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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22화 (622/1,064)

622화

테론 아바예크의 말대로, 신수의 기름을 묻힌 칼은 유령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창칼로 공격해도 끄떡없던 유령들이 기름을 묻힌 칼로 공격하자 움찔거리더니 곧 흐릿해지며 사라졌고, 허공에 떠 있던 흙먼지들은 다시 땅으로 가라앉았다.

백여 명의 병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칼을 휘둘러대니 유령들로 인한 소란도 점차 가라앉았다.

“한심한 놈들!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잔뜩 성이 난 장교들의 호통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실 그들도 병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창칼도 박히지 않는 유령들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났더라면 그들 역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가정일 뿐. 어쨌거나 그들은 달아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비겁하고 겁많은 병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분노와 경멸이 떠올랐다.

병졸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기에 목만 날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마 원래부터 횃불 근처에 있었던 자들만이 비교적 떳떳한 얼굴로 이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크흠! 지금은 이쯤 한다만, 아무튼 내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잔뜩 화가 났음을 과시하듯 떠들어대는 장교. 멀찍이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아드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그가 생각하기에, 저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쩐단 말인가. 자신이었다면 차라리 이제부터라도 공을 세워 이 추태를 씻어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말조차 병사들의 의욕을 끌어내는 데는 부족할지도 모르나, 적어도 저렇게 쓸데없이 자기 분풀이를 해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제는 아무 생각도 안 드는군.”

애덤 모라크가 진 빠진 얼굴을 한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전의 난리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었다. 다행히 그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어서, 혼란을 일부 가라앉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무리 봐도 일선의 장재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어느 정도 능력과 책임감이 있는 자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애덤 모라크는 통솔력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병사들을 휘어잡는 강력한 위엄. 그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조금 전 상황도 그렇다. 그럴 때는 호소하듯이 절절하게 외칠 것이 아니라 칼부터 뽑고, 아니 휘두르고 봐야 했다. 도망치는 놈을 두엇, 아니 열 명 정도 잔혹하게 본보기를 보이면 달아나려던 병사들도 다리가 굳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그런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여기서는 아쉬워하기보다는 칭찬을 해주어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달아나지는 않았잖은가. 휘하 병사들이야 어찌 되든 나 몰라라 하거나, 심지어 자기 보신을 위해 미끼로 던져버리고 혼자 달아나는 버러지 같은 지휘관들에 비하면 애덤 모라크는 매우 훌륭한 지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군. 잠깐 시간이 있을 듯한데 조금 쉬지 그러십니까.”

“그래. 그래야겠네. 이러다가 정말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아.”

이 불길한 장소를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야겠지만, 일단은 수습을 위해서라도 조금 숨을 돌려야 할 터. 애덤 모라크는 그동안 지휘는 수하들에게 맡기고 체력을 회복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아아악!”

쉬려고 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비명. 애덤 모라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슨 일이냐!”

이제 막 쓰러지듯 주저앉았던 그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 * *

“가지가지 하는군.”

조금 전에 유령들이 설칠 때, 군터는 자리를 지켰다. 당장은 유령들이 설치고 있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 다른 위협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움직이며 창을 휘두르기보다는 총대장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군을 위해 더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아도 됐다. 그가 움직일 필요도 없이, 적이 알아서 그의 앞까지 왔기 때문이다.

그어어어어-

메마르다 못해 얼굴까지 쩍쩍 갈라진 시체들이 섬뜩한 악의를 풍기며 다가온다. 비쩍 말라 힘없어 보이는 몸에 비해서 움직임은 제법 빨랐다. 평범한 일개 병사가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은 결코 아니었다.

‘망령이 깃든 건가?’

유령들에게 죽은 자들이다. 어쩌면 흙먼지를 일으키던 것들이 시신에 깃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어딘가 부자연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움직임도 설명이 된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유령들이 설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니 죽은 자들도 얼마 되지 않을 터.

“장군. 평범한 망자가 아닙니다. 조심하심이…….”

“쓸데없는 걱정이다.”

군터는 테론 아바예크의 걱정 섞인 조언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섰다. 한동안 시끄럽게 우는 소리만 손 놓은 채로 듣고 있다가 드디어 눈에 보이는 적을 만났다. 근질거리다 못해 뻐근하기까지 하던 몸이 쾌재를 부르는 듯했다.

푸욱!

앞서 달려들던 시체의 머리에 창날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반항은커녕,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찌르기.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것으로 끝이었겠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시체. 심장이 뛰지 않는데도 움직이는 것들이니 머리가 날아간다고 해서 멈추라는 법은 없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군터는 머리를 깊숙이 찌르고도 곧장 창을 회수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촤악!

긴 창날을 십분 활용한 연격. 검처럼 휘두른 창이 시체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가슴께서부터 비스듬히 잘린 몸뚱이가 미끄러지듯 땅으로 떨어졌다.

꿈틀!

몸뚱이만, 그것도 절반 정도만 남아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시체의 팔은 꿈틀거리면서 앞으로 움직였다. 발목이라도 잡겠다는 듯이.

“qau…ta…….”

“음?”

지저분한 발악은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체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군터의 흥미를 끌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난 소리가 아니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진, 분명한 언어였다. 그것도 그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콰직!

그러나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고 해서 시체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댈 생각은 없었다. 군터가 고삐를 당기니 전마의 발굽이 시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말할 입이 사라진 시체는 더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고, 꿈틀거리는 움직임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아아아-!]

망가진 시체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빠져 나왔다. 그것은 한 차례 크게 일렁이는가 싶더니,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빠르게 희미해졌다. 군터는 사라져가는 그것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장군!”

테론 아바예크가 다가왔다. 직접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표정이 굳고 안색까지 창백해져 있었다.

“무엇이었습니까?”

“끌려가더군.”

똑똑히 보았다. 그렇기에 방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군터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땅이 영혼을 집어삼켰다.”

“집어삼킨 것입니까, 옭아맨 것입니까?”

“그 두 개가 다른가?”

테론 아바예크가 단호하게 답했다.

“다릅니다. 전자는 이 땅 자체가 하나의 괴물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후자라면…모종의 저주가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뭐가 됐든, 이곳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장군. 혹…….”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때가 아니다. 힘을 아낄 때는 더더욱 아니지. 힘이 있을 때. 시도를 해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테론 아바예크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군을 이끄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 사내.

‘그는 영혼이 끌려가는 장면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다. 무언가를 느낀 거겠지.’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러기 위해, 테론 아바예크는 술사단과 함께 준비를 시작했다.

* * *

쿠구궁!

흔들린다. 땅도, 땅을 뒤엎은 거대한 어둠도.

“빛의 짐승이 길을 밝힐 겁니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길이 남을 것이나, 얼마나 오래 갈지는 장담할 수 없으므로 조금의 지체도 없이 뒤를 따라야 합니다!”

테론 아바예크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빛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소서!”

테론 아바예크의 손끝에서 빛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손에서 나올 때는 주먹만 한 크기였던 빛 덩어리는 삽시간에 덩치를 불렸고, 땅에 닿을 즈음에는 어지간한 말보다도 더 큰 크기가 되어 있었다.

말? 늑대? 사자? 그 어느 것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환한 빛으로 이루어진 몸이기에 자세히 살펴볼 수도 없었다. 하기야, 외관이 뭐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저 빛의 짐승이 제대로 길 안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터.

“따라간다! 속도를 내라!”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빛의 짐승이 달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군대도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오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짐승이 지나간 곳에는 길이 남아 있었다. 땅에, 허공에 남은 빛무리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나타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유령에, 동료였던 이들의 시체에, 온갖 끔찍한 것들에 시달리느라 사기가 꺾일 대로 꺾였던 군대다. 하지만 이 진절머리나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니 축축 늘어지던 발걸음에도 조금씩 힘이 돌아왔다.

“윽!”

빛의 짐승이 남긴 길을 따라가던 중. 테론 아바예크가 갑작스레 비명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호위병이 다급하게 붙들지 않았더라면 낙마해버렸을지도 모를 상황.

“무슨 일인가.”

군터가 얼굴이 창백해진 그를 보며 물었다. 테론 아바예크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신음만 흘려댔다.

“인도자가…소멸했습니다. 그 기운마저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무언가…그를 속박하고 있는 겁니다.”

“…….”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남아 있지만,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길이 보였다. 계속 빠르게 이동한다면 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분명, 그 ‘인도자’를 소멸시킨 무언가와 맞닥뜨리게 될 터.

“계속 간다.”

직감적으로, 그 ‘무언가’가 이 어둠의 원흉일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피할 이유는 없다.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

길은 정해져 있으니, 따라서 가면 그뿐이다. 무얼 만나든, 돌파하여 나아가면 그뿐.

희미해지는 길을 따라갔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주변을 감싼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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