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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19화 (619/1,064)

619화

“뭘 서 있고 그러나. 거기 앉게.”

“아, 예.”

당황한 것이 티가 났을까. 애덤 모라크는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며 조악한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장군.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장군이 할 소리는 아니다. 애덤 모라크는 애써 모른 척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남은 병사가 오천 가량입니다. 허나 그중에 거동이 불편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중상자가 오백 이상.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볍지 않은 부상병은 천이 훌쩍 넘습니다. 그런 상황에, 언제 또 이틀 전 같은 일이 생길지 모르지요.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거창하군. 무슨 말을 하고 싶나.”

감정이 없는 것인가? 여전히 처음처럼 무뚝뚝한 군터의 목소리에, 애덤 모라크는 순간 이 자가 감정이 없는 자는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답은 해야 한다. 그는 여기에 질문을, 아니 제안을 하러 왔다.

“진퇴를…고민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진퇴라.”

말이 진퇴지, 사실상 물러나자는 뜻이다. 애덤 모라크는 의중을 숨기지 않았고, 군터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바로 전에 거창하게 상황의 어려움을 줄줄이 늘어놓은 것만 들어도 그의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나?”

애덤 모라크는 즉답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가라앉아 있는 듯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두 눈은 여전히 불처럼 이글거리는 듯했다. 그는 자연스레 이틀 전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충격과…공포는 아직도 바로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소장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임무를 이어간다면, 군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 본 피해만 해도 충분히 궤멸적이라는 말을 쓸 만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어갔을 경우에 입게 될 피해를 표현할 더 강한 말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그 표현을 썼다.

“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자네도 곤란할 텐데?”

나직한 물음에 애덤 모라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다. 알고 있다. 이번 일은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재기는 요원해질 것이다. 어쩌면 평생 가문의 후미진 별채에서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는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여기서 군을 돌린다는 건, 그런 미래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만…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무덤에 수천의 병사들까지 같이 끌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도, 욕망에 눈이 멀지도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기로 한 것을 후회하고 있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예. 그렇습니다.”

실망스러워 할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할 것이다. 그가 본 군터 크렘보르는 현실을 무시한 채 고집만 부리는 멍청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덕장이랄 수는 없어도 병사들에게 꽤 관대한 장군이었고, 군을 위해 스스로 나서서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이틀 전 새벽에도 그랬고, 사흘 전에도 그랬다. 그는 결코 병사들을 뻔히 보이는 사지로 밀어넣을…….

“약하군.”

“…….”

“핑계는 좋지만 결국 겁을 집어먹었을 뿐이다. 그대가 말한 병사들처럼.”

“소장은 그런 것이…….”

“위험할 줄 모르고 왔나? 다 알고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하니 돌아가자? 그리 말하면 내가 그러자고 할 줄 알았나.”

이게 아니다. 이건 전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애덤 모라크는 낯빛을 굳히고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서늘해졌고, 덩달아 그의 가슴도 차갑게 식었다.

“칼밥을 먹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칼날 위 인생이다. 언제든 죽일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지. 군문에서 10년 이상을 무사히 버티는 자는 드물고, 몸 성히 제대하는 자는 신이 축복했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을 만큼 더더욱 드물지.”

“장군.”

“설령 이곳이 사지가 된다고 해도 대수로울 것은 없다. 저들도, 나도.”

애덤 모라크는 자신이 이 사내에 대해 완전히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실수를 되돌릴 방도는 없다는 것도.

“계속 간다.”

“이곳에서 모두 뼈를 묻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장군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와 말머리를 돌린다고 해서 달라지나? 돌아가는 길은 봉인지까지 가는 길보다 길다. 왔던 길이라고 해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괴물들을 조종하는 정체 모를 적은 그들이 봉인지에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봉인지에 더 가까이 갈수록 적의 공격은 더 거세질 것이 자명하다. 반면에 이대로 퇴각을 한다면,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흔들리는 것은 이해하지. 하지만 알아서 중심을 잡게. 꼴사납게 넘어졌을 때 친절히 일으켜 세워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그 말이 끝이었다. 이만 나가보라는 손짓에 애덤 모라크는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빠져 나왔다. 함께 갔지만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아드리안은 막사를 나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나 했습니다만, 역시나였군요.”

“짐작하고 있었나?”

“짐작? 예. 했지요. 장군께서 하실 말도, 들으실 말도.”

“난 조금 달리 짐작했었네만.”

“저희 장군께서는 칼 같은 분이십니다. 보통은 칼집 안에 들어간 것처럼 잠잠하시지만, 한 번 날이 섰다 하면 목표를 이루기 전에는 칼집에 들어가지 않지요.”

“목표?”

“칼이 칼집에서 나왔다면 그 목표는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지금 장군께서는 상당히 격앙되어 계신 것 같습니다. 저도 장군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애덤 모라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조용히 자신의 막사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했다. 부상병들을 분류하고, 치료가 필요한 자들을 치료하게 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단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나.

그날 저녁. 그새 소식을 들었는지 두려운 기색을 애써 감춘 장교들이 몇 무리씩 그의 막사를 찾았다. 그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퇴각을 권한 것이 맞냐고 물었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이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약간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잘못 알고 있군. 그런 적 없네.”

애덤 모라크는 그들의 물음에 즉각 부정했다. 그는 실망하는 장교들을 무시했고, 그들의 바람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가 그리 결정한 이상 다른 방도는 없다.’

사실 딱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퇴각을 원하는 장교들을 모아서 뜻을 같이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뒤집어엎는 것이다. 하지만 군터 크렘보르와 그를 따르는 정예 병사들이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차라리 괴물들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기면 찢겼지 그런 불명예스러운 짓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바로 앞이 불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건가.’

불만을 토로하는 장교들을 냉랭히 돌려보낸 후. 홀로 남은 그는 조용히 자조했다.

* * *

“장군. 애덤 모라크 장군이 그를 찾아온 이들을 돌려보냈답니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더군요.”

야심한 시각. 조용히 찾아온 아드리안이 그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무능한 놈들이 반이라면 겁쟁이 놈들은 또 그 반 정도 됩니다. 두려움에 반쯤 맛이 가서 우르르 몰려간 것이겠지요. 놈들은 그가 장군을 설득해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애덤 모라크는 거절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뛰어난 군인이 아니지만, 명예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어리석지도 않고요. 장군께서 그리 강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가 느낀 바가 없었겠습니까?”

“그러길 바라지.”

서늘한 목소리. 아드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상관은 딱히 애덤 모라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고, 느껴졌다. 영문 모를 분노가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틀째 계속 말이다.

“장군.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다. 움직일 만하다.”

놀라운 일이다. 사흘 전에는 거인들과 홀로 맞섰고, 이틀 전에는 끔찍한 술수까지 사용하면서 단신으로 족히 백 마리가 넘는 괴물들을 도륙했다. 그 후에 그는, 적어도 아드리안이 본 이후로는 가장 좋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부상과 피로를 이틀 만에 털어내다니?

놀랍다. 놀라운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물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을 여쭌 것이 아닙니다.”

“허면?”

“소관이 보기에, 장군께서는 지금 냉정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

“죽으러 가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만, 얼토당토않은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군터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드러났다.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손으로 입매를 쓸었다.

“그래. 조금 흥분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틀 전의 일 때문입니까?”

“아니. 그것과는 상관없다. 그저…한동안 여러모로 거슬리는 일이 많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 모양이지.”

이번에는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장군께서도 사람이기는 하신 모양입니다.”

“무슨 뜻이냐?”

“의외라는 말씀입니다. 장군의 이런 모습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흠.”

약간의 자잘한 대화가 더 오가고,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막사를 나서려던 차.

“너는 어떠냐.”

“예?”

“너도 두려우냐?”

“…뭐, 그렇지요. 죽을 가능성이 높은데 두렵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아드리안이 말을 멈췄다. 잠시 생각하는 듯했던 그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렵지만, 기대도 됩니다.”

“기대?”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며,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선친에게서요.”

아드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막사를 나갔다. 홀로 남은 군터는 한동안 어둠 속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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