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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15화 (615/1,064)

615화

비가 내렸다. 폭우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고 나서까지, 쉼 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행군을 마쳤을 때도 계속 내리는 비를 보면서, 군터는 하루 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하루를 쉬었기에 망정이지,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이렇게 비를 맞았다면 정말 병사들이 대거 쓰러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장군. 이틀 거리에 거대한 늪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늪지?”

몸에 잔뜩 묻은 빗물을 털어내고 있는 중. 앞서 보냈던 정찰병들이 안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애덤 모라크가 말했다. 아드리안과 할렌을 비롯한 부장들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군터도 같은 생각이었다. 늪을 허우적거리며 병사들의 진을 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늪을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더냐.”

“늪의 규모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큽니다.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했으나 한나절 동안 말을 달려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거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부터 짐작했지만, 돌아가는 것도 녹록지 않아 보였다. 정찰병의 보고에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여차하면 늪지를 그대로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리라.

“장군.”

“일단은 가서 보고 결정하지.”

시간에 쫓기고 있는 입장이다.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되, 도저히 안 될 수준이라면 시일이 걸리더라도 돌아간다.

그렇게 결정하고 이틀 뒤.

군터는 늪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마치 강과 같은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불가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깊이가 얼마나 될지는 차치하더라도, 규모 자체가 건널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억지로 건넌다면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뒷감당은 어찌 할 것인가.

“원래 이곳에 이런 늪지가 있었나?”

“아닙니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은 없었습니다.”

길잡이들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없었다고?’

그렇다면 석 달 만에 이런 것이 생겨났다는 말인가. 당연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은 며칠 비가 내린다고 생길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하지만.

‘점점 심해지는군.’

어제도 느꼈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은 더욱 뚜렷해졌다.

흘러가는 공기 속에 악의가 도사리고 있다.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도, 저 푸르스름한 늪지에서도.

추측건대, 이 꺼림칙한 기운은 봉인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돌아간다.”

말머리를 돌렸다. 병사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끔찍한 상상에서 해방된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런데 그때.

“자, 장군!”

군터는 뒤쪽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로서는 드문, 당혹스러움의 표출이었다.

넓은 늪지에서, 죽은 자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해골들이.

“물러서! 진형을 갖춰라!”

“당황하지 마라!”

렌에 괴물과 죽은 자를 비롯한 이종들이 출몰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이제껏 맞닥뜨린 것이 전부 괴물들뿐이었기에 조금 마음을 놓고 있었을 뿐이다.

“저, 저거 설마.”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증오를 품듯, 산 자 역시 죽은 자에게 갖는 본능적인 혐오감이 있다. 하지만 부리나케 진형을 갖춘 병사들은 그런 혐오감마저도 잊었다. 늪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해골들의 모습이, 정확히 말하면 빛바래고 녹이 슨 그들의 무장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장군.”

할렌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맞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안다. 그 또한 할렌과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소식이 끊겼다더니, 이곳에서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군.”

늪 속에서 얼마나 잠겨 있었는지 모를 빛바랜 무장. 그것은 분명 제국군의 것이었다.

* * *

“들어라! 죽은 자에게 평범한 무기는 들지 않아!”

죽은 자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역시 사제의 축성은으로 만든 무기다. 그러나 일개 병사들이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

“목을 날린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무기를 든 팔다리부터 잘라라! 그다음에는 머리통까지 완전히 박살 내! 듬성듬성 빠진 이빨에 발목을 뜯기도 싶지 않다면 말이다!”

심장 없이도, 뇌 없이도 움직이지만 움직일 몸이 죄다 박살이 나면 그것도 소용없다. 근본적으로 사기를 몰아낼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이상, 산 자가 죽은 자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무식한 방법뿐이다.

“이전처럼 지원할 수 있겠나?”

군터가 테론 아바예크에게 물었다. 늪에서 나오고 있는 적의 수는 점점 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것만 해도 족히 천은 되어 보였고, 거기서 더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 상황. 어려운 싸움이 예상되지만, 술법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조금은 나으리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두르게.”

테론 가바예크가 술사들과 함께 즉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군터는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상념에 잠겼다.

‘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천이 넘는 해골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군터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늪 속에 숨어있었다지만, 그게 변명거리 되지 않는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은 그의 눈이 아니라 기감이었으니까.

‘이쯤 되면 확실해.’

기감이 무뎌졌다. 멀쩡하던 것이 갑자기 이상해졌을 리는 없으니,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십중팔구, 신주에 봉인된 신과 관련된 것일 터. 그렇다면 봉인지에 가까워져 갈수록 이런 현상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장군.”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이제 슬슬…….”

일렬로 길게 늘어선 병사들 뒤에 기병이 대기했다. 군터는 진형이랄 것도 없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죽은 자의 무리를 일견하고는 기병들이 있는 뒤쪽으로 빠졌다.

“화살은 필요 없다! 활 대신 검을, 아니 철퇴나 도끼를 들어라!”

죽은 자들은 질서 없이 무분별해 보였다. 전형적인 오합지졸 같은 모습이었으나 마음을 놓는 이는 없었다. 비록 모습은 흐트러져 있었으되, 그들이 발하는 음산한 기운은 산 자들의 심령을 쥐어짜듯 옥죄어 왔다.

“기병이 먼저 진입한다! 놈들의 신경이 흐트러지면 그때 곧바로 돌입하여 박살을 내는 거다!”

장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두려움에 꺾이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그야말로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준비하라.”

“준비!”

적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군터가 나직이 명하자 주변에 있던 부장들이 연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말 위에서 몸을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 긴장을 풀고 있던 기병들이 고삐를 고쳐 잡았다.

히히힝!

군터가 말을 몰고 나갔다.

“장군을 따르라!”

기병은 군터를 따라 늘어선 보병의 우측으로 빠져 나왔다. 그때까지도 적의 신경은 전면에 있는 보병에 집중되어 있었다.

“단순하군요. 머리까지 다 썩어버려서 그런 것인지…….”

“그럴지도.”

창칼에 찔리고 베여도 죽지 않는 적이 이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이다.

“돌격 준비!”

“준비!”

군터의 지시에 기병들이 한데 뭉쳤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솔롬의 병사들이었다면 보다 간격을 좁힐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군터가 거느린 기병 중 반은 타이던의 병사들이었다.

“돌격!”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옆구리를 훤히 드러낸 적을 짓밟는 데는.

* * *

두두두두!

“멈추지 마라!”

수백의 인마가 하나의 창이 되어 찌른다. 적의 허점을 파고든 기병 돌격은 언제나 그랬듯, 파괴적인 위력을 선보였다. 군터와 그의 친위대가 화살촉이 되어 일선에서 시체들을 짓밟았고, 바로 그 뒤를 따르는 2열부터는 1열이 미처 쓰러뜨리지 못한 시체들을 처리했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기병들은 정말 한 대의 화살처럼 적을 꿰뚫었다. 그들은 멈출 생각도, 쓰러진 시체들을 마저 짓밟을 생각도 없었다. 장교부터 병사까지,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돌격!”

기병이 한바탕 날뛰며 적의 시선을 끌자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 움직였다. 검과 방패, 도끼, 철퇴를 든 병사들이 뒤를 보인 시체들을 맹렬히 공격해 들어갔다.

그어어어―.

“아아악!”

“정신 똑바로 차려! 목을 날렸다고 끝이 아니다!”

삽시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난전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혼잡한 전투였다. 병사들은 어렵지 않게 시체들을 몰아붙였지만 그렇다고 피해를 입지 않을 수는 없었다. 녹슨 검과 창에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목이 잘리고 팔이 날아간 시체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끄아아악!”

한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발밑에 머리만 남은 해골이 병사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 새끼!”

옆에 있던 병사가 철퇴로 해골을 박살 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던 병사는 끝내 쓰러졌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뭐, 뭐야?”

철퇴를 휘두른 병사가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즈음, 비슷한 일이 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독이다! 놈들에게 물리지 마! 중독 된다!”

독? 독이라니!

정신없이 싸우던 병사들도 독이라는 말에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개 같은……!”

이미 한창 뒤섞여 싸우고 있는 와중이다. 꺼림칙한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몸을 뺄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독’이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병사들의 움직임은 조금씩 소극적으로 변했다. 첫 교전 이후로 생각보다 쉽게 쓰러지는 적 때문에 한껏 올라가 있던 사기도 주춤했다.

“어떤 놈이냐! 헛소리를 함부로 지껄여대다니!”

애덤 모라크가 대노하여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독?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피부색이 눈에 띄게 변하고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은 대표적인 중독 증상이니까. 허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전투 중이 아닌가.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말을 함부로 입밖에 내다니. 그것도 다 들으라는 듯이!

“전투가 끝난 후에, 어떤 놈인지 반드시 찾아내라.”

그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전투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군터가 이끄는 기병이 시체들이 밀집해 있는 곳을 몇 번이고 꿰뚫었고, 사기가 오른 보병이 흩어진 시체들을 차근차근 쓰러뜨렸다. 간혹 밀리는 곳이 생긴다 싶으면 위력적인 술법이 힘을 발했다. 시체들이 서 있는 땅이 뒤집힌다거나, 불의 비가 쏟아졌다. 주술의 불은 뼈밖에 남지 않은 시체들도 기름에 적신 풀처럼 잘만 태웠다.

‘이겼다.’

낙관적인 생각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때.

오오오오―!

거대한 그림자가 전장을 뒤덮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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