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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20화 (620/1,064)

620화

기이한 땅이었다. 초목이 펼쳐져 있으나 그 색은 빛바랜 갈색이었다. 홀로 가을, 아니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에 잎은 없었으며, 비라도 맞은 것처럼 축 늘어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치 생기를 잃은 듯한…….

‘그래.’

할렌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처투성이인 몸이 아직도 찌뿌둥했다. 계속된 격전 속에서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수십 개가 넘는 자잘한 부상을 입었다. 급히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며칠만이라도 요양을 취해야 할 정도의 몸.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할렌은 지금 말 위에서 버티는 것만 해도 고역인 상태였다. 누가 뒤따르는지, 옆에서 누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고통을 참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생기를 잃은 것 같군.’

하지만 그런 할렌조차도, 눈 앞에 펼쳐진 괴이한 풍경에는 정신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문득 눈앞이 뿌옇다고 생각해 손을 휘휘 저었는데, 손에 무슨 가루 같은 것이 묻었다. 뭔가 하고 보니 꽃가루 같기도 하고 재 같기도 한 것이 부드러우면서도 영 찝찝했다.

“느껴지십니까 장군. 이 땅,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그런 것 같군.”

테론 아바예크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지기가 조금씩 쇠하는 느낌이더니, 이곳에 이르러서는 그 희박한 기운마저도 사라졌다.

땅은 호흡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그 위에 생명을 틔우고 죽음을 거둔다. 하지만 이곳은…모든 것이 멈춰 있다. 아니, 끝나있다. 죽음의 땅이라는 표현에 이곳만큼 적합한 곳은 없으리라.

“심상치 않습니다. 봉인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지독한 악의가 하늘과 땅에 진하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죽어버린 땅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걸을 때마다 자그마한 먼지구름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병사들은 불쾌한 얼굴로 입과 코를 가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틀 동안, 그들은 괴물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매일 크고 작은 괴물 무리와 맞닥뜨렸던 것을 생각하면 기이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들 중 누구 하나 좋은 표정인 이는 없었다. 몸은 편할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이 불길하기 없는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끊임없이 메말라가고 있었다. 마치 병자의 몸이 야위어 가듯이.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이 불길한 적막이 끝날 거라는 것. 그리고 그때는,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

그들은 기다렸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 * *

우우우―

스산한 바람이 분다. 그러나 바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불길한 소리.

군터는 정체를 즉각 눈치챘다. 테론 아바예크를 비롯한 술사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안색이 돌변했다.

“망령? 어떻게…….”

젊은 술사의 중얼거림에 테론 아바예크가 즉시 부정했다.

“달라. 자세히 살펴보게. 평범한 망령이 아니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머무는 것이 아니야. 묶여 있다.”

비슷한 말인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혀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젊은 술사 역시 젊어서 경험이 일천하다고 하지만 원정대에 포함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 그는 곧 테론 아바예크의 말을 이해했고, 저 바람 속에서 흐느끼는 것들에게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속박돼있는 겁니까. 저주를 받은 걸까요?”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뭐가 되었든 저 망령들의 원념은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야.”

일반적으로 육체가 없는 영은 생명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뒷목을 서늘하게 한다거나, 잠결에 악몽을 꾸게 하는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테론 아바예크가 말했듯, 저 망령들은 보통 망령이 아니었다. 품은 원념이 얼마나 지독한지 흐느끼는 소리에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게다가.

‘봉인지가 가깝다. 평범한 짐승들조차 괴물로 만들어버리는데, 이곳에 묶인 망령들이 평범할 리 없지.’

불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쪽도 믿는 구석이 있다.

“장군. 지금은 저것들이 가만히 울고만 있지만, 언제 돌변하여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수가 있나?”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법구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군을 멈춰주십시오.”

“얼마나 걸리겠나.”

“반나절이면 될 것 같습니다. 하옵고.”

“음?”

“장군께서는 사령술에 조예가 깊으시지 않습니까. 혹, 망령들에 대처할 수 있는 방도를 가지고 계신지요.”

“글쎄. 모르겠군. 해봐야 알겠지.”

말은 그리 하지만, 테론 아바예크는 그의 힘이 망령들에게 유효하리라고 생각했다. 사령술이 본래 죽음을 다루는 술법이지만, 그렇다 쳐도 이 사내의 사령술은 뭔가 특별했다. 테론 아바예크는 사령술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험 많은 술사로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거칠고 투박하지.’

조예가 깊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빈말이었다. 이 무뚝뚝한 장군은 사령술을 사용할 줄은 알아도 그리 깊게 연구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가 부리는 술법이나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무척이나 단순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정말 사령술에 조예가 깊은 술사였다면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술법을 부렸을 터.

어쩌면 그것은 술사이지만 그 전에 무장인 그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군터 크렘보르의 사령술은 사령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테론 아바예크가 보기에도 그리 대단한 경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부리는 사령술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무술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이, 타고난 괴력 때문에 위력적인 경우라고 할까.

‘신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 뜬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군터 크렘보르의 눈부신 무공이 테리브란을 들썩이게 할 당시에 그런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문을 들은 모든 이들이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쳤었다. 대단한 인물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인이라니.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함부로 혀를 놀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인이라니. 잘 모르는 자들은 명성과 능력을 널리 떨친 영웅들을 일컬어 그리 칭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국에서 그런 호칭은 오직 군주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누군가 강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인간에게 허락된 것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야말로 제국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그들. 진정 신과 같은 위용을 뽐내며 제국을 수호하는 그들이야말로 신인. 그들 외에 다른, 적당히 뛰어난 자들을 신인이라 띄워주는 것은 진정한 신인들에 대한 모독이다. 군주들을 경외하는 마음이 큰 이들은 신성모독이라며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실제로 테리브란에 그런 소문이 돌았을 때도 그런 소리를 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군주들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몰라도, 이 자 역시 범상한 인간이라 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이번 원정에서 몇 번이나 감탄했다. 때로는 경악하기도 했다. 이제 그는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이 원정을 이끄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곧 군대가 멈춰 서자, 테론 아바예크는 즉시 휘하 술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로모그라의 숨’을 준비하게.”

“예.”

* * *

얼핏 보면 횃불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핀다면 그것이 일반적인 횃불과는 뭔가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횃대 끝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상으로 커지거나 작아지지도 않았다. 불길은 일정하게, 그곳에 멈춘 것처럼 타올랐다.

“로그모라의 숨이라고 불립니다. 부정적인 기운이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지요. 특히 저주에 강한 힘을 발휘하지요.”

“저것으로 충분한가?”

배분한 횃불은 약 오십 개 정도. 당연히 군대 전체를 두르기에는 부족했다.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빛이 직접 닿는 범위가 아니더라도, 힘을 품은 연기가 퍼질 테니까 말입니다.”

연기라. 그 말에 군터는 휘하 기병 한 명이 들고 있는 횃불을 보았다. 횃대 끝에 불이 타오르고 있지만,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이 아닌 기감으로 살피면 느껴진다. 횃대 끝에서부터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기운을.

상큼한 풀 내음이 감도는 듯하다. 무질서하게 퍼져나가는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군터는 그것이 꼭 뱀 같다고 느꼈다.

형체 없는 뱀은 천천히 군대 전체를 감쌌다. 바깥쪽에 횃불을 들고 있던 병사들을 기점으로 연기가 띠처럼 이어졌다. 그제야 군터는 횃불을 든 병사들의 배치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우우우―

횃불의 보이지 않는 연기가 한창 퍼지고 있던 그때. 바람속에 은은하게 들려오던 괴음이 뚜렷해졌다.

“움직이는 건가.”

“로그모라의 숨이 저것들을 자극한 모양입니다.”

“짐작한 모양이군.”

“상극의 기운이니까 말입니다. 자극을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하겠지요.”

“사서 불러들였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어차피 저 불길한 존재들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오오오오―!

은은하던 괴음은 이제 큼지막한 괴성이 되었다.

어둠이 밀려왔다. 대낮이었던 하늘이 갑작스레 한밤중이 되었다.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비명이라도 지르지 않은 것은 렌에 들어선 뒤로 워낙 기이한 일들을 많이 겪다보니 현실감각이 마비된 탓이었다.

“온다!”

테론 아바예크의 뾰족한 고함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일깨웠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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