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화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신주의 봉인을 해제하고 갇혀 있는 신을 다시 봉인하는 것이다. 지금의 봉인은 도저히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망가져 있어, 봉인을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봉인을 복구하는 대신, 새롭게 다시 봉인을 하는 거다.
“하지만…정말 가능하겠습니까?”
테론 아바예크의 질문은 그를 비롯한 술사 전원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군터의 강압적인 주도에 따르기는 했지만, 정말 이게 최선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 수가 있나?”
“지금이라도…….”
“시간이 없다. 그 신이라는 놈이 돌아오기도 전에, 저 망령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을 테지.”
“…….”
망령들은 신주의 봉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반문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흘리는 악의의 편린에 스친 것만으로도 정신이 흔들리는 판국이다. 시간이 갈수록 버티기는 더욱 어려워질 테니, 망령들에게 찢겨 죽지는 않더라도 봉인을 손보기 전에 자멸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군터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저들이 알려준 봉인식이…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속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죽은 망령들이다. 품은 악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지독하고, 심지어 저들은 봉인되어 있는 ‘신’을 섬기던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생전에 적이었던 카라누르의 병사들을 위해 지식을 베풀어줄까?
“그들은 더 이상 신자가 아니다.”
군터는 단언했다. 제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긴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인간의 의지나, 혹은 신앙심 같은 것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그들은 한때 그들이 섬겼던 신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옥으로 내몬 거인, 아간투스베록을 증오했지만 그들의 신에게도 원망의 화살을 일부 돌리는 듯했다. 무기력한 신에 대한 실망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뭐가 됐든 이쪽에게는 좋은 일이니까.
“한때는 목숨 바쳐 섬기던 신이었을 터인데, 이해하기 어렵군요.”
군터는 그리 말하는 테론 아바예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어찌 그러시는지.”
“백 년이 넘도록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본 적이 있나? 심지어 육신까지 다 사라져버린 후에까지.”
“…….”
“그들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까지 각오했던 자들이 꺾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꺾이기는 한 것인가? 테론 아바예크가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군터와는 달리 소리를 듣지 못하며, 따라서 속임 없는 진의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군터는 그에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들리고 느껴지는 것을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지는 않을 테니.”
“…예.”
* * *
봉인석 두 개에 균열이 갔지만, 그럼에도 신주의 봉인은 굳건하다. 아니, 굳건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미 봉인된 신의 일부가 멋대로 활개를 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봉인은 이미 일부가 깨진 것이 아닌가.
[문이 조금 열린 셈이다. 하지만 결코 전부가 열리지는 않아. 문이 뜯겨져 나가지도 않지. 균열의 크기는 절묘한 수준으로 조절 되었다.]
제사장은 그렇게 말했다.
[문이 저절로 열리지는 않았을 터. 연 자는 누구지?]
신주의 봉인에 손을 댄 자. 이 모든 일의 원흉. 군터는 그에 대해 물었으나, 제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는 몸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거의 사람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감정의 표출, 그에 따른 사소한 몸동작까지.
[모른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그러나 어떤, 강대한 존재의 흔적은 느낄 수 있었지.]
봉인이 흔들리면서 깨어난 것은 신만이 아니었다. 가장 강대한 의식을 지닌 제사장이었기에, 그는 희생된 망령들 중 가장 먼저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였기에, 그때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잔향을 느낄 수 있었다. 무척이나 강대하며, 위험한.
‘의도적으로 봉인을 건드린 게 맞았군.’
그럴 거라고 추측은 했지만, 확인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흉수에 대해 더 알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러운 성과다. 이제 남은 것은 무사히 일을 마무리하는 것.
[어떨 것 같나.]
[내게 묻는 건가?]
[당신은 술법에 대한 조예가 깊으니까.]
제사장이 잠시 침묵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무언가를 살피고 있는 테론 아바예크를 쳐다보았다.
[제법 괜찮은 솜씨와 자질을 지녔다. 함께 일을 할 자들도 있으니, 내가 알려주는 대로만 따른다면 봉인식을 재구축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그렇게 일을 마치도록 얌전히 기다려주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놈은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제사장이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놈’이라는, 그에게 있어서는 과격한 표현이 거슬린 듯했다. 아무리 지금은 등졌다지만, 한때 목숨 바쳐 섬겼던 신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그래. 느껴지나 보군.]
[시간이 갈수록 뚜렷하게.]
살펴보고 있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놈은 이미 여러 차례 쓴맛을 보았고, 때문에 신중해졌다. 하지만 그 신중함이 봉인이 풀리고, 재구축되는 순간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터.
[신은 홀로 너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도 권속들을 불러모으고 있겠지. 너희가 싸웠다던 괴물들 말이다.]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쉽지 않을 터.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지.]
[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듯, 한번에 모든 것을 끝내려 하겠지. 그대의 힘을 의심치는 않지만, 저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으로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겠나?]
[막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너무 간단히 말하는군.]
심각해진다고 해서 달리 방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 믿는 구석도 있다.
이 봉인지의 지형은 입구가 좁고 안쪽의 공간은 넓어, 안에서 버티기 좋은 형태다. 비록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하나, 입구를 막고 버틴다면 괴물들이 몰려온다고 해도 시간을 버는 게 가능할 것이다. 물론,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들이 일을 마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가 관건이겠지만.
[당신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
[우리는 육신을 잃은 자들이다. 게다가 봉인에 묶여있기까지 하지.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설령 그런 것이 가능하다 한들…육신 없이 영만 남은 우리는 신의 힘에 쉬이 휩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그들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악의를 품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괴물.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그것도 이미 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것들의 정신을 건드려봐야 얼마나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준비가 충분하길 바라지.]
[의욕이 생겼나?]
[그대가 성공해야 우리도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이쪽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다. 이런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은 나름의 농담이었을까. 군터는 제사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섰다. 술사들 쪽도 열심이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준비할 것이 있었다.
* * *
“봉인을 해제한 후, 약간의 시간은 있을 것이다.”
테론 아바예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술사들을 보며 말했다.
“봉인된 정령이, 풀려난 후에 곧바로 날뛰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봉인된 존재를 ‘신’이 아닌 ‘정령’이라 불렀다. 제국민으로서 당연하지만, 그들은 여명 교단의 신자였고 교단에서 인정하지 않는 신을 신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제까지 잘만 ‘신’이라 불러왔다. 그래 놓고 이제와 표현을 바꾼 것은, 이제 시작할 일의 심적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였다. 신을 다루는 것보다는 정령을 다루는 것이 덜 어렵고 덜 위험하게 느껴지니까 말이다.
“봉인식을 재구축할 때는 봉인된 존재들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그들이 정령을 억제하면, 우리는 준비해둔 식을 발동시키는 거다.”
망령들이 신을 잠시나마 억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신이 반으로 나뉘었기에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바깥으로 떨어져나간 악의의 화신 덕에 아직 봉인되어 있는 반쪽은 비교적 순수한 상태일 터. 그렇기에 가망이 있다.
“이제 귀를 닫아라. 우리는 우리의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주사위는 굴려졌다. 테론 아바예크의 선창에 술사들이 일제히 답하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술력이 일어나고, 아무것도 없던 땅 위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같은 시각. 봉인지의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군터가 고개를 돌렸다. 미세한 흔들림이 그의 상념을 깬 것이다.
“시작된 겁니까?”
그의 기색을 살피던 할렌이 물었다.
“그래.”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몰려오기 시작할 거다.”
착각이겠지만, 벌써부터 역한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여기서 이긴다면 살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우리 모두 이 조용한 곳에 묻히게 되겠지.”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이기에 굳이 목소리를 키울 필요가 없었다. 나직이 말해도 모여 앉은 병사들 모두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용맹하게 싸우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당연히 전투의지를 북돋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이들이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살아라. 살아서 버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명예도, 뭣도 없는 곳에서 무리하지 말라는 소리다.”
하고 싶었던 말이 제대로 닿았을까. 알 수 없지만, 병사들의 눈빛은 확실히 변했다. 이미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이들에게 틀에 박힌 말은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것이라면, 다 꺼져가는 불씨에 바람 한 줌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쿠웅!
봉인 안쪽에서 묵직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막대한 영기가 바람을 타고 휘몰아쳤다. 아니, 무지막지한 영기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휴식은 끝이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크아아아아아아―!
저 바깥에서, 기다리던 괴성이 들려왔다.
“흐읍.”
동시에, 군터는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창을 땅에 내리찍었다. 창에 맺혀 있던 사기가 지면을 타고 흘러, 수북이 쌓여 있던 시신들에 닿았다.
그으으으…….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백, 이백……. 병사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뒷걸음질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온다.”
계곡의 좁은 길목에서, 흉측한 모습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