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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24화 (624/1,064)

624화

상처 입지 않는다.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껍데기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 인간과 비슷하게 두 팔과 다리, 머리가 달려 있다고 해서 인형을 인간이라고 부르지는 않듯.

푸욱!

거인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생물조차 아니었다. 그저 증오를 품은 막대한 기운이 빚어낸 무언가일 뿐.

[무지하여 무모한 것들이구나.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모르겠나?]

가슴 한가운데에 창이 박히고서도 주절주절 떠든다. 형상에 불과한 껍데기에 얼마나 손상이 가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러나 멀쩡하게 들리는 소리와는 달리, 거인의 몸은 삐걱거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가슴을 관통한 창은 그 삐걱거림에 정점을 찍었고.

[잡스러운 것들이 신의 힘에 대항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구나.]

이제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 외관도 외관이지만, 내부의 기는 그야말로 엉망이 된 상태. 애초에 뼈와 근육으로 움직이던 거인이 아닌 만큼, 내부의 기가 흔들리다 못해 깨져버리자 더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멈춰버린 거인. 군터는 그를 올려다보며 창을 뽑았다. 검은 연기가 창에 묻어나오다 허공에 흩어졌다.

[복수…복수한다.]

머리를 통째로 가리는, 오직 눈만 드러난 투구. 흰자위 없이 검은색 일색인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군터는 문득, 투구의 바이저를 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렬한 증오만을 토하는 거인의 얼굴이 어찌 생겼을지 궁금해진 것이다. 비록 거인은 인형에 불과했으나, 이런 인형이 그냥 나왔을 리는 없다.

‘누군가를 본뜬 것이겠지.’

그게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대단한 자일 것이다. 처음 군터는 이 거인을 봤을 때 위압감을 느꼈다. 그것은 거인이 발하는 기운 때문도 아니고, 상황에 대한 압박감 때문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거인의 외관 때문이었다. 인간을 한참 벗어난 크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마치 명화를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듯, 거인의 외관 그 자체가 그에게 무릎 꿇으라 강요했다. 그것은 아마도, 거인의 육신이 쌓아온 하나의 역사였을 것이다. 비록 어설프게 본뜬 가짜일지라도, 인형에 불과할지라도, 흐릿하게나마 베낀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위압감을 냈다. 그렇다면 가짜가 아닌 진짜는 어떨까.

어느 정도일까,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이제껏 그가 본 적 없는 수준의 강자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초인일 것이며, 어쩌면 신인이라 불리는 군주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추측. 군터는 창을 휘두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서걱!

거인의 목이 잘려나갔다. 핏물 대신 검은 연기가 거칠게 솟구쳤다. 군터는 떨어지는 머리통을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머리뿐 아니라 몸도 조각을 내야 하나 고민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죽음과 무관한 인형이지만,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 어찌 스스로 움직이겠나.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던 차.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직전과 달리 패기도, 오만함도 사라진 채였다.

[복수한다. 반드시 복수한다.]

분노. 원망. 슬픔. 후회.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친다. 대체 무슨, 어느 정도의 일이 있어야 저 정도의 감정이 생길 수 있을까.

그 부분도 거인의 정체만큼이나 궁금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생각할 주제는 아니었다. 당장 병사들이 끔찍한 것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는.

“장군!”

“말을 내와라!”

그를 부르는 병사에게 소리친 군터는, 곧 한 병사가 내준 말을 타고 격전의 한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 * *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들과 무기를 맞대는 병사들이 가장 잘 알았다.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 달려들 때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있기는 한 것인가 싶은 입에서는 고함도, 신음도, 심지어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아, 한 가지 더. 피도 흘리지 않는다.

“이……!”

고통도, 두려움도 모르는 적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움직임이 조금 딱딱하고, 동료와의 협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었으나 그런 이점을 살리기도 쉽지 않았다.

“또! 거기 조심해!”

적이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검은 안개가 조금 뭉친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곳에서 적병 십수 명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렇게 끊임없이 생겨나는 적들과 계속 싸우고 있자니,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방진! 방진을 짜라! 돌격대는 뭘 하고 있나! 적이 뭉치기 전에 쓰러뜨려!”

애덤 모라크가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전하기 위해 반쯤 피를 토해가며 소리쳤다.

“장군! 위험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디선가 들린 다급한 목소리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지척에서 뭉치고 있는 검은 안개를.

“장군을 호위하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왔다. 그들이 방패를 이어붙이며 자리를 잡는 것과 비슷하게 검은 안개가 걷혔고, 그 안에서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많군.”

담담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떨림은 속으로 숨겼고, 반쯤은 체념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는 악으로 버텼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귀족이라는 신분. 장군이라는 지위. 바깥에서는 그것이 그를 설명하는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몸에 걸친 옷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는 그것을 이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했다.

마음은 꺾이고 의지는 무뎌진다. 끊임없는 시험은 그를 피폐해지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슨 대단한 각오 같은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와서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는 오기였다.

“싸워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까지 어떻게 버텨왔더냐! 그 모든 고난을 넘으며 연명한 목숨이, 고작 저따위 잡귀들에게 사그라지는 것은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뱉은 말이 아니다. 악에 받쳐서 내지른, 감정이 잔뜩 실린 욕지거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습게도, 병사들은 그 초라한 한 마디에 전에 없이 크게 호응했다. 애덤 모라크의 말이, 그 속에 담긴 그의 진심이 그들이 품은 마음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와아아-!

방패를 든 병사들이 달려온 적들을 몸으로 밀었다. 뒤에 숨어있던 도부수들이 사이를 비집고 나가 적들을 휩쓸었다.

“아아악!”

누군가는 상처 입었고, 누군가는 쓰러졌다. 누군가는 죽기도 했다. 피는 쉼 없이 흘렀고, 고통과 두려움에 찬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는 바로 이곳이지 않을까. 쓰러진 채 피를 게워내던 병사는 생각했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남은 것은 아쉬움뿐.

지금 이 순간.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맑은 하늘. 타이던에 있는 친구. 지금도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예배당을 찾고 있을 가족들.

‘나는 왜 이렇게…….’

대체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애써왔을까. 군에 입대했던 과거가 후회스러워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그랬지만, 그렇게 해서 이루고 가졌던 것들은 이 순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쉽게 떠오르기만 했다.

‘내 유해라도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뼛가루라도 남아 가족들이 그를 그릴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그가 떠올린 작은 희망이었다.

* * *

퍽!

칼을 지팡이처럼 땅에 꽂았다. 바로 옆에 그의 직속 상관인 백부장이 있었지만 병사는 개의치 않았다. 장교도 그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아예 신경 자체를 쓰지 않았다.

“끝났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어떤 용감한, 혹은 어리석은 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용한 가운데 그의 목소리는 여러 사람의 귀에 들어갔고, 그 한 마디는 그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의 긴장을 끊어놓았다.

털썩!

누군가는 쓰러졌고.

“으아아아아!”

누군가는 의미 모를 함성을 질렀다.

“살았어. 살았다고…….”

누군가는 안도했으며.

“병사들을 수습하라. 당장.”

누군가는 그 와중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이후의 일을 준비했다.

군터는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 부류에 가까웠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헐떡이는 말에서 내려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는 어둠을 살펴보고 있었다.

“장군.”

테론 아바예크가 다가왔다. 전투 내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서 호위라도 받고 있었는지 비교적 말끔한 신색이었다.

“그 거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글쎄. 내가 묻고 싶군. 무엇이었을 것 같나?”

“부끄럽습니다만, 그 거인을 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지요.”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인형에 불과했으니까.”

“인형이요?”

그럴 리가? 테론 아바예크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군터는 그가 생각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누군가를 본뜬 인형이었다. 스스로 사고할 수 없었고, 그래서 지닌 힘에 비해 상대하기가 쉬웠지.”

“직접 상대하신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믿지 않을 수 없군요.”

“껍데기가 아닌 진짜는 계속 복수니 뭐니 중얼거리더군. 아마 과거 이 땅에 있었던 일과 관련된 것이겠지. 아는 바가 있나?”

“과거라면…….”

테론 아바예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입을 뗀 그는 천천히 그가 아는 바를 이야기했다.

“렌이 제국에 복속된 것은 백 하고도 이십여 년 전쯤입니다. 당시 이 땅에는 제법 강력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나라를 세웠지만 왕을 두지 않았고, 그들의 신에게 선택받은 제사장이 신을 대리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국과 비슷한 신정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제국과 같이 지도자의 권력이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정도.

“당시 제국은 또 한 번의 정복 전쟁을 시작한 차였고, 렌 역시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제국은 렌을 침공했다.

“아간투스베록 전하께서 직접 렌을 정복하셨지요. 격렬한 전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 당시 흐른 피가 강 여러 개를 붉게 물들였다는 전설이 남았을 정도이니, 그 치열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더 듣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느덧 병사들의 수습이 어느 정도 끝나고, 다시 움직여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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