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화
[서로 하나씩 묻는 게 어떤가.]
군터는 지금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망령인지 뭔지 모를(스스로를 ‘제사장’이라 밝힌 자는 자신들이 망령이 아니라고 했지만) 것들 사이에서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것이 유효했는지, 차분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적의를 드러내던 제사장이 약간은 누그러졌다.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서 그런 그의 심경의 변화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좋다. 어차피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복수심과 시간뿐이니.]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 망령과 비슷한 것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궁금한 점도 많았고.
[너희는 이 땅에 있던, 멸망한 나라의 사람들인가?]
[그래. 우리는 델프티의 병사였고, 신을 섬기는 사제였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이 땅에 존재했지. 너희 침략자들이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노가 들끓었다. 수천의 기세가 군터를 자연스럽게 압박했다. 군터는 그 악의에 먹히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하고 몸에 힘을 주었다.
[너희의 나라가 멸망한지 백 년도 더 되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하나씩 묻자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랬지.]
군터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제사장’에게 답했다.
[묻고 싶은 것을 물어라.]
[넌 누구지? 거인의 주구인가?]
또 나왔다. 거인이라는 애매한 표현보다, 확실하게 이름을 말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을.
[거인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자가 맞는지 모르겠군.]
뜻을 직접 전하는 소리에 거짓은 섞일 수 없다. 여기서 모른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 왜냐하면, 거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들었을 뿐이지만 군터는 그게 누구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아간투스베록. 저주받아 마땅한 학살자를 말하는 것이다.]
[난 그의 수하가 아니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넌 카라누르의 군인이 아닌가.]
[질문은 하나씩이 아니었나?]
[네 말이 맞다. 물어라.]
[조금 전에 물었던 것을 다시 묻지. 너희의 나라…델프티가 멸망한지 벌써 백 년도 더 지났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제사장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의 기운은 요동치는 감정을 따라 크게 들끓었다.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끔찍한 저주 속에서 고통 받는 중이다. 너희 카라누르의 그 자랑스러운 군주라는 자가 건 끔찍한 저주지.]
다시 한 번 끔찍할 정도의 악의가 소용돌이쳤다. 군터는 그 한복판에서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다시 내 차례군.]
제사장의 형체가 어느새 불처럼 일렁였다.
[그 저주받을 거인과 관련이 없다면, 넌 왜 이곳에 왔지?]
[이곳에 발생한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서.]
[재앙이라. 알만하군.]
[이쯤 되었으면 내가 너희의 원망을 살 이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군터는 그를 둘러싼 자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떤 이들은 형체도 없이 안개처럼 흐릿했고, 어떤 이들은 제사장만큼은 아니어도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네가 거인의 주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는 카라누르의 군인이지. 그리고 카라누르는 우리 델프티의 영원한 적. 우리가 너를 적대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너희의 나라는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멸망했고, 너희는 지금까지도 원치 않게 고통을 받고 있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조롱은 집어치워라.]
[조롱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난 제안을 하고 싶은 거다.]
[제안? 네가 우리에게 제안할 것이 있나?]
[너희를 옭아매고 있는 저주를 풀어주지. 그 대신, 내가 이곳의 비틀림을 해결하는 데 협조해라.]
* * *
이들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부터 의심했었다. 그리고 제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들, 델프티의 망령들은 봉인에 갇힌 악의의 일부다. 그러나 이들은 ‘신’이 아니다. 신주가 봉인한 신과는 별개라는 뜻.
[우리는 매개로 쓰였다. 거인은 우리의 목숨과 영혼을 이용해 우리의 신을 가뒀다.]
술법에 조예가 깊었던 제사장조차 그런 끔찍한 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거인, 아간투스베록이 사용한 것은 그만큼 잔혹한 술법이었다. 인신공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규모도 그렇고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천 명의 제물을 사용하는 쪽을 택했다.
[효율적이군.]
[…그래. 네 말대로다. 놈의 입장에서 보면 지독히도 효율적인 방법이었지.]
당시, 이미 전세는 기울었었다.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연합군은 카라누르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여러 번 패퇴하였으며, 종국에는 델프티만이 홀로 남아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 성지까지 이르러 끝을 앞두고 있었다.
3천 명의 결사대. 그리고 성지를 수호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사제들. 성지의 지형을 이용해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벌이던 그들은 잔혹한 거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지. 네 말처럼, 놈에게 있어서는 그게 효율적이었을 테니.]
결사항전을 펼치던 전장이 그대로 그들의 무덤, 아니 감옥이 되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비참한 최후가 그들을 맞이했다.
[우리는 우리의 신과 함께 갇혔다. 신께서 발하는 분노와 슬픔은 우리를 끝없이 물들였지. 원치 않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은, 겪어보지 못한 자는 알 수 없는 끔찍함이다.]
처음에 그들은 애원했다. 분노하고 좌절한 신을 달래기 위해 그들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그들의 신은 봉인 밖에서 섬길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그게 신의 본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
[제사장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감당하기 힘든 세월 동안,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그 어떤 신실한 마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위대함에 대한 생각은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홍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는, 폭우로 농토가 망가져보지 않은 자는 비를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법. 농지에 적당히 내리는 비는 축복이지만, 그 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폭우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축복은 저주가 된다.
제사장은, 그들은 단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신이라고 믿고, 숭배했던 존재에게 인간을 굽어살피는 마음은 없다는 것을.
[신은 그저 존재할 뿐. 거기에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의 세월. 고작 백 년이 좀 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고통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었었다. 절망만이 깊어져 갔다. 그들은 신의 절규와는 상관없이, 그들만의 분노를 키웠다.
[어느 순간, 무언가 변했음을 깨달았지. 우리를 끝없이 뒤흔들던 분노가 조금은 약해졌다.]
그 때문에 그들은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스스로를 인지하고, 상황을 인지한 그들은 함께 봉인되어 있던 신의 일부가 새어나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봉인에 틈이 생긴 거지.]
[너희는 빠져나가지 못했나?]
[봉인에 갇힌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봉인 그 자체지. 봉인에 갇힌 것은 신이며, 또한 빠져나간 것이 아니다. 새어나간 것뿐.]
[차이가 있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 된 것. 원해서 한 일이 아니다. 물을 담은 그릇에 작게 균열이 갔으니, 안에 담긴 물이 일부 흘러나간 것이지. 그것을 신이라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겠군.]
신의 일부. 하지만 그 일부가 품은 힘과 악의만으로도 이 땅의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능하겠나? 우리를 저주에서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 봉인을 없애야 한다. 하지만 그리 되면…….]
[알고 있다.]
봉인된 신이 풀려나겠지.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
[한 가지만 분명히 하지. 난 너희를 풀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 너희는 내게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은 너희의 신에게 이로운 일은 아니야.]
[알고 있다.]
제사장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의 모습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잊고 있었던, 잊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인간이었던 시절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인간성이 되돌아오면서 딱딱하기만 했던 얼굴에도 감정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쉼 없이 분노했었지. 그 분노는 우리를 가둔 거인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어째서 신은 고통스러워하는 신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가. 분노와 상실감 때문에? 어린아이조차 우는 것이 끝나면 조금은 진정하여 이성적이 되는데, 어찌 신은 그러지 않는단 말인가?
[이따금 회의가 들었지만, 억지로 무시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평생이 부정당할 것이며,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이 더 심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런 식으로 회피한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이제 우리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네가 진정 우리를 해방시켜주겠다면, 우리는 네게 전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좋아.]
[허나 서둘러라. 우리가 너희의 존재를 알고 있듯, 신 또한 알고 있다. 신의 악의는 대상을 가리지 않으니, 너와 너의 무리 또한 안전하지 않을 터.]
[알고 있다.]
알다마다. 이곳에 온 뒤로 벌써 셀 수 없이 그 악의와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군터는 즉시 테론 아바예크를 불렀다.
“장군.”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대략적인 것을 설명했다. 봉인의 매개로 쓰인 수천의 망령들에 대한 것과, 그들과 맺은 거래까지.
“장군의 말씀은 그럼.”
“자네도 알겠지만, 봉인석을 보수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맡겨주신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봉인을 깨뜨린다면, 그 후의 일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아. 하지만 내게 생각이 있다.”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인석을 손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들, 그때까지 버티지는 못할 거라는 걸.
“에…안녕하십니까.”
그리하여 테론 아바예크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안개, 그러니까…‘제사장’이라는 자와 마주한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 봉인의 구조에 대해 알려주겠다.]
테론 아바예크는 제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군터가 그의 말을 테론 아바예크에게 전하고, 또 테론 아바예크의 말을 제사장에게 전하는 통역의 역할을 맡았다.
[봉인을 구성하는 뼈대는 우리의 사기(死氣)와 성지의 지기(地氣)다.]
제사장의 소리가 군터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