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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21화 (621/1,064)

621화

어둠이 내려앉았다. 기분 나쁜 정적 속에 망령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하다.

“젠장.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구만.”

당연히 그 꿈은 악몽이다. 그것도 상당히 끔찍한.

갑자기 대낮에서 한밤이 되어버렸다. 병사들은 동요했지만, 자리를 이탈하거나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다. 그들은 렌에 들어선 이후로 비현실적인 일을 너무 많이 보고 겪었다. 물론 이건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한 기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에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생물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

“횃불병들은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너희들이 든 그 횃불이 동료 백 명의 명줄이라고 생각해!”

먹물처럼 시커먼, 안개를 닮은 것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뒤덮었다.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오직 횃불, ‘로모그라의 숨’뿐이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꽉 쥔 채 횃불을 중심으로 뭉쳐서 캄캄한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악! 이 새끼! 눈깔을 어디다 두고 다녀!”

과하게 횃불 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동료 병사의 발을 밟거나 등에 부딪치는 일이 적잖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긴장 때문에 민감해진 상황에서 자칫 험한 일이 벌어질 뻔도 하였으나, 장교나 주변의 다른 병사들이 제때 제지하면서 한심한 꼴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장군. 장군께서는 앞이 보이십니까?”

“대충은.”

이 수상쩍은 어둠은 시계를 극도로 제한했다. 볼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전방에 뭐가 있는지 흐릿하게 알아볼 정도. 평소 화살도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조차 바로 앞에서 보는 것 같이 보였던 것에 비하면 맹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완전히 빛을 잃은 군대에게 있어서는 한줄기 희망이었다.

‘지독하군.’

군터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창을 고쳐 쥐었다.

답답한 시야도 시야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이 어둠 그 자체였다. 정확히는 어둠이 품은 원념. 그 지독한 원기(怨氣)가 영육을 바늘처럼 따갑게 찔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은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짜증을 내겠지만, 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슨 독인지 모른다고 해서 중독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걷어낼 수는 없는 건가?”

“어렵습니다. 이 어둠의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으니, 현재로서는 버티는 것밖에는…….”

그나마 준비해놓은 것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했을 뿐. 테론 아바예크도 이 괴이한 현상에 대해 딱히 뾰족한 방도를 내놓지는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어둠이 걷힐 때까지 버티거나, 이동하여 어둠을 벗어나거나. 둘 중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어둠 속에 망령들이 숨어있음은 확실하지 않은가. 술법으로 그것들을 공격해보면 어떤가.”

평범한 창칼로는 육신이 없는 망령들을 상대할 수 없지만, 술법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만약 망령들이 이 기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주체라면 그들을 공격해 해치움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일입니다만, 아직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숨어있는 놈들을 공격하려면, 할 수야 있겠습니다만…제대로 효과를 내기는 힘들 것입니다.”

숨어있는 것들을 노리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술법이라는 것이 마구잡이로 쏠 수 있는 화살과는 다르다 보니 한 방 한 방에 신중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군터는 그 점을 이해했다.

콱!

창을 힘주어 쥐고 그대로 휘둘렀다. 창끝에 맺힌 사기가 전방의 어둠을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그러나 기세 좋게 날아간 날카로운 기운은 제대로 뻗어가지도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군터의 눈살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그가 쏘아낸 기운이 사라지던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숨어있던 망령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답답하군.’

이 어둠 속에서 그의 감각은 철저하게 망가졌다. 평범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기에 그가 느끼는 답답함은 더욱 컸다.

당장 말을 달려 질주하고 싶었다. 이 칙칙한 어둠 속을 탈출하여 답답함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날뛰는 가슴과는 달리 머리는 차가웠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일수록, 조급함에 몸이 달아오를수록 더욱 침착해져야 한다.

어둠 속에 도사린 악의는 그 존재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오지는 않고 있다. 어둠을 뿌려 이쪽을 가두었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전부다. 전쟁에 비유하자면 승기를 쥔 것은 저쪽인데, 그럼에도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뭔가 노리는 바가 있다는…….

“땅! 땅속에!”

잠깐 생각에 잠기던 차. 뒤쪽에서 들려온 다급한 비명에 군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 * *

그것들은 땅속에서 일어났다. 아니, 생겨났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먼지가, 흙이 바람에 크게 흩날리는 것 같더니 곧 형체를 이루었다. 사람? 짐승? 무엇과도 닮지 않은, 흡사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유령과도 같은 모습. 그것들은 형체를 이루기가 무섭게 기겁한 병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아!”

창이 푹! 소리를 내며 그것을 찔렀다. 그러나 그것은 창에 찔리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병사에게 들러붙었다.

“아아악!”

움직이는 흙먼지에 둘러싸인 병사가 기겁하며 몸부림쳤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그의 비명은 힘을 잃어갔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아니, 도와줄 수 없었다. 칼을 휘둘러도 허공을 벨 뿐이고, 자칫 접촉했다가 옮겨붙기라도 할까 싶어 뒷걸음질 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뭐야 이것들!”

“칼이 안 통해!”

하지만 뒷걸음질을 친다고 한들 어디까지 물러날 수 있을까. 모습을 드러낸 ‘흙먼지 유령’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유령처럼 소리 없이 접근해와 덮쳤다. 흙먼지에 둘러싸이면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었고, 발버둥을 치던 병사는 오래지 않아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온몸이 가뭄에 시달린 땅처럼 쩍쩍 갈라진 채로.

도저히 손 쓸 도리가 없어 보였지만, 그 와중에 제국군도 나름대로 대응을 하긴 했다.

“횃불! 횃불 쪽으로 붙어!”

유령들이 횃불 쪽으로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누군가 외친 그 한 마디에, 안 그래도 횃불 쪽에 몰려 있던 병사들은 서로를 밀쳐가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횃불에 가까워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거기에는 장교들의 고함도 소용이 없었다. 창칼을 든 적을 상대하는 것이면 모를까, 아예 대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이종에 대한 공포는 상관의 지시마저도 무시하게 했다.

“이, 이런…….”

젊은 장교가 탄식했다. 한동안 사납게 고함을 지르고, 심지어 병사들에게 칼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그의 칼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피는 조금 전에 직접 목을 친 병사의 것이었다.

공포로 이성을 잃어버린 병사들을 다잡기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지금도 병사들은 그를 지나쳐 횃불 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한꺼번에 그러고 있으니 아무리 그가 본보기까지 보여가며 언성을 높인다 해도 통제가 될 리 없었다.

‘여기까진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교라고 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역시 병사들과 똑같다. 다만 지위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녀석이 그가 쉽게 쓰러지지 못하도록 등을 떠받치고 있을 뿐.

우우우-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다.

“…….”

병사들이 달려온 방향. 그곳에서 멀쩡하던 땅에 먼지구름이 일었다. 소리 없이, 어떤 형체가 생겨났다.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지만 흩어지는 듯하면서도 흩어지지 않는, 괴이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유령.

“으으…….”

그것이 다가오자, 그는 결국 일그러진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이제껏 그를 떠받치던 책임감이라는 녀석이 끝내 부서지려는 순간.

“물러나시오!”

어디선가 들려온 힘 있는 목소리에, 그는 등을 돌려 달아나려던 것을 멈췄다.

열 명이나 될까 싶은 자들이 유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검을 들고 있었는데,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검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 * *

테론 아바예크가 다급히 자그마한 병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신수(神樹)의 기름. 이것이라면 저 괴물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겁니다.”

“쫓아내? 없애는 것이 아닌가?”

“저것들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린 지독한 원기가 저것들과 연결되어 있겠지요. 비유하자면 저것들은 잎, 혹은 가지입니다. 뿌리를 들어내지 않는 한, 저것들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테론 아바예크는 백 명 정도의 정예병들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그에 군터는 멀리 갈 것 없이 그의 친위병 중 실력이 뛰어난 이들을 불러모았다.

“신수의 기름을 묻힌 칼이라면 놈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허나 기름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놈들을 베면 벨수록, 놈들의 기운에 노출되면 될수록 기름이 지닌 힘은 고갈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놈들의 기운’이란 원기를 뜻하며, 그 원기는 지금도 이곳을 잔뜩 메우고 있다. 이 말인즉.

“최대한 서둘러야 합니다. 칼날을 적신 기름이 말라버리기 전에.”

테론 아바예크의 당부를 들은 병사들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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