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무슨 일이냐!”
후방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후미라고 해봐야 본대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뒤쪽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란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약간의 소란. 딱 그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반란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뾰족하게 외친 할렌은 물론이고, 군터조차도 말이다.
와아아―!
하지만 곧 있으면 가라앉겠지 했던 소란이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시끄러워지자, 그때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장군!”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아드리안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달려왔을 때는, 드디어 적들이 나타났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내뱉은 말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반란입니다. 애덤 모라크의 부관인 자이르라는 놈이 그를 찔렀습니다. 후미의 병사들은 대부분 놈과 함께 반기를 들었고, 제가 몸을 뺄 즈음에는 이미…….”
“반란?”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반란이라는 심각한 주제에 대해 보일 반응으로는 너무 심심한 것이었으나, 군터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란이라니? 후미의 병사들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막말로 그가 휘하 기병 스무 기만 이끌고 가도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본대의 전력에 비하면 당연히 더더욱 보잘 것 없는 수준이고.
그런데 그런 놈들이 반란을? 그것도 애덤 모라크의 등에 칼까지 꽂아가면서? 자이르라는 놈이 뭘 믿고 그랬는지, 무슨 말로 병사들을 꼬드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실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장군. 어찌하시겠습니까?”
할렌이 허리춤의 칼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발칙한 반란군들을 향해 달려갈 기세였다.
“놈들이 이곳으로 오고있나?”
“그건 모르겠습니다만…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럴 리 있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열심히 도망가고 있겠지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후미와의 거리를 길게 벌려놓았다. 그런데 설마 이런, 만약에도 없던 사태가 일어날 줄이야.
“병사들이 동요하기 전에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기병 백 기만 내어주신다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글쎄. 조용히 처리한다고 해도 병사들의 동요를 막을 수 있을까? 멀쩡히 잘 따라오던 후미가 어느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동요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리라.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됐든 반기를 들고 장수를 살해하기까지 한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군터가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느냐?”
“예. 피를 흘리긴 했지만 전부 피륙의 상처에 불과합니다.”
아드리안이 이를 부득 갈았다. 핏발 선 두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자이르라는 놈의 목을 비틀고 싶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할렌과 함께 가라. 한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처리하도록.”
“옛.”
할렌과 아드리안이 기병을 거느리고 떠났다.
“뭐야?”
“무슨 일이지?”
군터는 웅성이는 병사들을 흘깃 보았다. 아드리안이 병사 몇 명과 피투성이가 되어 말을 달려온 것을 모두가 보았다. 보고를 할 때는 목소리를 낮춘데다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이 군터의 친위대였기에 말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지만, 후미 쪽에서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기병까지 움직이지 않았나.
“무슨 일입니까?”
테론 아바예크가 물었다. 아드리안이 보고할 당시에는 그도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후미의 병사들이 반기를 들었다.”
“예? 그게 무슨…….”
“애덤 모라크의 부관 녀석이 그를 죽이고 병사들을 선동했다더군.”
“그런 말도 안 되는.”
“하여 수하들로 하여금 놈들을 쓸어버리도록 했지.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
이미 반란이 일어난 시점에서 큰 문제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군터를 보며, 테론 아바예크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거목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지.’
그렇다고 이 사내가 거목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안정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너무 감정적이어서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그의 무심함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며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대와 술사들 모두 내 옆에서 움직이도록.”
“예?”
“이곳에도 타이던의 병사가 적지 않게 있다. 자이르라는 놈이 일을 벌였다지만, 모르는 일 아닌가.”
자이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설마하니 이만한 일을 벌이는데 충동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관인 애덤 모라크를 죽이고 도망쳤다고 하지만, 놈도 설마 그 정도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번 전투를 치르면서 이쪽의 전력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분명히, 달아나는 것 외에도 뭔가 준비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곳에 있는 타이던의 병사들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지요.”
이곳에 있는 타이던의 병사들이 칠백 가량. 그들 모두가 등을 돌린다고 해도 두렵지 않지만, 문제는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에 테론 아바예크를 포함한 술사들. 그들이, 특히 테론 아바예크가 눈먼 칼에 맞아 죽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진다. 그들이 없다면 누가 이곳의 봉인을 살필 것인가.
“자이르라는 놈의 목입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 할렌과 아드리안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이르의 수급을 챙겨서 돌아왔다. 자신 있게 뛰쳐나갔던 것과는 다르게 자이르의 목을 베어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여럿이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묻어 있었다.
“이놈의 목을 베면 알아서 무너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오히려 악에 받쳐서 끝까지 저항하더군요.”
“내가 그렇게까지 미움을 샀던가.”
“그렇다기보다는…….”
“음?”
할렌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적당한 말을 고르는 듯했다.
“놈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놈들이니 목이 달아날 일만 남았다는 것을 놈들도 알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뭔가…….”
“약이라도 한 것 같던가.”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렇게 맛이 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것 같지도 않은 것이, 뭐라 설명을 드려야 할지…….”
군터는 횡설수설하는 할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두려움에 먹혀버린 자들은 익숙하다.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맛이 가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벌이곤 한다.
사실 조짐은 진즉부터 보였었다. 렌에 들어온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고, 특히 이곳에 오기 직전에 정체 모를 어둠 속에서 벌인 사투가 컸다. 그곳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은 한계를 드러냈다. 도망갈 곳이 있었다면 도망쳤을 것이며, 칼을 거꾸로 잡아도 잡았을 것이다. 다만 그곳에서는 싸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그 모든 두려움을 억누르고 억지로 싸웠을 뿐.
그렇게 억눌렀던 감정이 터진 것이리라. 그리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심하기는 하지만.
“저기, 두 번째 봉인석입니다.”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사이 두 번째 봉인석을 발견했다. 군터는 테론 아바예크를 비롯한 술사들과 함께 거대한 돌덩이를 향해 다가갔다.
“이곳은 좀 다르군.”
군터가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자 테론 아바예크가 답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봉인지는 본래 옛 원주민들의 성소였다고 합니다.”
“성소?”
“예. 자세한 것은 기록에도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만, 본래 렌에 자리를 잡고 있던 민족이 그들의 신을 숭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 신을 위한 성소였겠지요.”
봉인지에 막 들어서서 첫 번째 봉인석을 살필 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그러나 봉인지에 더 깊숙이 들어올수록, 간간이 건축물의 잔해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때부터 대충 짐작은 했었는데, 지금 이곳에 와서야 확신했다.
이곳은 폐허였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를.
‘패망한 신의 성소. 그 위에 봉인지를 세운 건가?’
마치 승자가 패자의 위에 걸터앉는 것 같은 모양새가 아닌가. 당시 전쟁을 지휘했다는 군주, 아간투스베록은 꽤 자신만만한 사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있습니다.”
테론 아바예크가 폐허의 한 곳을 가리켰다.
첫 번째 봉인석도 그랬지만, 두 번째 봉인석도 그 크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
‘다섯 개의 봉인석이라.’
겉으로 보면 볼품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별볼일 없어 보이는 돌은 이 봉인지를 지탱하는 축 그 자체.
‘처음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군터는 이 돌덩이가 정확히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봉인지 전체를 관통하는 힘의 흐름이 이 돌덩이를 거쳐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군사적 표현을 빌자면 군사와 물자가 지나는 요충지 같은 느낌이랄까.
“이 봉인석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테론 아바예크가 술사들과 함께 한동안 꼼꼼하게 봉인석을 살피더니 그리 말했다. 군터가 짐작했던 대로, 이 두 번째 봉인석 역시 첫 번째 봉인석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었다.
“이제 셋 남았나.”
“세 번째 봉인석부터는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곳에서부터 동북쪽으로 쭉 이동하면 될 겁니다.”
“그래.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던 군터가 슬쩍 눈을 돌렸다. 테론 아바예크가 의아해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까마득한 과거의 흔적들뿐.
“장군!”
할렌이 소리쳤다. 다급한 목소리.
“당황하지 마라. 병사들을 집결시켜.”
“옛!”
폐허의 바깥쪽. 경계를 세우기 위해 배치했던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창칼을 뽑아든 채, 정확히 이곳을 향해서 오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