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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12화 (612/1,064)

612화

“크아악!”

끔찍한 고통. 할렌은 그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검을 꽂아 넣었다. 괴물의 주둥이는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찌른 칼은 괴물의 주둥이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키에에에에!

괴물이 몸부림쳤다. 극렬한 몸부림 속에서, 할렌은 피투성이가 된 팔을 가까스로 빼내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기랄.’

격렬한 전투로 무뎌졌지만, 그럼에도 왼팔의 타는 듯한 고통은 뚜렷이 느껴졌다. 단단한 건틀릿은 여기저기가 우그러져 있었다. 군데군데 피가 번져 나오기도 하는 것이, 아무래도 괴물의 지저분한 이빨이 꽤 깊숙이 파고든 듯했다.

“후욱!”

그러나 상처를 살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날려야 했다. 늑대 괴물이 호랑이처럼 앞발을 휘둘러 온 것이다.

숨 돌릴 틈조차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할렌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본능, 쌓아온 경험이 그에게 어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는 여기서 뒤로 물러나 봐야 저 흉악한 발톱을 피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며, 어찌어찌 피한다 해도 곧바로 위기에 몰릴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물러나는 대신 앞으로 달려나갔다. 늑대 괴물의 발톱을 피해 땅을 구르고, 칼로 괴물의 다리를 그었다.

‘들어갔다.’

제대로 힘을 주지는 못했지만 예리한 칼날은 확실히 괴물의 피륙을 베었다. 다시 하라면 못할,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

크아아아!

늑대 괴물이 비명, 아니 분노에 찬 울음을 터뜨린다.

‘약아빠진 놈.’

족제비를 닮은 괴물이 먼저 달려들고 피를 볼 동안, 이놈은 계속 뒤에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게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모른다. 달려드는 괴물을 상대하면서도 항상 놈을 예의주시해야 했다. 놈이 언제 치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크르릉!

하지만 한 번 살짝 베인 후, 놈은 열이 받았는지 전처럼 뒤로 빠져있지 않았다. 오히려 족제비 괴물보다도 더 열을 내며 덤벼들었다. 무척이나 위협적이었지만 할렌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쿵!

제대로 눈이 뒤집혔는지, 놈은 앞만 보고 달려들다가 다른 쪽에서 오던 족제비 괴물과 부딪쳤다. 그러자 놈은 신경질적으로 족제비 괴물을 밀쳐냈다.

“후우…후우…….”

상황이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할렌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왼쪽 손은 여전히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한 손으로 든 검은 점점 무거워졌다. 거기에 땅속으로 모습을 감춘 놈들까지.

‘여기까진가.’

약한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뜸해질수록,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를 먹은 건가.’

약해졌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독기를 품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쾅!

피하지 못했다. 할렌은 가까스로 검을 세워 막아냈으나 속이 뒤집히는 충격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숨이 막혀 땅을 구르면서도 연신 컥컥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있으신데, 슬슬 일선의 일에서는 손을 떼셔도 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자식놈들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때는 내 나이가 몇이나 됐다고 벌써 그런 소리를 하냐며 호통을 쳤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으음…….”

젊었을 적, 아니 어렸을 적부터 전장을 전전했다. 전장에서 거칠게 보낸 세월은 평온하게 보낸 세월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하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몸은 아무리 단련을 쉬지 않았다 한들 멀쩡할 수 없다. 비가 오면 몸이 무거워지고, 바람이 불면 이따금 뼈가 시리다.

마음 같아서는 오십이 되어도 전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버티는 정도라면 가능하겠지만,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짐이 될 바에야 스스로 말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아직은 아니다.’

족제비 괴물이 정면에서 달려온다. 그러나 할렌의 시선은 놈을 향하지 않았다.

‘성질 급한 놈이 먼저 죽는 건 괴물이나 인간이나 다르지 않구만.’

히히힝!

괴물이 내는 괴성에 비하면 자그마한 소리일 텐데, 어찌 그 소리가 그리도 크게 들리는지. 할렌은 피식 웃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 괴물의 날카로운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커다란 몸뚱이가 바람맞은 낙엽처럼 힘없이 날아가는 모습은 상당히 비현실적이었다.

“병사들이 낙오하지 않도록 하라 했는데, 네놈이 낙오를 해버리면 어쩌자는 것이냐.”

“면목 없습니다.”

평소에는 목에 닿은 칼처럼 두렵던 꾸지람마저도 반갑다.

“말에 타라.”

“예.”

두려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샘솟는다.

* * *

기병 돌격은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오십이 넘는 기병이 죽었고, 그와 비슷한 수의 병사들이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군터는 그가 괴물들을 조금 얕보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대단하십니다 장군.”

애덤 모라크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군터는 멀끔한 그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널브러진 수십의 인마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안일했었다. 입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입었어.”

“피해 없이 넘길 수 있는 전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옳은 말이지만, 자만하지 않았다면 더 쉽게 끝낼 수 있는 전투였다.

‘실수다.’

언젠가부터 그는 그의 기감을 상당히 신뢰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에 있는 적들마저 감지하는 감각을 어찌 중히 쓰지 않을 수 있겠나. 군터는 기감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인 이후, 기습에는 면역이 되었다고 자부했었다. 바로 이번 전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기감에 걸리지 않을 줄이야.’

땅밑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오는 괴물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놈들이 있다 한들, 어차피 그의 기감에 걸려든다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일했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병사들을 잃었고, 할렌마저 잃을 뻔했다.

‘여기서부터는 미지로군.’

답답하지만 동시에 흥미롭다. 오랜만에 느끼는 제대로 된 긴장감이 뒷덜미를 간지럽힌다.

“피해는?”

“사상자가 육백이 조금 넘습니다. 그중에 사망자가 반 정도입니다.”

무난하다. 첫 교전에서부터 이런 피해를 입은 것이 짜증나기는 하지만, 몰려온 적의 규모를 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게 시작이겠지.”

“그럴 것입니다.”

“확실히, 가혹한 땅이로군. 이 땅의 동물들은 다 저렇게 변한 건가?”

“다…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상당수가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군터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평온했다. 아래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바로 움직인다.”

“수습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있나?”

“…….”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병사들뿐 아니라 괴물들의 피 냄새도 벌써 멀리까지 퍼졌을 터. 이곳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병들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실수했나.’

애덤 모라크는 군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조금 감상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치가 떨리는 괴물들을 더 강한 힘으로 시원하게 쓸어버리고 나니 잠깐 과한 여유를 부렸다.

“땅밑에서도, 하늘에서도 위협이 다가올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없겠군.”

“그 말씀대로입니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과는 다릅니다. 놈들은 밤낮의 구분 없이 언제라도 쳐들어옵니다. 이번처럼 대규모로 몰려오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만, 규모가 작아도 대응해야 하는 것은 같지요. 군대의 피로가 점점 쌓이게 될 겁니다.”

“덤벼오는 대로 다 상대해줄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빨리 봉인지까지 가야 해.”

그들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싸움은 속도전이라는 것을.

그러나 답답한 건, 어떻게든 봉인지까지 간다고 한들, 불확실한 것은 그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신주의 봉인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것뿐. 그 이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말 최악의 경우, 봉인지에 당도하고도 손을 쓰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야 할 수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아니. 비관적인 가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덤 모라크는 불안한 상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여전히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돌아서는 군터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 * *

“팔은 좀 어떠십니까.”

“이거 말인가? 당연히 아프지.”

“그…….”

“그래도 움직일 만은 해. 잘라낼 필요는 없을 거라더군.”

“다행입니다.”

할렌은 안도하는 수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 말처럼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상을 입을 당시에는 꽤 고통이 심해서 조금 걱정이 됐었지만 건틀릿이 우그러져 살을 쓸었을 뿐,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그것들이 평범한 짐승들이었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렌 전체로 따지면 그런 것들이 수천,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데…정말 끔찍하구만.”

“그 봉인지인가 하는 곳에 가기면 하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겠지요?”

“그렇기를 바라야지.”

할렌은 수하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불안은 비단 그 하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럴 수밖에.’

수하들은 겁쟁이가 아니다. 그건 그들과 최소 몇 년을 함께 한 할렌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움츠러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이 이제껏 겪었던 그 어떤 전장과도 달랐다.

‘여긴 이상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곳은…너무나 이질적이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눈에 보이는 맑은 하늘이며 녹음이 우거진 풍경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들을 노리는 위협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부터는 끔찍해도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다.

‘폭풍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그 흔한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들린다면.

꿔어어억―!

“빌어먹을, 또 온다!”

이런 날개 달린 괴물들의 괴성뿐.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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