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봉인석이라는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그냥 큰 돌덩이를 대충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외관이었다. 그러나 돌의 표면에 빽빽하게 새겨진 기이한 그림과 문자,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기운은 그것이 그냥 크기만 한 돌덩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일단…이 봉인석은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술식이 건재하고, 봉인석의 기운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테론 아바예크가 술사들과 함께 봉인석을 살피더니 그리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병사들을 풀어 인근을 살펴보던 할렌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정찰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더 들어간 모양입니다.”
첫 번째 봉인석에는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더 깊숙이 들어가 살펴보려 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조금 의아한 부분이다. 병사들도 봉인지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누누이 들었을 테고, 특히 신중한 술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후발대를 위해 그들의 흔적을 남겼을 법하다. 그런데 흔적이 없다?
위험이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은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곳에 들어온 뒤로…왠지 모르게 목덜미가 서늘하군요.”
군터가 느낀 것을 할렌도 똑같이 느꼈을까. 숱하게 생사의 고비를 넘어온 전사의 감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 거짓된 평온함에 속지 말라고.
“장군.”
테론 아바예크가 한동안 봉인석에 달라붙어서 시간을 보내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돌아왔다.
“이 봉인석에서는 더이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봉인석은 다섯 개. 하나가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나머지 넷을 살펴봐야 할 터.
“렌에 발생한 재앙의 규모를 봤을 때, 나머지 네 개 중 최소한 셋 정도는 문제가 있겠군.”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신주의 봉인은 다섯 개의 봉인석이 각기 하나의 다리가 되어 지탱하는 것인데, 그 균형은 다섯 개의 봉인석으로 인해 절묘하게 유지됩니다. 바꿔 말하면, 다섯 개의 봉인석 중 하나에만 이상이 생겨도 봉인의 균형이 크게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행일까 불행일까. 뭐가 됐든, 남은 봉인석 네 개를 전부 살펴봐야 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계속 이렇게 시간이 걸리나?”
하나의 봉인석을 살피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앞으로도 이 속도라면, 특히 남은 네 개 봉인석 중 이상이 있는 것이 몇 개나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이 봉인지에서 며칠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봉인석에 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록으로 보았던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봉인석의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앞으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이군.”
며칠씩이나 머물기에는 꺼림칙한 곳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무탈하게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 조용한 계곡에서 굳이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 * *
봉인지는 넓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와서 본 실제 크기는 밖에서 본 것과는 또 달랐다.
다섯 개의 봉인석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봉인지 전체는 비슷한 크기의 여섯 구역으로 나뉘었고, 다섯 봉인석은 각 구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넓게 퍼진 다섯 구역의 중심. 봉인지의 중앙에 위치한 마지막 여섯 번째 구역에는 바로 그 신주가 있었다.
첫 번째 봉인석을 살피고 난 후, 두 번째 봉인석으로 향할 때. 군터와 병사들은 신주가 위치한 구역을 멀찍이 지났다.
“우욱!”
왜소한 체구의 술사 한 명이 머리를 움켜잡고 비틀거린 것이 시작이었다. 술사들이 하나둘씩 이상 반응을 보였고, 군터도 미간을 찌푸리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신주가 위치한 봉인지의 중심 쪽이었다.
“신주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신주에 가까이 다가가면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버티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몇몇 술사들은 이미 반쯤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더 나빠진다면 뭐, 혼절이라도 한다는 걸까.
“서두르지.”
술사들을 중심으로 두고 천여 명의 병사들이 그들을 호위하며 움직인다. 그 외에도 선발대가 한발 앞서 길을 열고, 후미의 병력이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한다.
애덤 모라크는 후미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본래 타이던의 병력을 통솔하던 그였지만, 이렇게 전체 병력이 쪼그라든 상황에서는 타이던이고 솔롬이고가 의미가 없다. 애덤 모라크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후미에서 삼백 명을 이끌라는 명에도 군말없이 순응했다.
“장군.”
“음?”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는 그 질문을 한 무관을 바라보았다.
“자이르.”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를 따른 수하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가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자.
그였기에, 애덤 모라크는 답을 망설였다. 얼마 전이었다면, 이 계곡에 들어오기 전이었다면 아마 틀에 말로 답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일을 잘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기에는, 지금 그의 마음이` 가시밭에 맨발로 선 것처럼 영 불편했다.
“글쎄. 여기서 내가 어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소관은, 조용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폭풍이 불어오기 전날 밤의 고요처럼 말입니다.”
“…….”
그 말대로다. 아직까지 별일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 속 깊이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자이르의 말처럼, 얼마나 큰 폭풍이 불어오려고 하기에 이리도 조용하단 말인가.
“처음에 타이던에서 나올 때만 해도 팔천 대군이었지요. 그랬던 것이 이제는 이천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천이 넘는 병사들이 제대로 묻힐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스러져간 겁니다.”
“위험한 임무라는 것은 알고 있었잖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뀐 상황에 대해서, 응당 계획도 바뀌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저…애석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 말이 나왔다면 아무리 측근이라 할지라도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아.”
애덤 모라크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봐야 속만 탈 뿐이지, 별수 있겠나. 지금은 그저 앞으로의 일만을 생각하세. 병사들을 잘 단도리하고…….”
“아니요.”
“…뭐?”
고개를 돌리려 했다.
푸욱!
하지만 그러기 전에 옆구리를 파고든 섬뜩한 감각에, 애덤 모라크는 숨을 멈췄다.
“허억!”
굳고, 떨리는 몸을 틀었다. 당장 말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병사들을 부르면서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자신을 찌른 이 검이, 진정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아꼈던 수하의 것이 맞는지를.
“그런 어정쩡한 말로 피하실 일이 아니지요. 그건 너무 비겁하지 않습니까.”
“어, 어째서…….”
이것은 꿈일까.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는 끔찍한 악몽일까?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을 테니.
“장군께서는 속죄를 하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군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이 얼마나 죽어 나갔습니까.”
언제나 총기로 반짝이던 눈이 불길하게 번들거린다. 자이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쥐고 있는 검에 대해 죄채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애덤 모라크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를 쥔 손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장군. 장군께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것도 여러 번이나.”
“크…으으…….”
고통 때문인지 배신감 때문인지, 잠시 흐릿해졌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이르의 배신은 배신이지만, 어째서 주변의 병사들은 이리도 조용하단 말인가? 설마 그들이 모두 자이르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는 뜻일까.
“장군.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애덤 모라크는 이제 자이르를 보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병사들이 어느새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게 식은 눈으로.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 봉인지에 오는 것이, 아니 렌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내 잘못이란 말이냐.’
궤변이라는 것을 안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죽어야 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속으로 외쳤다.
‘명을 따르는 것이 군인이다. 조정에서 명을 내렸는데 거기서 어찌 고개를 젓는단 말이냐.’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그의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변명일 뿐이지. 출세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던 것이고.’
또 다른 목소리가 조소한다.
‘네가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듯, 그들도 이제 너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배신이니 뭐니 하는 것도 낯간지러운 것 아닌가?’
그 순간. 애덤 모라크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이 진짜 자신인지, 거울 밖의 자신이 진짜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심지어 어느 것이 거울의 밖이고 안인지조차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십시오. 장군께서 선택하셨고, 이건 그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환영이 사라진다. 기울어가는 세상 속에서, 자이르의 들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소리…….”
아마도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무인으로서의, 군인으로서의, 귀족으로서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