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화
“물러나! 물러나라!”
몇몇 장교들이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직접 독을 뒤집어쓴 병사들은 구할 도리가 없었고, 그 주변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비틀거리기 바빴다. 그리고, 시체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푹!
“커억!”
이제까지의 치열한 전투로 얻어낸 승기가 단번에 날아갔다. 제국군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무너져갔다. 그나마 독이 퍼진 자리에서 떨어져 있던 이들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려 했으나, 그때까지도 거인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알겠나! 바로 빠져나가는 거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죽는다고 생각해라!”
그 와중에, 할렌이 이끄는 기병대는 톡톡히 활약했다. 군터가 그들에게 기대했던 그 이상으로.
그들은 거인들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다. 독기가 닿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위험에 고개 돌리지 않는 용맹함이 빛을 발했다. 군터가 이끌고 온 솔롬의 병사들이 그랬고, 타이던의 병사들도 바로 옆에서 말을 달리는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공포가 그러하듯, 용기 역시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번졌다.
“빠져!”
그들은 직접 적을 무찌르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위험에 처한 아군들을 구해내는 데 집중했다. 무리해서 공격하지 않고, 적의 주의를 끄는 정도면 충분했다. 죽지도 않는 것들과 드잡이질을 할 필요도 없었고, 독 덩어리 거인을 목숨 걸고 쓰러뜨릴 필요도 없었다. 가볍게 치고 빠지는 정도면 족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현 상황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쾅!
할렌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전장을 누비는 사이, 군터는 병사들의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대는 지금 전장에서 흉악하게 날뛰고 있는 거인. 그것도 열네 마리였다.
그어어어-
거인들은 느리다. 휘두르는 주먹에 형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별 볼 일 없는 주먹질일지언정 그 주먹에 담긴 힘만큼은 상당했다. 한두 마리가 상대라면 피할 것 없이 정면에서 맞붙어서 꺾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거인들의 수는 자그마치 열넷. 한 손이 열 손을 당하기는 힘든 법이고, 그건 군터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거인,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로 쪼개지기 전의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 몸에 부담이 갈 정도로 사기를 사용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 스스로 달려든 것이기는 했지만, 쉽지 않은 적을 연달아 상대한다.
“…….”
아주 오랜만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분노는 아니다. 사실 분노는 조금 전에 거인이 수백 개의 작은 거인으로 흩어지면서 터졌고,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은 상태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은.
푸르륵!
“음.”
잠깐 잊고 있었다. 무리를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태우고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린 전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우는 지금 꽤나 지쳐있는 상태.
“조금만 더 버텨라. 오래 걸리지 않는다.”
손을 뻗어 갈기를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짓이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달래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푸르륵!
자꾸 고개를 떨어뜨리던 전마가 거센 콧김을 뿜으며 머리를 들었다. 갑자기 없던 힘이 솟구치기라도 한 것일까?
맞다. 힘이 생긴 것이다. 군터는 아주 약간의 사기를 말의 몸속으로 주입했다. 자그마한 물 몇 방울에 불이 더 거세게 타오르듯이, 군터는 그의 기운으로 전마의 생기를 자극했다.
허나 대가 없는 힘이 어디 있겠는가. 힘없는 몸에서 힘을 내기 위해, 이 용맹한 전마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리라.
‘마지막이다.’
부디 그때까지는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군터는 조용히 그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 * *
“이럴 수가…….”
애덤 모라크가 크게 탄식했다. 그는 바로 사흘 전에 그렇게 질리도록 상대한 시체들, 그것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시체들은 죄다 썩어버렸거나, 거의 다 썩어 뼈만 남은 몰골이었지만 지금 애덤 모라크의 몰골도 초라하기로 따지면 그들과 견줄 만했다. 그만큼 그의 행색은 좋지 않았다.
사흘 전. 제국군은 늪 속에서 나타난 시체들과 전투를 벌였다. 뜻밖의 전투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까, 늪이 요동치며 거인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재빨리 움직인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단 덕분에 거인이 제대로 활개치기 전에 멈춰세울 수 있었지만, 그건 제대로 막은 것이 아니었다. 거인은 곧 수백 개의 작은 거인들로 화하여 덤벼들었다.
“후우…….”
녹초가 된 몸에 감정이 격해지자 삽시간에 숨이 가빠졌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이대로 쓰러져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애덤 모라크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그런 충동을 이겨냈다.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 차라리 죽어서 쓰러지면 쓰러졌지, 그렇게 우스운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부관이 역시 추레한 몰골을 한 채 다가왔다.
“괜찮다. 병사들은?”
“수습할 수 있는 만큼은 수습했습니다. 다만 사상자가 너무 많습니다. 자리를 잡고 시간을 들인다면 어느 정도는 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알고 있다.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나.”
그는 수하가 하기 힘들어하던 말을 대신 입 밖으로 꺼냈다.
“크렘보르 장군은?”
부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송구합니다만, 말을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가서 직접 전하지.”
“하오나 장군. 어찌…….”
“괜찮네. 설마 내 목을 치기야 하시겠는가.”
만류하는 부관을 물리고, 애덤 모라크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움직였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이 불길처럼 뜨겁게 흘러나왔다.
사흘 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시작된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최악으로 흘러갔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곧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알게 되었다.
흔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애덤 모라크는 평소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그런 말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하는, 실패자의 넋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과거에 그가 그리 변변찮게 여겼던 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다만 변명거리는 있다. 돌이켜보아도 불가항력이었다. 수백의 거인들이 시체들에 합세했고, 그들은 심지어 예상치 못한 극독을 품고 있었다. 전장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고, 당장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시체들에 맞서야 했던 난전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찍이 렌에서 2황자의 잔당들과 대치할 때도, 렌에 닥친 재앙을 피해 몸을 빼면서도 겪어본 적 없는 위기였다. 그야말로 목이 간당간당해질 지경까지 갔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텼다. 악에 받쳐 사투를 벌였고, 기어이 승리했다. 하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사상자가 천 명이 훌쩍 넘었고, 사망자만 해도 그 삼분지 일. 거동하기 힘든 중상자까지 합하면 전체의 절반이 훌쩍 넘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암담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다음 날 새벽. 상황을 채 다 수습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습격을, 아니 공격을 받았다. 천 마리가 훌쩍 넘는, 아마도 이천에 가까웠을 괴물들에게.
“아드리안.”
애덤 모라크는 군터의 막사로 향하기 전에 아드리안을 찾아갔다.
“어인 일이십니까.”
아드리안은 붕대에 둘둘 싸인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불쑥 찾아온 애덤 모라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군을 뵙고 싶네. 같이 가겠나?”
“지금 말입니까? 말리고 싶습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어 장군을 뵈러 왔네.”
“…중요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별수 없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고맙네.”
처음에 애덤 모라크는 아드리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첫인상도 별로였고, 그가 자신의 감시역으로 따라붙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감정들을 어느 정도 잊었다. 적어도 애덤 모라크는 그리 생각했다. 마수들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우다 보니 전우애가 싹트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만큼 힘겹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시체들, 거인과의 전투도 이른 새벽에 닥친 악몽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것들은 마수(魔獸)였다. 렌에 들어온 뒤 괴물들과의 전투를 여러 차례 치렀었지만, 그것들은 괴물이라고 해도 짐승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덩치가 몇 배나 불어나고, 그 흉성도 대폭 늘어난 괴물들이었지만 적어도 외관은 그리 이질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뜨지 않은 시각, 예고도 없이 불쑥 쳐들어온 괴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들은 외형부터가 크게 비틀려 있었다. 누가 봐도 저주받은 생물임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외관뿐만이 아니었다. 흉포함 역시 짐승의 외형을 한 괴물들보다 훨씬 더했다. 자기 몸에 창칼이 박혀 들어와도 비명을 지르긴커녕 더욱 눈을 뒤집어 까며 날뛰어댔다. 그것들은 마치 생명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무슨 일이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 장군을 뵈러 왔네.”
“…중요한 일입니까?”
할렌이 떨떠름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무리 대장의 총애를 받는 무장이라 해도 엄연한 상관에게, 그것도 장군의 지위를 지닌 그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애덤 모라크는 불쾌해 하지 않았다. 그는 할렌의 반응을 이해했고, 그의 이런 태도가 자신을 약간이나마 걱정하기 때문에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 시름하고 있네. 일부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테고, 그보다 많은 수가 내일 밤을 넘기지 못하겠지. 군대는 장군의 결정이 필요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막사 안에서 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라.”
“예.”
할렌이 굳은 얼굴로 한 발자국 비켜섰다.
“…들어가십시오.”
“고맙네.”
애덤 모라크가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방금 한 말은 할렌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막사 안에 있을 군터가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분명히 반응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장군.”
막사 안에 발을 들인 순간. 애덤 모라크는 질식할 것만 같은 살벌한 공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각오를 다지고 왔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 같은, 말도 안 되게 흉포한 두 눈을 접한 순간에는 이곳에 온 것을 약간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장군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이틀 전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마수들보다도 더 사납게 날뛰며, 시체를 일으키고 죽음을 휘두르던 군터 크렘보르의 모습을.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