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땅 밑에서, 땅 위에서, 하늘에서. 어디서든, 언제든 나타나는 적은 강인한 병사들을 단 닷새 만에 피로에 젖게 만들었다. 그나마 군터가 그의 감각을 십분 활용하여 미리 대처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피로만 쌓이는 게 아니라 큰 피해까지 입었을 것이다.
“장군. 병사들이 지쳤습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쉬게 해야 하지 않을지.”
애덤 모라크의 말이 아니더라도, 군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곁에 있는 친위대 병사들조차 눈 밑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른 병사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알고 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가 어렵군.”
이틀 전 밤에는 난데없이 진을 친 지반이 흔들리면서 수십 마리의 ‘세 주둥이 지렁이’들이 튀어나왔다. 그리 오래지 않아 격퇴하기는 했지만, 그때문에 수천 명의 병사들이 밤잠을 설쳐야 했다. 아무리 경계를 삼엄하게 해도 땅 밑에서 가하는 기습에는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그때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땅밑에서 튀어나오는 지렁이들만 문제겠습니까. 하늘에서 귀찮게 구는 것들도 문제입니다. 그것들이 머리 위에서 시끄럽게 울어대기만 해도 병사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겁니다.”
아드리안의 지적도 일리가 있었다. 가까이서 설치는 자그마한 놈들이라면 활로 없애거나 쫓아낼 수 있겠지만, 덩치가 큰 놈들이나 멀리서 신경만 긁어대는 것들은 어찌 손을 쓸 방도가 없다.
“지반이 단단한…어디 굴 같은 것이라도 찾아야 할까요?”
할렌이 물었다.
“글쎄.”
굴이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천 명의 병사가 들어갈 수 있는 굴이 있을까?
“계속 간다.”
“괜찮겠습니까?”
“인간은 생각보다 강해. 며칠 잠 좀 설쳤다고 해서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한 상황도 몇 번이나 해쳐 나왔다. 말 위에서 잔 적도 있었고, 심지어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적의 목을 가른 적도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물론 그런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리 큰일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방도를 찾긴 찾아야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은’ 큰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며칠만 더 이어지면, 그때는 분명 ‘큰일’이다.
‘답답하군.’
담담한 척하지만, 군터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짜증 났다. 병사들을 몰고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괴물과 지승들을 도륙하고 싶지는 그럴 수는 없었다. 흩어져 있는 놈들을 하나하나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하늘을 나는 것들이나 땅속에 숨어있는 것들은 손을 댈 수조차 없으니.
그래도 내색은 할 수 없다. 피로에 찌든 병사들이 믿고 있는 것은 둘이다.
하나는 상급 장교들까지 알고 있는, 봉인지에 대한 비밀. 병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윗분들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믿는 구석’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리고 병사들이 믿고 있는 또 하나.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있는, 매 전투마다 가장 앞서나가 괴물들을 도륙하는 그들의 지휘관이다.
그러므로 군터는 마음대로 감정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든 위협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대해야 했다.
무겁다. 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 * *
수천 명 중 눈 밑에 그늘 없는 자 없었고, 행군하며 규칙적으로 고개를 까딱이지 않는 자 또한 없었다.
퀘에에엑!
“찔러!”
병사들은 피로해지는 만큼, 점점 악에 받쳤다. 그들은 더이상 괴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어느 때나 휴식을 취했으며, 그 짧은 휴식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맹렬히 증오를 드러냈다. 심지어 그러다가 죽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체로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예상하셨습니까?”
아드리안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헤루스를 떠나기 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아니.”
정말이다. 군터는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한계까지 몰린 인간의 발악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발악일 뿐.’
이렇게 끝까지 갈 수는 없다. 육신의 피로가 정도 이상으로 쌓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신경질마저도 부리지 못하게 될 터. 그렇게 되기 전에 뭔가 수를 내야 한다.
“장군! 반나절 거리 앞에 협곡이 보입니다!”
‘협곡이라.’
같은 생각을 했을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애덤 모라크가 군터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되더냐.”
“끝까지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상당히 긴 것 같습니다. 또 높이도 꽤나 높아 고개를 꺾어도 꼭대기를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정도면 상당한 크기다.
“병사들이 쉬기에 안성맞춤이군.”
“다행입니다.”
그 협곡이 휴식처가 될 수 있을지는 직접 가서 확인을 해봐야 알 수 있을 테지만, 일단 정찰병들의 말만 듣고 보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가서 확인하지.”
어차피 협곡을 지나는 것이 봉인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직접 보고서 괜찮다면 하루 정도 쉬었다 가고, 아니다 싶으면 길을 재촉하면 된다.
“빌어먹을. 소름끼치는구만.”
팔뚝만 한 길이의 풀이 스멀스멀 발을 휘감는다. 덩굴이 주변에 엉겨 붙는 것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이 풀은 덩굴이 아니고, 덩굴이 그러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저주받은 것이 아닐까.’
처음 ‘저주’를 입에 담았던 자는 재수 없게 바로 근처를 지나던 장교에 의해 즉각 목이 달아났다. 그 뒤로 누구도 저주라느니, 정령이라느니 하는 불길한 말을 입 밖에 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땅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아가리를 활짝 벌린 채로, 자신들이 입속에 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끝난다고 한들, 이 땅에 다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군터는 할렌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렌에 사람이 살 수 있을지 어떨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때 이곳이 인근 주들을 먹여 살리다시피 한 곡창지대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뿐. 이곳의 미래 따위는 지금 전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글쎄. 네 생각은 어떠냐.”
“처음 주 경계를 넘어 들어온 이후로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들끓는 괴물들을 보면,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사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더라도…이 땅이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족히 수십 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수십 년이라…….”
야스메티가 싫어할 만한 이야기지만, 그럴듯했다. 혹자는 너무 과한 생각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렌에 와서 직접 ‘재앙’을 목격한 그의 입장에서는 할렌이 말한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신빙성 있게 들렸다.
“수십 년이라고 하지만, 그 수십 년이 이십 년이 될지 구십 년이 될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예? 아, 그렇지요.”
“이 땅에서 살아갈 자들에게 달린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야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 저기 보이는군요.”
당연하지만, 군터는 할렌이 보기 한참 전부터 전방의 협곡을 발견했었다. 확실히 정찰병들이 보고했던 것처럼 협곡의 규모는 상당했다. 입구부터 꽤 넓었으며, 양옆으로 높이도 상당했다.
“괜찮군.”
협곡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변 병사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드디어 하루를 편히 쉬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장군. 그럼 이곳에 야영지를 세워도 되겠습니까?”
“아니. 야영지는 조금 더 들어가서 세운다. 그리고…….”
군터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제껏 지나온 너른 평야가 노을에 물들어 짙은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불을 놓는다.”
“예?”
“북풍이다. 불을 피워도 연기에 괴로울 일은 없겠지.”
“그것이 아니오라…불은 어째서?”
“뒤쫓아 오는 놈들이 있지 않겠느냐. 그놈들을 위협할 수도 있고, 불이 넓게 퍼지면 연기도 자욱하게 피어날 테니, 밤사이에 방해받는 일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겠지.”
“아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곡식이 자라던 축복받은 땅이었을 터.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저 아름다운 황금빛 초지에 불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태워라!”
“기름을 뿌려! 한곳에 뭉쳐서 뿌리지 말고 넓게 넓게 뿌려라!”
“부지런히 불을 놔라! 저 너머에 숨어있을 괴물 새끼들이 다 타죽을 수 있도록!”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흩어져서 불을 놓기 시작하니 삽시간에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다. 그 거대한 불은 북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황금빛 평야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물러나!”
“타죽고 싶으냐?! 불에서 멀리 떨어져라! 빨리!”
불을 놓은 병사들이 허둥거리며 물러나는 동안, 군터는 붉게 변한 평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시뻘건 불길 너머. 그의 초인적인 시력이 아니라면 눈에 담지도 못할 먼 곳.
[카아아아아아―!]
사나운 비명이 들렸다. 어떤 거대한 형체가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펄럭거리는 한 쌍의 흐릿한 형태 때문에, 군터는 그것이 새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괴조라고 했던가.’
건물보다도 더 큰 괴물 새를 보았다 했다. 렌에 들어선 뒤로 충분히 괴물이라 할 수 있을 거대한 새들을 많이 보았지만, 지금 저 멀리 보이는 ‘괴조’만한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너무 멀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저 괴조의 몸은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환영처럼.
평범한 괴물이 아니다. 솔롬에서 저것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들었을 때부터 그리 생각했었다.
‘저것이 이 땅에 봉인 당했다던 신인가?’
확실치는 않다.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지만, 설령 가까이서 본다고 한들…….
“장군.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다.”
군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저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흐릿하게 들리는 비명에 담긴 악의를 생각하면, 저것은 분명 언제고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저 괴물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때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