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어두운 통로를 지나는 듯했다. 그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빛의 길을 따라 이동하는 내내, 검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했다.
어서 빨리 이 지독한 캄캄함을 벗어날 수 있기를.
그렇게 내심 기도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그들은 멈췄다. 저 앞에서 정지 신호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둠은 걷히지 않은 상태.
“장군.”
바로 옆에서 군터를 따르던 할렌조차도 의아해하며 그를 보았다. 그러나 군터는 답하지 않고 가만히 전방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정말 흐릿해진 빛의 끄트머리를.
“전투 준비.”
“예? 아, 전투 준비!”
당황스러운 명령이었으나 할렌은 즉각 따랐다. 휘하 장교들 역시 마찬가지. 대체 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잘 훈련된 군대는 이런 상황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
솔롬의 병사들이 먼저 기민하게 움직이니 타이던의 병사들도 한 박자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는 사이, 군터는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았다. 저 앞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한, 거대한 존재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적을 향해.
* * *
인도자가 남긴 빛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기에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설령 희미한 빛이 없었다고 해도 군터는 물론이고, 기감이 없다시피 한 일반 군졸들도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이 발하는 존재감은, 기운은 그만큼 거대했으므로.
“저건…….”
테론 아바예크의 안색은 창백했다. 몸을 떨기도 했다.
군터는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당연한 일이다. 기감이 발달한 자일수록 ‘저것’의 존재감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 증거로, 테론 아바예크 만큼은 아니었지만 술사들의 반응도 대부분 비슷했다. 잔뜩 위축됐고, 두려움에 젖었다.
“저게 무엇인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저런 것은 한 번도…이게 대체…….”
본 적은 없다고 하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과거의 기억을 더듬을 정신이 없는 것일 뿐.
[침략자들. 탐욕스러운 약탈자들.]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에 있는 수천 명 중, 오직 군터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속삭이는 것 같은 독백. 헤아릴 수 없는 분노와 악의가 뒤엉킨 증오 그 자체.
평범한 사람이 이 소리를 들었더라면 미쳐버렸으리라. 병사들은 물론이고,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들조차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통하다. 원통해. 가만두지 않겠다. 저주받을 침략자들.]
짙은 어둠 덩어리가 크게 퍼지며 형체를 이뤘다.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지. 반드시 원한을 갚겠다.]
두 다리로 서 있음에도 말을 탄 군터와 비슷한 크기. 저 정도면 거인 수준이다. 검은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그 모습은 신화 속에나 나오는 위대한 전사와 같았다. 단순히 외관만 보고서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잃어버린 자들아. 일어나라. 지금, 나는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다.]
거한의 주변에서 자그마한 덩어리들이 꿈틀거렸다. 거한이 나타날 때와 같았으나 그 크기는 매우 작았는데, 대신 그 수가 무척 많았다. 수십…수백…점점 늘어나는 어두운 형체들을 보며 군터를 눈살을 찌푸렸다.
“돌격.”
“예, 옛!”
저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거한을 비롯한 저들이 적이라는 것만은 확실. 그렇다면 저들이 준비를 끝내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하지 않겠나.
망설임은 없었다. 생각한 즉시 움직였다. 노리는 것은 당연히 선두에 우뚝 서 있는 거인. 두꺼운 전신 갑옷을 걸친 그는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어깨를 짓누르는, 뭔지 모를 위압감.
[침략자.]
거인의 눈이 움직였다. 그제야 군터는 거인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바이저 사이로 시커먼 두 눈동자가 번뜩였다.
[복수하겠다.]
거인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허공에 팔을 뻗은 순간, 자그마한 균열이 이는 듯하더니 크고 길쭉한 형태의 검이 나타났다.
‘톱날 검?’
벤다기보다는 깎아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전장에서 흔히 보기 힘든 기병(奇兵). 거기에 그 크기가 일반적인 크기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다루는 주인부터가 인간 같지 않은 거인이라서일까.
‘스치기만 해도 위험하겠군.’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거인 소리를 듣는 군터지만, 그런 그조차 저 앞의 거인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힘에서 밀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일단은 한 번 가늠해보는 것이 좋을 터.
‘지나친다.’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한 만큼,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처음 일합은 가볍게 부딪칠 생각이었다.
[복수. 복수다.]
허공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무언가가 뻗어왔다. 군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고, 볼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임을 알았다.
히히힝!
그는 반사적으로 피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말은 아니었다. 온몸이 찔리고 베인 말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마 할렌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아…아…….]
하지만 지금 군터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거인이 그를 향해 흉측한 칼을 내리치고 있었기에.
콰앙!
창을 기울여 막았다. 무릎일 땅을 파고들고,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가 앞으로 접혔다. 덩치에 걸맞은 괴력. 이제껏 인간이 아닌 것들도 숱하게 상대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이 거인의 힘은 단연 최고였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듯했고, 충격을 해소하느라 곧바로 반격할 수도 없었다.
으득!그래도 군터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울인 창을 힘껏 밀어내며 거인의 칼을 튕겨낸 후, 연달아 창을 휘둘러 거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쾅!
하지만 힘껏 휘두른 그의 창은 목표에 닿지 못했다. 거인의 옆구리에서 손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막혀버렸다.
[어리석다…어리석어!]
군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지 모를 것에 공격이 막혀서가 아니라, 거인의 기운이 한순간에 변했기 때문이다. 증오가 가득하여 음침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폭발적인 기세가 솟구쳤다.
패기. 모든 것을 눈 아래로 깔아보고 부숴버리는, 난폭한 자의 기질.
‘이건 뭐지?’
갑자기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군터는 상대의 기이한 힘보다도 그것이 의아했다.
콰앙!
거센 힘에 튕겨 나갔다. 톱날 검이 창대를 긁었으나 요마의 뼈로 만든 창은 부러지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그 거력을 완전히 이겨내지는 못해, 창대 중간에 가느다란 흠집이 생겨버렸다. 군터가 이 창을 쥔 뒤로 처음 생긴 상처였다.
[굴종하라. 하찮은 것아.]
거인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밀려왔다. 짧은 순간, 군터는 그것이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늘고 빠르며, 날카로운 바람.
서걱!
오직 기감에만 의존하여 몸을 비틀었다. 갑옷 곳곳이 잘려나갔지만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것이 거슬렸을까? 거인이 분노하며 발을 굴렀다. 다시 한번 무형의 기운이 일었지만, 이번에는 군터가 더 빨리 움직였다.
“이놈은 피해라! 뒤쪽을 쳐!”
뒤따라 달려오던 할렌과 병사들, 특히 기병을 향한 외침이었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말을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 군터 자신조차도 몸을 빼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할렌과 병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할 것이다. 그러느니 거인은 무시하고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적’들을 상대하게 하는 편이 낫다.
[감히! 무릎 꿇어라!]
톱날 검이 움직인다. 상당한 속도지만 이번에는 군터의 창이 더 빨랐다.
쾅!
노린 턱 아래를 노린 찌르기. 하지만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혀버렸다. 군터가 더욱 힘을 주어 창을 밀었으나 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지한 야만인 놈들.]
다시 한번 톱날 검을 막으면서 튕겨 나갔다. 착지함과 동시에 자세를 고치면서, 군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투 중에 다른 상념은 금물이지만, 거인의 상태가 묘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놈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작스레 상태가 변한 것도 이상하지만, 변한 뒤로 계속 시끄럽게 주절대는 말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시종일관 거만하게 분노하지만, 그것이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군터는 그것이 일단 자신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침략자라고?’
맞는 표현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원한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석연찮다.
쾅!
톱날 검의 위력은 경시할 수 없다. 간간이 사용하는 정체 모를 술법 역시 위협적이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강적임은 분명하지만, 군터는 이 거인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아직 그의 창은 거인의 피부는커녕, 갑옷 끄트머리 하나 잘라내지 못했지만…….
벌레 같은 놈들!]
거인의 존재감 역시 여전히 무시무시했지만.
‘그렇군.’
군터는 날아드는 톱날 검을 피해 몸을 뒤로 빼면서 생각했다.
머릿속 한구석을 간질이던 의문이 풀렸다. 어째서 거인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지도.
‘이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잘 짜인 인형극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차이점이라면 인형극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형이 움직이는 무대에 함께 올라가 있다는 점. 허나 그렇다고 해도 인형이 인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설정된 대로,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다. 설령 인형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다 한들,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쪽이라면 두려울 이유가 있을까?‘네놈은 뭐냐.’
정교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잘 만들어진 인형. 하지만 상대가 인형이라는 것을 안 이상, 더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
쾅!
군터는 저돌적일 만큼 공격적으로 나갔다. 한 방 한 방에 공을 들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적당히 힘을 빼고 거인을 몰아쳤다. 거인은 쏟아지는 공격의 강약을 구분하지 못했다. 매 공격에 특유의 그 ‘능력’을 발휘하거나, 톱날 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이놈은 무공을 모른다.’
형, 즉 모양새는 따라 할 수 있을지언정 그 형 안에 담긴 의미는 모른다. 허와 실을 구분할 수 있는 판단력 또한 없다. 놈은 그저 보이는 모든 것에 대응할 뿐이다. 무섭도록 빠르고 강하게.
어지간한 적을 상대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군터는 그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콰직!본격적으로 공세에 들어선 지 이십여 합 만에, 처음으로 군터의 창이 거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창날이 파고든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창끝을 통해 파고든 사기가 거인의 전신을 이루는 기운을 뒤흔들었다.
[하찮은 것들!]
거인의 기세는 줄지 않았다. 패기도, 오만함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의 거대한 몸뚱이는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콰앙!
또 한 번. 강력한 일격에 튕겨 나가면서도, 군터는 여유로웠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