔다.
[……!]
흔들림이 멎었다. 괴성도 멎었다. 군터의 일갈은 흉포한 존재의 주의를 확실하게 끌었다. 괴조의 형상을 버리고 연기처럼 변한 와중에도 검은 창은 여전히 짙은 연기의 한 가운데, 허공에 떠 있었다.
어찌 잊겠는가. 지독하게 훼방을 놓고, 끔찍한 고통까지 안겨준 자그마한 미물의 모습을.
지독한 위기감 속에서도 분노는 고개를 들었다. 계속해서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고통이 타오르는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캬아아아아-!]
막을 두드리던 검은 연기가 옅어졌다. 동시에 자그마한 기운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군터는 한줄기 한줄기에 담긴 끔찍한 악의를 즉각 감지했다.
‘저주.’
믿기지 않지만, 그 모든 것들이 저주였다. 인간이 저주를 부리려면 충분한 준비를 하고서 정해진 술식대로 술법을 전개해야 하지만, 저 쇠락한 신은 그런 것을 무슨 손에 쥔 모래를 뿌리듯 마구 뿌려대고 있었다.
‘개념 자체가 인간과는 다른 건가.’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갓난아기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모래 한 줌이라면, 성인 남성이 쥘 수 있는 것은 그 열 배는 될 것이다. 그렇듯, 인간이 아닌 신쯤 되면 품을 수 있는 악의의 총량 자체가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수준에 이른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그게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품어온 것이라면.
잘게 흩어져서 쏟아지고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저 하나하나가 독이니, 저것들을 몇 번만 허용해도 독은 그의 영육을 파고들 것이다. 마치 그가 던진 창이 쇠락한 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흡!”
창을 휘둘렀다. 창끝에서 쏘아져 나간 사기가 저주의 비를 갈랐다. 하지만 그 기세는 저주와 부딪치면서 갈수록 약해져, 결국 얼마 멀리 뻗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떨어져 내리고 있는 저주는 여전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우득!
휘두르는 검의 궤적 밖에서, 한 줄기 저주가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군터는 마치 살과 뼈가 통째로 뜯기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은 불에 타는 것처럼 화끈했다.
창과 칼이 춤을 추며 허공을 갈랐다. 궤적에 들어온 저주의 빗방울은 모두 튕겨 나갔으나, 아무리 창칼이 빠르게 움직인들 모든 저주를 베고 튕겨낼 수는 없었다.
“…….”
마치 점점 불길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전신을 감싼 저주는 그를 조금씩 무너뜨렸다.
‘영악한 놈.’
상대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절대 직접 상대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상대는 시간을 들이더라도 확실하게 그를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아직인가.’
등에 날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저 높이 떠 있는 상대를 어찌할 방도는 없다. 사실 그로서는 이렇게 버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들이 제시간에 일을 마쳐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캬아아아아-!]
처음에 비해 눈에 띄게 힘이 떨어진 것 같은, 하지만 여전히 흉포한 괴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번엔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듯한 사나운 폭풍이.
콰드득!
폭풍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며 주변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
군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군터는 두 발로 버티고 섰다. 주변 땅이 모두 커다란 발톱으로 수십 번은 헤집은 것처럼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그가 밟고 선 좁은 땅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탄했다.
“?!”
입안 가득 고여 있던 것을 뱉었다. 시커멓게 죽은 피였다. 그 피가 땅에 닿자 누렇던 땅이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군터는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리고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결계 안쪽의 일이 다 되어간다고 해도, 그가 이제는 더 버티지 못한다.
[협력해라.]
그가 저 분노에 찬 신과 혈투를 벌이는 와중에, 주변을 가득 채웠던 절규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신이 마구잡이로 발하던 악의가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된 덕이었다.
[너희의 구원은 이제 내게 달렸다.]
[우리가 어찌하길 바라는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형체가 생겼다. 족히 수백, 아니 수천.
군터는 땅에 박힌 창을 뽑아 들었다. 날에는 균열이 갔고, 창대는 썩어버린 것처럼 검게 변했다.
[간단해.]
힘 한번 주자 창대가 뚝! 하고 부러졌다. 군터는 부러진 창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비교적 멀쩡한 칼 한 자루를 고쳐 쥐었다.
[내 명을 따라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