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전투가 끝났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정해졌다.
그러나 패해 죽은 자들이야 입을 다물었다고 쳐도, 승리하여 살아남은 자들조차 말이 없었다. 가쁘게 뱉는 숨, 고통을 참으며 내는 신음. 그것이 이 무거운 정적을 깨는 유이한 소리였다.
“…….”
할렌은 눈을 감은 젊은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보았던 얼굴이다. 지위에 비해 젊은 나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병사들을 지휘하던 모습이 인상 깊어 다가가 말을 걸었었다.
마음에 드는 젊은이였다. 전투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 생각은 이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놈이 갑자기 일어나서 덤벼드는 바람에…….”
변명처럼 떠드는 말은 무시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놈이 덤벼들었든, 정말 죽은 놈이 덤벼들었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전장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의미 없이 날린 눈먼 화살에 지휘관의 목젖이 뚫리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전장이다.
무엇도 탓하거나 원망할 필요 없다. 다만, 그저 아쉬울 뿐.
‘용감하게 싸웠으니, 후회 없이 잠들게나.’
할렌은 몸을 돌렸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 자꾸 쌓이는 씁쓸함을 털어내며, 그가 해야 할 일을 마저 했다.
* * *
군터는 무릎 높이의, 아마도 예전에는 어떤 건물의 일부였을 잔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장군.”
“끝났나.”
“예. 피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눈으로 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일이지만 별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병력인데 거기서 몇 명 정도 더 살고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열 명 중 하나도 살지 못했다. 일찍이 수하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얼간이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지금의 그는 되지 않겠다고 한 ‘얼간이’와 닮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어찌 됐든 부하들을 죄 죽여버렸으니.
그렇지만 자책하지는 않는다. 상술했듯,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군터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거의 자신. 혈기만 앞서고 순진했던 그때의 젊은 군인이 지금의 자신을 보았더라면 어찌 생각했을까. 비난했을까? 어쩔 수 없었다며 이해해줬을까?
“움직인다.”
꽤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수천 명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 * *
“이것도 이상이 없습니다.”
세 번째 봉인석도 문제는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둘.
앞으로 두 개만 확인하면 된다.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봉인지가 넓다 해도 넉넉잡아 앞으로 하루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남은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짐작한 대로, 일이 벌어졌다. 날이 저물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지를 꾸린 후였다. 일어나리라 예상했던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일어났다.
“이런 씨발!”
모닥불 주변에 앉아 있던 한 병사가 뜬금없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다른 병사들이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일어선 병사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아아아악!”
“어이, 왜 그래?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다른 병사들이 그를 말리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지르는 병사의 몸부림과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갑자기 소리를 빽빽 질러대면서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것도 그렇지만, 핏발이 잔뜩 선 눈은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압해!”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병사들이 그를 거칠게 억눌렀다. 조금 전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미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멈추면 목이 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올라갈 터였다. 여기서 더 떠들게 두었다가는 확실히 목이 떨어질 테고.
“무슨 일이냐.”
소란을 들은 아드리안이 다가왔다. 병사들은 적당히 거짓을 말하지 않는 선에서 동료를 두둔하려 했으나, 사실 아드리안은 어찌 된 일인지 다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터라 웬 미친놈이 처음 버럭 할 때부터 다 들은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
간단한 일이다. 소란을 피운 미친놈을 엄벌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점점 맛이 가고 있다. 그간 쌓인 것이 터지기 시작한 건가.’
렌에 들어선 이후로 단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밤낮없이 덤벼드는 괴물들부터 시작해서, 정체 모를 어둠 속에서 겪은 악몽 같은 전투까지. 거기에 봉인지에 들어선 후에는, 바로 어제까지 나란히 걸으며 함께 싸웠던 아군이 배신하기까지 했다. 그 충격은, 어떤 면에서는 어둠 속에서 겪은 악몽보다도 더 컸다. 지독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나마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지켜주는 아군의 존재였는데, 그 믿음이 깨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것은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군.’
단순히 사기가 꺾인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몇 마디 말이나 포상 같은 것으로 달랠 수 없는.
이런 일은 나름대로 군문에서 잔뼈가 굵은 아드리안조차 겪은 적이 없었다. 아마 그의 상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간혹 전장에서의 긴장과 두려움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이 나가버리는 놈들이 있다. 대개 특별히 끔찍한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본래 심약한 놈들. 그러나 그런 놈들은 본격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어떤 조짐을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아무런 전조도 없다가 갑자기 미쳐버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그 극히 드문 경우가 하필 지금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일 리가 없지.’
어찌 그것을 확신하느냐고? 아드리안 본인조차도, 약간이지만 지저분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 때려치우고, 말을 타고 멀리 도망가버리고 싶은. 그리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뭔지 모를 것을 시원하게 토해버리고 싶은.
단언컨대, 그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나섰던 전투에서도,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도, 세상에 둘도 없던 친구를 비참하게 떠나보냈을 때도.
‘이곳에…뭔가 있다.’
의심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 * *
네 번째 봉인석.
군터는 그것을 보자마자 한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뿐만 아니라, 눈 달린 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건…….”
할렌이 봉인석의 기괴한 외관에 눈살을 찌푸렸다.
앞서 보았던 세 개의 봉인석과 비슷했다. 커다란 돌덩이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과 그림.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커다란 돌덩이의 이곳저곳에 덩굴 같은 것이 자라나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덩굴이 아닙니다. 저것에서는…지독한 비틀림이 느껴집니다.”
테론 아바예크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간혹 돌에서 피어나는 꽃이며 풀이 있다지만, 저것은 그런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돌덩이가 주둥이를 벌리고 덩굴을, 아니 덩굴 같아 보이는 것을 토해내는 모양새였다. 그 기괴함은 말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 처음 보자마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저것 역시, 일단 살펴보기는 해야겠지?”
“…예. 그래야겠지요.”
탐구욕이라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테론 아바예크조차 꺼림칙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책임감 때문이든, 왕성한 지식욕 때문이든 가장 먼저 봉인석에 다가갔다. 그가 먼저 앞으로 나서자 뒤에 있던 술사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무엇인지 알겠나?”
“아니요. 이런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일단 확실한 것은, 이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지. 이게 뭘까? 우선은 이것이 현상인지 원인인지를 알아봐야겠군.”
이번에도 봉인석을 살피는 것은 술사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봉인석을 휘감은, 혹은 봉인석에서 뻗어 나온 ‘덩굴’을 신중히 살폈다.
그러나 본격적인 관찰과 연구가 시작되고 반나절이 지날 때까지도 그들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들이 확인한 것은 ‘덩굴’이 생명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이 봉인석에 흐르는 기운을 흐트러뜨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흉물스러운 것을 모두 없애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이야기를 들은 군터가 그리 반문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저 덩굴 같은 것이 문제라면, 잘라내든 태워버리든 해서 없애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러나 테론 아바예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그랬다가는 봉인석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문제는 이미 생긴 것 아닌가?”
“저 덩굴은 봉인석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유하자면…혹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이미 한 몸인 것을 억지로 잘라내면 피를 흘리게 될 테고, 그렇게 될 경우 봉인석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방법은?”
“송구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답답한 이야기지만 군터는 이해했다. 봉인석이 유지하고 있는 봉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위태로운 것인지는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순간의 경솔함이 모든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봉인석을 다루는 일은 아무리 신중해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이곳의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다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후, 군터는 곧장 야영지를 꾸리게 했다. 금방 끝났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술사들이 감도 잡지 못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일단 며칠 정도는 걸릴 것이라 보지만, 그 이상 걸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들은 봉인석에 달라붙어서 날이 저물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다음 날 아침. 군터는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답해야 할 테론 아바예크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군터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시체 두 구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술사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열성적으로 봉인석을 살피던.
“타살의 흔적은 없습니다. 뭐, 술법이라면 모르겠지만…일단은 자살한 것 같습니다.”
시신을 살펴보던 할렌이 그렇게 말했다.
자살. 자살이라.
군터는 찌푸린 표정을 풀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술사들, 병사들. 모두 다른 얼굴이지만 그들의 얼굴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저들은…저주를 받은 거야.”
아주 작게 속삭이는 말들. 바로 옆의 사람도 듣지 못할 자그마한 목소리들이 군터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
문득, 군터는 고개를 들었다. 가파른 계곡의 절벽 위. 거대한 형체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눈을 좁혀 뜨고 다시 보았을 때, 그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지만…분명히 보았다.
‘괴조.’
거대하고 흐릿한 새의 형상을.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