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군터는 막대한 기운이 크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 순간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거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려고 했으나, 그가 본 것은 번쩍이는 빛이 전부였다. 그 빛이 괴물에게 날아가는 과정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군터에게는 약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심 테론 아바예크와 술사들이 무슨 술법을 준비하건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꼼짝없이 저 술법의 여파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다.
쿠웅!
괴물이 무릎을 꿇었다. 손을 내리쳤을 때보다 땅이 훨씬 크게 흔들렸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이들이 생길 정도였다.
균형을 잡는 말 위에서, 군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 모를 술법은 확실히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괴물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증거로 괴물의 기운은 완전히 균형이 깨졌고,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들끓고 있었다.
‘부족해.’
하지만 부족하다. 거인은 무릎을 꿇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기운 역시 흔들리고는 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
군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릎 꿇은 괴물이 들썩이는 것을 봄과 동시였다.
* * *
“이런…….”
테론 아바예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가 이를 악문 것은 두통 때문이 아니었다. 괴물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때문이었다.
‘설마 버틸 줄이야.’
자미르의 화살은 술사단이 쓸 수 있는 것 중 가장 위력이 강한 술법이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술사들 모두 진이 빠져 한동안 무기력해질 정도로 부담이 큰 술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필살의 수단을 동원하고도 저 괴물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
거기다, 자미르의 화살이 입힌 타격이 괴물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괴물의 기운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 같았지만, 술사단은 기력이 크게 쇠해 당장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쿠르르르르!
괴물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폭음을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에 몇몇 이들이 환호를 터뜨렸다. 하지만 테론 아바예크는 탄식했다.
“이…….”
괴물은 수십, 수백 개의 조각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내재한 기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거다.’
거대한 몸뚱이 하나로 표적이 되는 것보다 작게 흩어져서 싸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장 전군을 물려야 한다고 전하게! 어서!”
“예? 아, 알겠습니다!”
바쁘게 달려가는 전령의 뒷모습을 보며, 테론 아바예크는 피가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 *
괴물이 수백 조각이 날 때만 해도 전장에 살아있는 모두가 입으로든, 마음으로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수백 조각이 난 괴물의 잔해가 땅에 떨어지고, 그것들이 사람 비슷한 형상으로 변했을 때. 모든 이들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러나라!”
그나마 먼저 장신을 차린 장교들이 다급히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해골들과 뒤엉켜 싸운 지 한참인 병사들이 즉각 물러날 수는 없었고, 몇몇 병사들이 근처에 떨어진 자그마한 괴물들과 맞닥뜨렸다.
“이, 이익!”
그러나 작다고 해도 수백 조각이 나기 전의 괴물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일 뿐, 거대한 괴물에게서 떨어져 나온 수백 마리의 괴물들 역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키는 인간의 두 배 정도에, 덩치는 그 이상.
“우아악!”
괴물이 휘두른 손, 혹은 주먹을 맞은 병사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방패를 들어 막았음에도 단 한 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물러나!”
다급한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상술했듯, 병사들은 해골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중에 몸을 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이들은 드물었다. 다가오는 괴물들을 피해, 혹은 물러나라는 명을 따르기 위해 억지로 몸을 빼다가 등에 칼침을 맞은 병사들이 속출했다.
두두두!
할렌은 군터를 대신해 기병을 지휘했다. 그는 거대한 괴물이 수백 조각이 되어 쓰러질 때부터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내며 길러진 무장의 감각이 경고를 보냈다. 당장 움직여야 한다고.
“한 번에 처리하려고 하지 마라! 쳐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돌파하여 지나간다고 생각해라!”
할렌은 그 경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저 작은 괴물, 아니 거인들이 전장을 망가뜨려 놓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처리해야 하며,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자신들뿐이라는 것도 확신했다.
“부딪칠 것 같으면 피해라! 절대 놈들의 공격을 허용하지 마!”
연신 외치는 동안에도 괴물들과의 거리는 줄어들었다. 총 다섯. 괴물들이 괴력을 지녔든 아니든 그대로 짓밟아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할렌은 머릿속을 지배하는 위기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히히힝!
단 다섯. 그러나 거리가 좁혀질수록 상당한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충돌 직전, 할렌은 괴물들이 자신들의 접근을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은 없다. 가볍게 치고 빠진다면 저놈들은 결코 따라올 수 없을 터.
“이야아앗!”
힘껏 쥔 창을 쭉 찔렀다.
콰앙!
할렌과 병사들이 그들의 싸움을 시작했을 때, 군터는 홀로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창으로 그의 눈에 보이는 괴물과 해골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해골들은 손쉬웠다. 그들의 엉성한 칼질은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고, 손톱과 이빨 등에 스며있는 독기 역시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죽었다 살아난 이후로, 그리고 점점 사기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그의 몸은 어지간한 독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해골들의 손톱이나 이빨이 그의 몸에 닿을 일도 없었고 말이다.
그어어어어-!
반면, 거인들은 다소 까다로웠다. 어떻게 죽여야 할지부터가 문제였다. 사람, 아니 생물이라면 목을 자르는 것으로 죽일 수 있겠지만, 거인은 말이 거인이지 실상 괴생물체였다. 어쩌면 생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체구조 또한 그나마 비슷한 것이 인간일 뿐, 머리와 몸통의 구분도 어려운 독특한 형태였다. 어디를 베고, 어디를 찔러야 저것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인가.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에, 군터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전과 같다. 덩치는 작아졌지만, 어차피 본질은 같다.
점액으로 이루어진 몸뚱이. 뭉칠 수 없는 것이 뭉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움직인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분명 저 거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사이한 기운일 터. 그렇다면 그 기운을 없애버린다면 거인들도 쓰러지지 않겠는가.
쾅! 콰앙!
군터는 말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작아진 거인들의 주먹은 그와 말을 동시에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았다. 거인들은 말 위에 있는 그를 노렸고, 군터는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격렬하게 몸을 흔들면서 그 주먹들을 피해냈다. 그리고 동시에 사기를 머금은 창으로 거인들을 후려쳤다. 작은 거인들의 몸뚱이는 거대했을 때보다 더 단단했다. 하지만 창날이 점액을 깊게 가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창날에 어려 있던 사기가 거인들에게 옮겨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거인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굼떠졌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군터는 몸놀림이 굼떠진 거인들을 오래지 않아 쓰러뜨렸다. 완전히 움직임이 멈추기 전, 거인은 녹아내리듯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몸을 이루던 점액이 쏟아져 흘렀다. 점액이 닿은 땅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독?’
가까이서 붙어 싸울 때도 알지 못했다. 직접 몸이 닿을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형체를 이루고 있을 때는 점액이 가진 독성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빌어먹을.”
군터는 아주 오랜만에, 육성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 * *
병사들은 군터처럼 무지막지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거인들을 상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형을 이뤄서 거인에 맞서 싸웠다. 힘겹고 느리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착실하게 거인들을 상대했다.
“막아!”
두 사람이 방패를 이어 붙인 채 거인의 공격을 받아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침음을 흘리며 몇 걸음씩이나 뒤로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살짝 뒤로 빠져 있던 나머지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거인을 난도질했다.
그어어어-
칼이 베고, 창이 헤집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은 빠르게 회복됐다. 마치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은 회복이나 재생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광경을 보았다면 의지가 꺾일 법도 하건만, 병사들은 이를 꽉 깨물 뿐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힘내라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거인의 저 불합리한 능력이 결코 공짜가 아님을.
“커억!”
거인의 계속된 공격에 끝내 버티지 못한 병사 몇이 쓰러져 몸부림쳤다. 그들이 일어나지 못하자 다른 이들이 대신 방패를 들고 괴물을 막아섰다.
콰앙!
“크윽! 좋아! 버틸만해!”
거인이 힘이 빠졌다. 주먹질의 위력이 줄어들었고, 움직임도 느려졌다. 거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그 상처가 사라질수록 거인의 힘은 줄어들었다.
“이 새끼!”
힘겨운 싸움이 한동안 이어지던 중. 한 병사의 칼이 거인의 등을 깊숙이 찔렀다.
그어어어-
거인이 우뚝 멈춰 서나 싶더니, 거대한 몸뚱이가 불붙은 촛농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녹초가 된 병사들이 환호를 질렀다. 마지막으로 칼을 꽂았던 병사는 특히 의기양양하여 칼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너져 내리는 거인의 위에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활짝 웃고 있던 얼굴의 색이 점점 변해갔다. 처음에는 옅은 푸른색으로, 거기서 다시 녹색으로.
주변의 병사들이 이상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는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의 몸은 녹아내리는 점액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 이게 무슨……!”
“피, 피해! 저기에 닿지 마!”
병사들은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