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화
거인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든 그 외형을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비록 눈도, 코도, 입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치 늪이 통째로 일어선 듯했다. 그 거대한 늪이 삽시간에 쪼그라들었다. 아니, 위로 솟구쳤다.
“뭐…….”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문이 막힌다던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그랬다. 그들은 그들을 뒤덮은 그림자를, 거대한 포효 소리를 듣고서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즉시 석상처럼 굳었다. 입은 쩍 벌어졌는데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아악!”
그 무거운 정적은 고통에 찬 비명에 깨졌다. 시체의 칼이 한 병사의 복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뒤이어 몇 번의 비명이 더 터져 나오고 나서야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눈앞의 시체를 상대하면서도 신경이 늪 쪽에, 아니 늪의 거인에게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건…….”
테론 아바예크가 당혹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죽지 않으려면 눈앞의 시체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하는 병사들과 달리, 비교적 후방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그는 ‘늪 거인’을 제대로 관찰 할 수 있었다.
“저게…허억, 허억. 대체 무엇입니까?”
휘하 술사가 그에게 물었다. 막 술법 하나를 사용하고 헐떡거리던 차였다.
“모르겠네.”
테론 아바예크는 박식한 사내였다. 일반인들과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술사 중에서도 식견이 뛰어난 편이다. 그가 이번 원정대에서 술사들을 이끌게 된 데는 그의 술법 실력도 실력이지만 여러 분야에서 깊고 넓은 지식을 가진 탓이 컸다.
하지만 저 늪 거인은 그가 아는 어떤 것과도 다르다. 얼핏 느껴지는 기운이나 형체를 보면 정령과 비슷한 것 같지만, 정령이라기에는 너무나 뒤틀려 있었다.
‘오염된 건가?’
오염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것이 정령이거나 정령의 군집이라면 신주의 봉인에서 흘러나온 악의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저것이 ‘정령’이라면 말이다.
오오오오―!
늪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굼떠 보이지만, 사실 그리 느리지 않았다. 앞으로 열 발자국 정도면 전투 현장에 다다를 것 같았다.
“창칼은 통하지 않을 것 같군. 저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듯싶네.”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은 시험을 해볼까요?”
“아니. 괜히 어설프게 성질을 돋우면 놈의 주의를 끌게 될 터.”
저 거체가 날뛰기 시작하면 술법을 쓸 겨를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 괴물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한 번에 쓰러뜨려야 하네. 자미르의 화살을 사용하지.”
“자미르의 화살을……. 알겠습니다.”
잠깐 멈칫하기는 했지만, 반론은 없었다.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저 늪 거인만 제거한다면 승리가 눈앞. 술법으로 지원을 더 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문제는 없으리라.
“크렘보르 장군에게 전해라. 저 괴물은 우리가 맡을 것이고…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라고.”
“예.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전령이 그대로 말을 달렸다.
* * *
“알겠다.”
숨을 돌리며 늪 거인의 동태를 살피던 중. 군터는 전령에게서 테론 아바예크의 말을 전해 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는 저 괴물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는 듯했다.
‘쉽지는 않아 보이는데.’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군터는 이제껏 저렇게 거대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창칼로 상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이는, 그로서도 어찌 상대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괴물.
“장군. 술사들이 저것을 처리할 수 있을까요?”
할렌이 다가와 물었다. 점점 유리해지는 전황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상기되어 있던 그였지만 저 괴상한 거인이 일어난 뒤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기대해봐야지. 그보다…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좀 끌어줘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을…말입니까?”
군터는 답하지 않고 거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게 걸음을 떼는 거인. 놈의 걸음은 전장의 한복판을 향하고 있었다. 저놈이 저 한가운데를 밟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족히 수십의 병사들이 휩쓸릴 터였다. 놈이 날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테고.
“네가 병사들을 이끌어라.”
“장군. 설마 혼자서 막으려 하십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을지…….”
할렌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말하기에는, 이제껏 그의 상관이 보여온 기적과도 같은 무공들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괜찮다. 놈은 느려. 크기는 상당하지만…저 정도라면 문제없다.”
“방금 전령이 전하지 않았습니까. 자칫 술법에 말려드실지도 모릅니다.”
“그 역시 문제없다.”
군터는 더 말하지 않고 말의 배를 찼다. 잘 훈련된 전마는 작은 산 같은 거인을 향해 달리면서도 힘차게 다리를 움직였다.
오오오오―!
울음일까. 하지만 거인은 이목구비가 없었다. 몸 전체가 점액으로 이루어진 듯, 끊임없이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저런 몸에서 어떻게 저런 커다란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잠깐 시답잖은 의문을 품어보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거인의 몸이 움직인 것이다. 군터는 거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느꼈다. 물론, 거인에게 눈은 없었지만.
쿵!
거인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다르게 움직였다.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군터가 말을 달리고 있는 방향으로.
푸르륵!
말의 몸이 떨린다. 말 못 하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다.
‘두려워 마라. 저놈은 우리를 해하지 못할 테니.’
군터는 창을 길게 잡았다. 저 흘러내리는 몸은 어떻게 봐도 내구성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기가 워낙 커서, 그의 창은 저 괴물에 비하면 작은 가시 정도에 불과했다. 가시로 사람의 몸을 베거나 찌른다 한들 무슨 대단한 효과를 낼 수 있을까.
‘가능할 거다.’
하지만 군터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창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요마의 뼈로 만든 창이다. 저 괴물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 몸집만큼이나 막대하지만, 정리가 안 된 것처럼 난잡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느낌.
‘저 균형을 깬다면…….’
그의 창이라면 가능하다. 거기에 더해 숨겨둔 힘까지 사용한다면 더욱 확률은 높아질 터.
쿵!
거인의 발걸음이 약간이지만 빨라진다. 군터는 호흡을 조절했다. 순식간에 집중력이 극에 달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좁아졌다. 전면의 거인과 자신. 그리고 함께하는 말까지. 오직 그 셋만이 그의 세상을 채웠다.
‘왼쪽 다리를 바깥…아니, 안쪽에서 베고 빠져나간다.’
마음먹은 순간 그림이 그려진다. 군터는 미래를 보았다. 그가 만들어낼 미래이며, 이루어질 미래다.
히히힝!
바깥쪽으로 가는 듯하다가 재빨리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의 전마는 당황하지 않고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보통 전마였다면 균형을 잃고 넘어졌을 테지만, 군터의 전마는 달랐다. 괜히 그가 몇 년 동안 타고 다닌 게 아니다. 어딜 가더라도 명마라고 불릴 만한 말인 것이다.
오오오오―!
거인의 손이 움직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찔함이 밀려왔다. 저것을 맞는다면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맞는다면 말이지.’
미리 그린 그림을 따라 움직인다. 다급해진 전마의 말발굽이 더 빠르게 땅을 찍는다. 이대로라면 거인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후욱.”
숨을 크게 들이마심과 동시에, 죽음의 기운이 창에 어린다. 수백의,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는 생명이 스러졌으며, 지금도 스러지고 있다. 그들이 흘린 사기가 군터에게로 향하고, 그의 창으로 향했다.
우득!
몸이 조금씩 삐걱거렸다. 초인의 경지를 넘어섰으며, 사기에 익숙해진 그의 육신조차 이 막대한 기운을 온전히 감당하지는 못했다.
‘아직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무리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담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우드득!
어쩔 수 없다.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저 괴물을 베는 것은 요원한 일일 것이니.
쿵!
거인의 손이 땅을 내리찍었다. 거인의 손이 대지에 지장을 남기는 순간, 전장 전체가 흔들렸다.
서걱!
동시에, 검은 안개에 휩싸인 창이 거인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작은 흠집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산에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베인 격이랄까. 거인에 용감하게 맞선 결과치고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쿠웅!
거인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온 인마가 거리를 얼마 벌리기도 전에, 작은 산만 한 크기의 거인이 우뚝 멈춰섰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거대한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역시.’
군터는 전마를 돌려세우면서 거인의 기운이 흔들리는 것을 살폈다.
불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거인의 기운이 왼쪽 다리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사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작지만 농밀한 사기는 흰 종이에 떨어진 검은 잉크처럼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두어 번 정도는 가능하겠군.’
지금처럼 치고 빠진다면 거인의 움직임을 묶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말의 체력이 문제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계속 전속력으로 달려야 하니, 많아 봐야 세 번이 한계일 듯싶었다.
‘가자.’
흥분한 말의 갈기를 쓸어주면서 조용히 달래주었다.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렸는지, 굳은 몸이 느슨해졌다.
히히힝!
다시 한번 두려움을 이겨낸 전마가 용감하게 땅을 박찼다.
* * *
‘훌륭하군…….’
또다시 홀로 거인을 향해 말을 달리는 군터를 보면서, 테론 아바예크는 나직이 감탄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비명을 질렀다. 사자에게 맞서는 고양이, 아니 쥐새끼처럼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용맹함이 도를 지나쳐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믿기지 않는 담대함과 용맹에 감탄하면서도, 테론 아바예크는 군터 크렘보르에 대해 들었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괴물과 스쳐 지나가던 순간에 그가 발한 기운에서는 분명 죽음의 냄새가 흘렀던 것이다.
“아바예크 공! 준비하십시오!”
잡생각은 여기까지. 테론 아바예크는 술법진 중앙에 모인 막대한 기운을 조금씩 통제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실수한다면 적어도 여기 모인 술사들과 인근의 호위병들은 흔적도 남지 않고 증발해버릴 터. 이제부터는 약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쿠르르릉!
자그마한 구름 속에 전류가 흐른다. 고도로 압축된 힘이 금방이라도 통제를 벗어날 것처럼 꿈틀거린다.
‘하늘의 진노. 원신의 이름 아래 굴종하라.’
술을 일으키는 것은 술력이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이며, 그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심상이다. 그리고 그의 심상을 이루는 뿌리는 굳건한 신앙. 여명 교단의 사제들조차도 인정한 신앙은 그의 마음을 바위보다 굳건하게 만들었다.
‘만물을 관통하는 화살이여.’
길쭉해진 번개가 빛이 되어 구름을 벗어났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