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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25화 (625/1,064)

625화

이제 남은 병사는 이천이 조금 넘었다. 처음 렌에 들어올 당시에 비하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정도까지 왔음에도 아직 병사들이 흩어지지 않고 규율이 잡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

그러나 조금만 사정을 살펴보면 그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타이던과 솔롬의 병사들이 정예 중의 정예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력을 가진 걸까? 그래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군기를 유지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달아나지 않고, 구시렁대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다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둠은 여전히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달아나려 해도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지를 알아야 달아날 것 아닌가. 지금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절박했으며 삶에 대한 욕구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명령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아…하아…….”

한참 동안을 걸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두컴컴하기만 한 이곳에서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으니까. 다만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몸이 쇳덩이라도 주렁주렁 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그렇지 않을까 짐작하는 것일 뿐.

“정지!”

또다. 처음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는 드디어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희망에 부풀었었지만, 그것도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점차 심드렁해졌다.

“빛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떨어뜨렸던 고개를 길게 빼고 보니 정말로 희미하게 밝은 무언가가 보이는 듯도 했다. 혹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보이는 것은 그대로였다.

“이, 이이…이야아아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목청껏 토하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 * *

긴 통로를 지나 어둠을 빠져 나왔을 때는, 군터도 가슴 깊이 퍼지는 상쾌함을 만끽했다. 고장이 났던 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내리쬐는 빛이 굳어있던 몸을 기분 좋게 풀어주었다.

“깎아지른 것 같은 암반 계곡. 틀림없습니다. 저곳이 봉인지입니다.”

말랑말랑한 감상이 조금 가실 무렵, 테론 아바예크가 다가와 말했다. 군터는 그의 말을 듣고 전방에 펼쳐진, 그의 말처럼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 같은 암반 계곡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낫지만, 여전히 그의 기감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봉인지라고 하는 깊은 계곡을 보아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은밀하게 잘 숨겨져 있구나, 하는 정도?

“내려가야겠군.”

“기록에 따르면 신주의 봉인은 계곡 가장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다섯 개의 봉인석이 축이 되어 신주의 봉인을 지탱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계곡에 내려가 다섯 개의 봉인석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이다. 봉인이 손상이 갔다면 봉인석이 멀쩡하지 않을 테니, 봉인석에 이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신주의 봉인에 이상이 있다는 뜻.

“봉인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찌 하나.”

“가능하다면, 봉인을 복구할 것입니다.”

“할 수 있겠나?”

테론 아바예크의 실력도, 그가 이끄는 술사단의 실력도 충분히 확인했다. 그들은 확실히 뛰어난 술사들이다. 술법 실력만 놓고 보면 군터가 이제껏 본 술사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하지만 저 신주의 봉인은 군주가 직접 손을 쓴 것이라고 했다. 아간투스베록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모르지만, 일전에 보았던 쿠엘단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이들이 무언가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전하께서 황실의 비방을 내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봉인을 새로 짜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생긴 것을 손보는 것 정도라면…가능성은 더더욱 충분합니다.”

테론 아바예크가 자신감을 내비쳤다. 황자의 비방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봉인을 손보는 것이 생각처럼 어려운 일이 난지는 몰라도, 자신감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위축되어있는 것보다는 말이다.

“적당한 곳에서 조금 쉬었다가,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군터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한편, 계곡 쪽으로 정찰대를 보내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정찰대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고작 하루 만에 돌아왔으며, 계곡 안에서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조용했습니다. 괴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말씀하신 봉인석의 일부도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뜻밖이군.”

군터는 정찰대를 보내면서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이라고 했다.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주저 없이 몸을 빼라고까지 일렀다. 저 계곡 안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오는 길만 해도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기현상을 여럿 겪었고, 역시 뭔지도 모를 적들과 여러 차례 사투를 벌였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이 봉인으로 다가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을 테니, 봉인 안에는 그보다 더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정찰대의 보고는, 그런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정찰대의 확신에 찬 눈을 보면서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전혀 보지 못한 것이겠지.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함께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있던 테론 아바예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찌 생각하나?”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시 보낸들 똑같겠지.”

“술사를 끼워서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기감이 발달한 술사라면 병사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군터는 테론 아바예크의 제안이 괜찮다고 여겨 그의 말대로 술사 셋을 정찰대와 함께 다시 보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술사 셋이 낀 정찰대가 계곡으로 들어간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군터도, 테론 아바예크도 그들이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데 동의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냈군요. 저 아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두 가지다.”

“예?”

“지형.”

“아…….”

처음 돌아온 정찰대는 계곡 내부의 지형을 제법 상세히 보고했다. 물론 계곡 내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100년도 더 지난 기록과 현재의 모습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찰대의 보고는 그럭저럭 쓸만한 것이었다.

“병사들은 충분히 쉬었겠지.”

군터의 시선이 애덤 모라크에게 돌아갔다.

“그것이…….”

“꼬박 나흘을 쉬었다.”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면 나흘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더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흘이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휴식을 준 셈.

애덤 모라크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임무에 돌입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되지 못했다.

“장군.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아직까지 탈영병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입니다.”

탈영하고 싶지 않아서 탈영병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탈영해도 도망갈 곳이 없기에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무턱대고 도망치다가 그 ‘어둠’에 홀로 갇혀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들은 숨죽이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가라앉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애덤 모라크는 곧바로 계곡에 내려갈 기세인 군터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고생을 해가며 여기까지 왔다. 목적지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다른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말린다고 한들 들을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저들에게 계곡으로 내려가라고 하면, 칼을 거꾸로 겨누기라도 할 것 같은가?”

“…….”

글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병사들은 이미 오래전에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그들의 대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물인지 알고 있다.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사령술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흉흉한 소문이 군중을 돌고 있었다.

‘따르기는 하겠지.’

그래. 명령을 내린다면 따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전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병사들을 억지로 내몬다고 한들,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대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었던 건가.”

“…송구합니다.”

“그간의 일들이 녹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군.”

억울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변명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또, 완전히 틀린 말인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타이던의 병사들은 그의 지휘를 받았고, 애덤 모라크는 그들을 다스릴 의무가 있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출발한다. 모두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옛.”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군터는 전날 말했던 것처럼 병사들을 이끌고 계곡으로 향했다. 뒤따르는 병사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어두웠고, 발걸음도 무거웠다. 하나같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반면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이들도 있었는데, 군터 직속의 친위대와 솔롬에서 온 병사 일부였다. 긴장한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지는 않았다. 드물지만, 임무의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것에 의욕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조용하군요.”

할렌이 입을 열었다. 그에 군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계곡 내부는 조용했다. 말발굽 소리,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곧 첫 번째 봉인석이 나타날 겁니다.”

갈수록 협소해지는 길목을 지나던 중, 테론 아바예크가 조용히 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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