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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33화 (633/1,064)

633화

일으킨 시체는 삼백여 구. 하지만 그것들에게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의 용도는 시간 벌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콰직!

괴물들과 시체들이 격돌했다. 뭔가 대등해 보이는 표현과는 달리 부딪치기 무섭게 한쪽이 쓸려나가기 시작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이다! 쳐라!”

시체들이 괴물들의 이빨과 발톱에 찢겨나가는 순간,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척 보기에도 천 마리가 훌쩍 넘어 보이는 괴물들을 상대로, 고작해야 이백이나 될까 싶은 병사들이 덤벼드는 것은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가장 앞에서, 그들보다 먼저 달려드는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푸욱!

검은 창은 사마귀를 닮은 괴물의 머리 한복판을 깔끔하게 꿰뚫었다. 군터는 머리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고도 괴성을 지르며 날뛰는 괴물을 힘껏 걷어찼다. 덕분에 칼날 같은 팔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괴물을 떨쳐낼 수 있었다.

‘싸워라.’

단 한 번의 충돌로 시체들이 대부분 쓰러졌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상처나 출혈, 기타 부상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머리가 날아가든, 팔이 잘리든, 다리가 뽑히든, 시체들은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할퀴고 물어뜯어라.’

시체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피가 강물처럼 새어나간다고 해도 괜찮다. 그것들이 잠깐이라도 괴물들을 멈춰 세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시체들이 그렇게 날뛰어줌으로써 길이 일부 막히게 되니 그것도 큰 이득이다.

“자리를 지켜!”

숨을 헐떡이며 물러나는 괴물을 쫓아 숨통을 끊는 것보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명령을 내리는 이들이나 명령을 받는 이들이나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들이 그들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괴물들과 싸울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좁은 지형의 특성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다.

퍼억!

한 병사가 바들거리던 괴물의 뒤통수에 창을 내리꽂았다.

“물러나!”

괴물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싸움은 더 수월해졌다. 죽은 괴물들의 몸뚱이가 차곡차곡 쌓여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시체들이 방패가 되어주고, 덤벼드는 일부 괴물들을 차근차근 죽여나가니 안 그래도 좁은 길목은 점점 더 좁아졌다. 즉, 싸워야 하는 괴물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

전황이 괜찮다는 것은 직접 몸을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이 가장 잘 알았다. 그들은 이제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다. 이런 가벼운 농담까지 중얼거릴 정도로.

“입을 나불댈 정도로 힘이 남아도나?”

할렌의 서늘한 목소리가 병사의 입을 다물게 했다.

“너희가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건 장군께서 힘을 써주신 덕이다. 하지만 계속 지금처럼 편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할렌이 칼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힘을 아껴둬라. 아직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 * *

괴물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괴물들을 움직이고 있는 놈은 어리석지 않았다. 놈이 좁은 구멍에 대고 괴물들을 수백, 수천 마리씩 몰아넣어도 재미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충 괴물이 삼, 사백 마리 정도 죽어 나갔을 때부터 괴물들의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하늘에서 들려오는 지저분한 울음소리에 군터의 표정이 조용히 일그러졌다.

‘그래. 이렇게 나오는군.’

이럴 경우도 예상했었다. 괴물이 하늘에도 있다는 것은 진작 경험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투창 준비!”

어지간하면 활로 상대할 수 있겠지만, 날개 달린 괴물들은 그 정도 크기가 아니었다. 날개를 찢어놓지 않는 한 화살 몇 대 맞춘다고 해서 무력화시킬 수 없는, 그야말로 괴물들이었다.

“준비!”

창을 든 병사들 삼십여 명이 뒤로 빠졌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놓은 병력이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괴물의 수는 대충 스물에서 서른 사이. 그것들을 전부 잡아낼 수는 없겠지만, 놈들이 공격을 가해올 때 견제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놈의 통제력에는 한계가 있다.’

신, 정령, 뭐라 불러도 상관없는 ‘놈’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다. 놈은 괴물들을 마치 제 수족처럼 부렸지만, 그것은 놈에게도 확실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놈이 수만 마리의 괴물을 일제히 몰고 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날개 달린 괴물들을 부리는 것은 다른 괴물들을 부리는 것보다 부담이 큰 듯했지.’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니다. 이전에 겪은 전투들을 돌이켜본 결과다.

크르르…….

죽일 듯 덤벼들던 괴물이 뒷걸음질을 친다. 행동도 행동이지만, 눈빛에서부터 공격성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역시.’

괴물들을 통제하는 지배력이 느슨해졌다.

“온다!”

군터는 물러나는 괴물과 거리를 벌리며 외쳤다. 동시에 하늘 위에서 찢어지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 * *

쿵!

“동요하지 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테론 아바예크 본인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집중해야 했다.

환한 빛무리가 걷히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신주.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빛 때문에 그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흘러나오는 막대한 기운만으로도 그것이 신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우.”

아직 봉인을 다 푼 게 아니다. 봉인식을 일부 풀어 신주를 세상으로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제 시작일 뿐. 지금부터는 이 신주를 해체하고, 그 안에 있는 신을 일단 풀어놔야 한다.

‘하지만…과연 가능한 일인가?’

회의감이 들었다. 예민한 기감을 가진 술사이기에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주는, 신주 안에 깃든 존재는 감히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무언가였다.

‘매 순간이 전에 없던 도전이로군.’

하지만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다칠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해보는 것이 인간이다. 테론 아바예크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애써 밀어내며 다시 한번 술식을 떠올렸다.

‘신주를 해체한 이후부터가 진짜다.’

봉인이 풀린 정령이 가만히 앉아서 다시 봉인될 리가 있겠는가. 억제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은 북서! 카나이의 바람으로 시작한다!”

신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봉인이다.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술법이 하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지라 그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풀어가야 한다. 마치 미로 속을 걷는 것 같은 지난한 과정이지만,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망령이 준 ‘지도’가 있었다.

카아아악!

막 그 ‘지도’를 따라서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멀리서 거슬리는 괴성이 들렸다. 절로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섬뜩한 울음이었으나 테론 아바예크를 비롯한 술사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봉인지의 하늘은 얼핏 보면 훤히 뚫려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결계에 둘러싸여 있다. 입구를 통하지 않는 한, 괴물들은 결코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들은 집중하여 신중하게 신주의 봉인을 풀어갔다. 그런 그들의 주변에는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늦다.]

제사장이 초조함을 드러냈다. 의식을 찾은 이후, 마모되었던 감정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 그의 감정은 제법 풍부해진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들이 신주를 둘러싸고 봉인을 풀어가는 것을 보면서, 동시에 멀리 떨어진 전장을 살폈다. 이는 그의 강대한 의식 덕분으로, 이곳의 다른 망령들은 결코 그처럼 할 수 없었다.

[신이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하면, 조악한 시체들과 몇 안 되는 병사들로는 버티지 못할 터.]

아직까지는 순조롭다고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폭풍처럼 몰아칠 것이니, 대비하려면 미리 해야 한다.

[그대들의 분노를 내 어찌 이해치 못할까. 허나 그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것. 모든 것을 잃었는데 흘러간 과거가 무슨 가치가 있나. 우리는 현재에 있고, 추구해야 할 것은 무가치한 원한이 아니라 이 끔찍한 고통에서의 해방이다.]

독백이 아니었다. 그는 무수한 이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설득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구원을 바라는가. 어차피 그에게 협조하기로 한 이상, 그런 유치한 감정에 목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검은 형체들이 바람을 맞은 것처럼 일렁였다.

* * *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할렌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전황은 여전히 치열했다. 좁아터진 길목으로 괴물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군터를 필두로 한 병사들은 그것들을 넘어오는 족족 베어 넘기고 있었다. 교환비로 따지자면 압도적인 우세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는데, 시체들의 벽 너머엔 아직도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물러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옥쇄할 요량이십니까?”

할렌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단지 지쳤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내려놓은 것처럼 초연했다.

“기름을 쓴다.”

“얼마나…….”

“전부.”

“알겠습니다.”

잠깐 뒤로 물러나 숨을 돌리고 있던 몇몇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놓은 기름통을 가져와 벽처럼 쌓인 시체들 위에 뿌렸다.

“불을 붙여라!”

몇 대의 불화살이 기름 위에 떨어졌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졌고, 괴물들을 막던 병사들이 황급히 몸을 뺐다.

크아아아아―!

아무리 정신을 제압당해 앞만 보고 달려든다지만, 괴물들도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허억…허억…잘도 타는군요.”

아드리안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씩 웃었다.

“시간은 벌었습니다만, 물러나지는 않으실 테지요?”

“의미가 없다.”

물러난다고 해도 어디로 물러난단 말인가. 좁은 길목을 열어주면 괴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들어올 테고, 봉인지 내부에는 특별히 지형적 이점을 살릴 만한 곳이 없다. 있는 거라곤 다 무너져버린 유적들뿐.

“불길이 사그라질 때까지 편히들 쉬어라.”

사실상 이곳에서 죽으라는 명령이었지만, 병사들은 새삼 두려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악전고투를 펼치면서, 그들도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무리였던가.’

지형적 이점을 충분히 살리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다.

‘족히 천 마리는 벤 것 같은데, 작심한 모양이군.’

베고, 또 벴다. 찌르고, 또 찔렀다. 직접 참살한 괴물의 수만 해도 족히 수백은 될 것이다. 강건하다는 말조차 우스운 그의 육신조차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놈이 직접 나선다면 편할 텐데, 놈은 뒤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기 싫다는 거겠지. 영악하지만 옳은 판단이다.

“장군. 장군을 모신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습니다.”

“…….”

군터는 담담한 기색의 할렌을 흘깃 보고는 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할렌은 피식 웃었다. 그 다운 말이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흔들림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지경까지 와서도 무슨 희망이…….

“……!”

할렌이 눈을 부릅떴다.

점차 꺼져가는 불길 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수백 구의 시체들. 그것은 분명 군터가 일으켜 세웠던 시체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으니, 뼈만 남은 몸뚱이에서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넘실거린다는 점이었다.

“장군?”

할렌이 놀라며 고개를 돌려 군터를 보았다. 그런데 군터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그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것처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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