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네 번째 봉인석 앞에 야영지를 꾸린 지 이틀째 되던 날. 스무 명 가량의 병사들이 크게 다투었다. 단순히 언쟁을 벌이거나 가볍게 주먹다짐을 한 정도가 아니라, 서로 무기를 뽑아 들고 약간이지만 피까지 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그리고 뜬금없이 벌어진 일이라 미처 제지할 틈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군터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노했다. 감정이 격앙되자 평소 제어하던 기운이 사납게 뻗쳤다. 할렌과 아드리안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들도 할 말이 없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얼마 되지도 않은 병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벌이는데 그걸 막지 못했으니.
군터는 난리를 피운 병사들을 모두 참했다. 단호하고 냉혹한 결정이었지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으로 적어도 한동안은 분위기가 뒤숭숭하더라도 조용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수십 명이나 목이 달아났으니 그리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들은 그게 착각이며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으…으으! 이 더러운 침략자 놈들!”
“복수하겠다!”
눈이 뒤집힌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군터도 그것을 직접 보았다.
“장군. 이건…….”
할렌이 옆에서 다급하게 하는 말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그렇군.’
군터는 이제야 이 모든 것이 어찌 된 영문이지 알아차렸다.
“저주…….”
테론 아바예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이 즉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소리쳤지만, 군터는 그 표현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주. 그래. 이것은 저주다.
“다섯 번째를 찾아라.”
“예? 장군. 하오나…….”
“어차피 저걸 계속 붙들고 있어 봐야 당장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나. 다섯 번째를 찾아라. 찾아서, 그것도 이것처럼 비틀려 있는지 확인해라.”
* * *
[소문은 들었지. 발칙한 짓을 벌인 모양이더군.]
거인이 잔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 쥐여 있어도 위화감이 없는 잔은 평범한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였다.
그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겉으로 드러난 장식에 불과했다. 그는 불쾌해하고 있었으며, 그 감정은 뜻을 담은 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끝마친 일에 미련을 두었나? 당신답지 않군.]
[오래전에 한 일일지라도, 어찌 됐든 내 행사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지. 그런데 어찌 내가 한 일에 장난질이 더해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겠나.]
그의 사나운 시선이 마주 앉은 사내에게 향했다. 그러자 사내를 휘감은 검은 안개가 꿈틀거렸다. 마치 위험한 무언가에게서 사내를 보호하려는 듯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유령의 짓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필시 그 노괴가 벌인 일이겠지. 수도에 눌러앉아 있으면 내가 손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뭘 그리 성을 내지? 이해할 수 없군.]
[네까짓 게 나를 이해하려 드는 것부터가 문제다. 너와 내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나? 어설프게 만들어진 잡종 주제에.]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떠드는 것이 아니다. 소리에 담긴 오만과 경멸은 진심 그 자체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만의 화신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 거인이다. 이런 자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봐온 세월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새삼 불쾌할 이유가 없다.
[찾아오지 않았다면 직접 황도로 가 노괴를 추궁했을 것이다.]
[그게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을 터.]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못할 이유는 없지. 할 이유가 없을 뿐.]
거인이 자세를 바꿨다. 쇠로 만든 잔이 그의 손아귀에서 진흙처럼 으스러졌다.
[노괴와 붙어먹더니, 잡종 놈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군.]
[엄밀히 말하면, 당신이 노괴라 부르는 그도 잡종 아닌가? 당신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잡종이라는 말 대신 노괴라 부르는가.]
거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손을 털자 자그마한 공으로 변한 쇳덩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해명을 하러 온 줄 알았더니 도발을 하러 온 것이었나. 도전은 피하지 않는다.]
[나도, 그도 당신과 대립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당신의 말처럼 해명을 하기 위함이다.]
[해봐라.]
[그는 황제가 이룬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한다.]
거인이 조소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복수치고는 너무 좀스러운데.]
[글쎄.]
[허망한 삶이로군.]
허망한 삶? 사내는 그 말이야말로 참으로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같은 존재들에게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노괴가 내게 무어라 전하라던가.]
[승전비를 훼손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게 다인가?]
[그래.]
[여전히 오만하기 짝이 없군.]
불쾌함은 없다. 성의 없는 해명이 어느 정도 통했다는 뜻이리라. 약간 체면을 추켜세워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일까. 오만하다고 하지만, 진정 오만한 자는 누구인가. 적어도 사내가 아는 한, 이 거인보다 오만한 자는 없다. 근거는 있다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자신감은 과하다.
세상이 자신의 밑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자가 목줄이 채워져 자유를 구속당했으니, 그가 자존심에 입은 상처는 상당하다는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이리라.
그 상처가, 그 고통이 분노로 타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을 숨죽이게 했던 그의 잔혹함은, 바로 그 분노로 인한 것.
[그대의 승전비를 훼손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한다고 했다. 허나 결과적으로 이것은 그대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내게도 좋은 일이라?]
[그는 황궁의 문을 열려고 한다.]
[…….]
거인이 침묵했다. 조소가 달려있던 얼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하게 변했다. 뜨겁게 활활 타오르던 불이 한순간에 얼음덩이가 된 것처럼, 묵직하면서도 사납던 그의 기세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말 모든 것을 지워버릴 생각인가 보군.]
[그는 진심이다.]
[열쇠는 찾았나?]
[아직. 허나 금방이다. 흔적을 찾았으니.]
거인이 다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꽁꽁 숨겨두었을 텐데, 제법이군. 노예들의 솜씨인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방해가 없다면 일은 더 빨리 진행되겠지.]
[다른 녀석들은?]
[줄카는 다른 일로 바쁠 것이고, 룬차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말은 바로 해야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 아닌가. 놈은 이제 없으니까.]
[…….]
[세상은 나를 잔혹하다 하지만, 너희도 만만치 않아. 노괴가 수도를 떠났을 리는 없으니 네가 움직였겠군. 안 그런가?]
사내는 잠깐의 침묵 끝에 순순히 긍정했다.
[그래. 맞다.]
[가증스러운 놈. 뭐, 좋아. 그럼 그 음침한 놈은?]
[그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음?]
[그가 미리 알렸다. 더 큰 세상으로 떠날 것이니 잡스러운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더군. 그리고 얼마 전, 그의 탑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더 큰 세상?]
[그의 표현이다.]
[하여간 알 수 없는 놈이야. 놈은 늘 그랬지. 함께 움직이면서도, 혼자서만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었어.]
동감이었다. 쿠엘단은 저마다의 비밀을 품은 그들 사이에서도 특히 신비로운 사내였다. 황제조차 그의 특별함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그가 숨기지 않았기에 그들 모두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을 이해한 자는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쿠엘단은 현자보다는 미치광이에 가까웠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가 보았다는 ‘더 큰 세상’이라는 것이 실존하기는 할까?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그와 쿠엘단이 다른 게 무엇인가.’
동기는 달랐어도 결국 그 끝은 비슷할 것이다. 사내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협조했다. 그의 명분, 혹은 이상에 동의했기 때문에.
[좋아. 기다리지. 이미 꽤나 저질러놓은 것 같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떠들썩해질지 기대되는군.]
거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검은 안개 속으로 잠겼다. 안개가 걷혔을 때, 사내 역시 사라져 있었다.
* * *
“같았습니다. 아니, 더 심각하더군요.”
다섯 번째 봉인석을 살피고 온 테론 아바예크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군터는 벌떡 일어났다.
“장군?”
“따라오지 마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의혹이 깔끔하게 걷혔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신중이라는 미명하에 너무 움츠러들어있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충분한 의심이 들었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장군!”
테론 아바예크는 말을 탄 군터가 달려가는 방향을 보고 경악하여 소리쳤다. 할렌과 아드리안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도 놀라며 뒤따르려 했지만, 따라오지 말라는 군터의 일갈이 그들을 붙들었다.
히히힝!
어느 정도 달렸을까. 군터를 태운 말이 두려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군터는 말을 어르고 달래며 계속 달리게 했지만,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오자 미련없이 말에서 내렸다.
[복수…복수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희미하게 어떤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와라.]
군터는 그 희미한 소리들에 답했다. 여기저기서, 수십 수백 개의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하나하나의 소리에 일일이 답했다. 그럴수록 희미하던 소리는 뚜렷해지고, 그 수도 늘어났다.
“…….”
아무것도 없었다. 봉인석들 주변에서 보았던 무너진 건물의 잔해 같은 것들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허허벌판. 군터는 그 한복판에 다가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기감에 잡히는 기운은 농밀해졌다. 강한 냄새에 코가 마비될 수 있다면, 이 농밀한 기운에는 기감이 망가져버릴 것 같았다.
[넌 누구지?]
[너는 누구냐.]
[카라누르인인가?]
[저주스러운 거인이 보낸 자인가?]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영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환영이건 실재건 아무 상관없다. 그들이야말로 군터가 찾고자 했던 것이었으니까.
[너희는 뭐지?]
한 마디 물음. 그에 대한 답은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이었다.
[침략자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냐고 묻는 건가?]
[복수하겠다.]
흐릿한 형상이 군터를 둘러쌌다. 군터는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망령들인가.]
[망령? 아니. 달라. 우린 망령이 아니다.]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형상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달리 뚜렷했다.
[넌 거인이 아니군. 그가 보냈나? 우리를 탄압하라 하던가?]
[넌 누구지?]
[난 신을 섬기는 제사장. 한때, 나는 이 땅을 대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끔찍한 저주에 묶여 영원토록 고통받고 있지.]
그가 스스로를 제사장이라 밝힌 순간, 안 그래도 뚜렷했던 그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연기처럼 넘실거리는 것만 아니라면 온전한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제 네가 답할 차례다. 넌 누구냐. 거인이 보냈는가?]
[아니.]
스스로를 제사장이라 밝힌 자는 군터의 짧막한 답을 의심하지 않았다. 뜻을 그대로 전하는 소리에 거짓이 섞일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약간이지만 분노를 거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넌 누구지? 왜 이곳에 왔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