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협곡에도 괴물들은 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더 덩치가 큰 괴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협곡 밖에서 맞닥뜨렸던 것들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혼자, 혹은 새끼 몇 마리와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인 짐승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것들은 좀 다르군요.”
평범한 곰보다 족히 세 배는 거대한 덩치의 괴물 곰. 협곡 전체에 울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던 녀석은 군터의 창에 목이 잘렸다.
“괴물들을 부리는 힘이 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렌에 존재하는 동물 중 상당수가 괴물로 변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전부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어찌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겠나. 괴물들이 한 번에 만 마리, 이만 마리 씩 몰려온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 정도면 하늘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애덤 모라크가 다가와 말했다.
바깥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협곡 내부는 위로 갈수록 협소해졌다. 양쪽 절벽이 꼭대기에서부터 안쪽으로 휜 것 같은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벽에 붙으면 빌어먹을 새 새끼들이 설치지는 못할 겁니다.”
“절벽의 암반이 꽤 단단해 보입니다. 조금만 올라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만…….”
모든 조건이 괜찮았다. 이제 남은 것은 군터의 결정뿐.
“이곳에서 쉰다.”
군터는 자신을 바라보는 간절한 시선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차피 슬슬 한 번은 쉬어야 했고, 이 정도면 모든 조건이 최상이니 결정은 쉬웠다.
* * *
조용한 아침.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축축 늘어지는 것이 누가 보면 뜬눈으로 밤을 보낸 줄 알겠지만, 그들은 어젯밤 렌에 들어온 뒤로 가장 마음 편히 숙면을 취했다. 다만 그간 쌓인 피로를 다 덜어내지 못해 찌뿌둥한 것일 뿐.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더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겠습니다.”
애덤 모라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역시 간만에 취한 숙면에 한결 기분이 좋아진 상태. 하지만 몸은 기분과는 반대로 축축 늘어졌다. 한참 누적된 피로가 어중간하게 풀렸기 때문이다. 한 번 휴식의 단 맛을 본 몸이 더 많은 휴식이 필요하다며 칭얼대는 것이다.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생길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만큼 렌에 들어온 이후에 그들이 느낀 피로는 막대했으니.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는 상황이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으니,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용할 지경이었다.
“시간이 없다.”
“하오나 장군.”
말을 한 것은 애덤 모라크 휘하에 있는 타이던 군의 장교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이전과 달리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근처에 있던 아드리안이 끼어들었다.
“이봐. 나설 자리, 나서지 말아야 할 자리 정도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나?”
“뭐라?”
“못 들었나? 들었을 텐데?”
장교가 발끈하여 다시 입을 열려는데, 애덤 모라크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장군의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말게.”
“소, 송구합니다 장군.”
군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아드리안을 일견했을 뿐.
“하루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말했듯, 시간이 없다. 임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룻밤은 불을 질러 막았지만, 이제 곧 놈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
불만이 떠올라 있던 얼굴들이 대번에 핼쑥해졌다. 피곤함에 찌들어 있다 보니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이 마비되었다. 그래서 미처 뒤따라붙을 괴물들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준비해라. 앞으로의 길도 순탄치는 않겠지만, 최대한 서두른다.”
“옛!”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긴 협곡을 빠져나온 후, 그들은 남서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어제 활짝 개었던 것과 달리, 아침임에도 하늘은 곧 비라도 한바탕 쏟아낼 것처럼 우중충했다.
“새 괴물들이다!”
앞서가던 누군가가 외쳤다. 그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군터는 일찌감치 저 멀리 보이는 하늘 위 괴물들의 수를 대강 헤아리고 있었다.
‘육십…아니, 칠십 마리 정도인가.’
양발로 각기 사람 하나씩은 여유롭게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은 괴조들이 칠십여 마리. 이전에 상대해 본 것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그래도 싸움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화살이 닿지 않을 높이에서 배회하다가 틈이 보였다 싶으면 수직으로 하강하여 발톱으로 긁거나, 사람째로 낚아채 버린다. 아래로 내려왔을 때 화살을 퍼부으면 잡을 수 있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물이었다.
“방패 들어!”
“궁수 준비!”
놈들이 다가왔을 때 화살로 잡는다고 해도, 그러려면 수백 발이 넘게 쏟아부어야 한다. 머리 위로 쏜 화살이 죄다 괴물들을 맞추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는 일. 위로 올라가다 고꾸라지는 화살들이 어디에 떨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라, 병사들은 모두 방패로 머리를 가려야 했다.
“가져와라.”
“옛.”
병사들이 부산을 떠는 사이, 군터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그가 수하에게서 받아든 것은 활이 아니라 창이었다.
까아아악-!
“온다!”
허공을 배회하던 괴조들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가히 막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흡!”
눈을 부릅뜬 장교들이 사격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군터는 들고 있던 창을 있는 힘껏 던졌다.
퍼억!
가장 앞에서 내려오던 괴조의 몸뚱이가 크게 들썩였다. 투척용 창 한 자루가 놈의 몸뚱이에 깊숙이 틀어박혔고, 놈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끝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했다.
“지금이다! 쏴라!”
수백, 아니 천 발이 넘는 화살이 일제히 시위를 떠났다. 하지만 그 많은 화살 중에 제대로 목표에 닿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맞춰서 떨어뜨린 괴조의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아악!”
“사, 살려줘!”
화살비를 피한, 혹은 맞았지만 견뎌낸 괴조들이 사납게 발톱을 휘둘렀다. 놈들은 병사들을 낚아채서 곧바로 높이 날아올랐다. 죽음을 직감한 병사들이 괴조의 발톱에 붙잡힌 채 비명을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아드리안이 활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렌에 들어온 뒤로 별별 괴물들을 다 보았고, 상대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열 받는 것이 저 날개 달린 놈들이었다. 땅을 달리는 놈들이야 얼마나 흉포한 놈들이든 간에 칼침을 놔주면 그만이지만, 저놈들은 칼로 잡을 수가 없다. 멀리서 제발 맞기를 바라며 활시위를 놓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아아아악!”
놈들이 짜증 나는 진짜 이유. 그건 지금처럼, 하늘 높이에서 떨어지는 아군 병사들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무력함은, 아드리안이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
“놈들이 다시 내려오면 절대 놓치지 마라! 알겠느냐!”
“옛!”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반드시 맞춘다.’
활 솜씨에 자신이 없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괴조들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하강했다. 그걸 쏴서 맞춘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그렇기에 병사들은 괴조들이 내려올 때가 아니라 올라갈 때를 노려서 시위를 놓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놈들은 거의 직선으로 내려온다.’
놈들이 움직일 경로를 예측할 수 있다면, 놈들이 무엇을 노릴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놈들의 덩치가 있으니…….’
아드리안은 다시 활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아아악!”
하늘 높은 곳에서, 아군 병사들의 몸뚱이가 벼락처럼 군중에 떨어졌다. 방패로 막는다고 막았지만,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진 터라 아래에서 그에 맞은 병사들은 방패째로 우그러져서 피떡이 되었다. 운 좋게 빗겨서 맞은 자들도 팔이나 무릎이 꺾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놓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올 때, 괴조들이 두 번째 사냥을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괴조들을 사납게 노려보며 활시위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까아악-!
괴조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창 한 자루가 선두의 괴조에게 틀어박혔다. 그것을 보며, 아드리안은 시위를 놓았다.
슈웅!
기세 좋게 날아간 화살이 노리고 있던 괴조의 머리통에 명중했다. 화살에 맞은 놈이 비틀거리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아드리안은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 * *
애덤 모라크가 군터에게 다가와 말했다.
“괴물들을 통솔하는 놈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놈이 복잡한 계산까지는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근거는?”
“제가 놈이었다면, 저는 우리의 발을 늦추는 쪽으로 괴조들을 부렸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적의 입장에서 봤을 때, 괴조들의 가장 큰 장점은 날카로운 부리나 발톱이 아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다. 놈들이 하늘 높은 곳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으면 그 어떤 무기로도 놈들을 물리칠 수 없다. 놈들이 그저 하늘 위에 떠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만으로도 아래의 아군은 위축되어 발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피로가 가중되는 것은 덤이고.
“다행스러운 일 아닙니까. 만약 괴물들을 천 마리가 넘도록 부릴 수 있는 적이 머리까지 쓸 줄 알았다면, 그건 재앙이라는 말로도 표현치 못할 만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적이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놈이라는 점에 위안이라도 얻자는 건가?”
“앞일을 예상하는 데 있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놈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봉인지에 가는 것을 원치 않고, 모든 힘을 동원해 우리를 막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이제껏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보면, 적의 공격은 쉼 없이 쏟아졌지만…그중에 특별히 위협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 이유가 뭘까? 공격을 해온 괴물들이 약해서?
‘아니.’
적의 공격이 특별한 노림수가 없이 단순했으며, 또한 산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이 여러 차례에 나눠서 오지 않고 한꺼번에 뭉쳐서 덤볐다면, 분명 위협적이었을 터.
“통제된 괴물들 때문에 잠시 착각했었습니다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적은…놈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짐승처럼 말입니다.”
“좋군. 하지만 그렇다 한들 우리가 할 일이 바뀌지는 않는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애덤 모라크가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썩은 과일처럼 시들었던 표정에 생기가 감돌았다. 희망을 본 것일까?
‘본능이라.’
문득, 군터는 불타오르는 평야 너머에서 울부짖던 거대한 괴조를 떠올렸다.
궁금해졌다. 그때 그가 본 그 괴조를 애덤 모라크도 보았더라면, 그래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었을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