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뭉쳐라! 벽을 만들어! 창병 앞으로!”
대응은 신속했다. 이미 이 괴물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던 타이던의 병사들은 내심이야 어떻든 간에 주어진 내려온 명령대로 착실히 움직였다.
‘확실히…저 정도면 기병이 제힘을 발휘하기는 어렵겠군.’
이곳에 오기 전, 애덤 모라크에게 들었던 조언대로다.
기병, 정확히 말하면 중기병의 강점은 돌파력이다. 육중하고 강력한 돌격으로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 제국의 기병 전술. 그러나 저 괴물들은, 대부분이 다 자란 소 이상의 덩치였다. 그것도 네 발로 움직이는 것들이 그렇다는 것이고, 두 발로 움직이는…괴상한 외형의 괴물들은 체고가 어지간한 전마 이상이었다. 그런 것들이 적으면 수십, 많게는 백 이상 뭉쳐 있으니 저기에 기병 돌격을 해봐야 재미를 보기는 힘들 듯했다.
‘놈들의 인내심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으니, 견고한 방진을 구축해 최대한 버티면서 놈들의 힘을 빼놓는 겁니다. 병사 한 명에게 긴 창을 들리고, 방패와 짧은 검을 든 두 명을 양옆에 붙이는 거지요. 수천의 병사가 하나가 되어 뭉친다면 괴물 놈들은 쉽사리 아군을 넘볼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경험자의 말이니 일단은 존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행히,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애덤 모라크의 판단은 옳았다.
몰려드는 괴물들은 강했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인간 병사들은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놈들에게는 아군과 협력하여 싸울 만큼의 지능이 없었다. 걸리적거린다 싶으면 같은 편에게도 발톱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그러니 놈들에게 아무리 강한 힘과 몸뚱이가 있다 한들 3인 1조로, 그것도 버티기를 우선하는 병사들을 단번에 어찌할 수는 없었다.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병사가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즉시 개진(開陣)하라.”
“예!”
테론 가바예크와 수십의 술사들은 물론 신주의 봉인지에서 활약할 테지만, 전장에서도 그들이 할 일은 많다. 특히, 이런 괴물들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힘은 빛을 발할 터.
쿠궁!
병사가 명령을 전하러 달려가고 얼마 되지 않아, 귀에는 들리지 않는 충격음이 거세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양의 기가 군중 한복판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부족하다. 조금만 더.”
기가 응집한 곳. 거기에는 테론 가바예크와 술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원진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앉은 자리는 물론이고 원진 내부에는 수백 수천 개의 선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거의 다 됐소!”
테론 가바예크는 그 중심에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수십 명의 술사들이 이끌어낸 기의 물결은 그가 꿇어앉은 자리를 향해 움직였다.
“됐다.”
그가 눈을 뜨며, 두 손으로 쥔 커다란 구슬을 들어 올렸다.
“깨어나라.”
사람 머리만 한 구슬 속에서 새빨간 불길이 넘실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자그맣게 불씨가 튀는 것 같던 불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다.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구슬 전체가 타오르듯 붉게 빛났다.
“신이한 불의 뱀이여.”
구슬이 발하는 빛이 점점 더 강해지는가 싶더니, 곧 구슬 속에서 가느다란 붉은 선이 흘러나왔다. 처음에 그것은 실인가 싶을 정도로 가늘었지만, 구슬 속의 불씨가 그러했듯, 곧 무섭게 덩치를 불렸다. 실인 줄 알았던 것이 끈이 되고, 끈인 줄 알았던 것이 뱀이 되었다. 그리고 뱀인 줄 알았던 것은, 도저히 뱀이라 보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화르륵!
대체적인 모습은 뱀을 닮았으나, 구체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불의 뱀은 끝없이 타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불 그 자체였다.
“내 손끝을 따라 춤춰라.”
테론 가바예크가 타오르는 구슬을 한쪽으로 쭉 내밀었다. 괴물들이 한창 몰려드는 방향이었다.
* * *
“오오! 훌륭하군!”
할렌이 크게 감탄하여 외쳤다. 곁에 있던 그의 수하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거대한 불의 뱀이 괴물들의 틈을 파고든다. 처음에 괴물들은 극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곧 자신들의 이빨과 발톱이 불의 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으며, 뱀의 몸에서 불꽃이 옮겨붙기까지 하자 기겁하여 달아나기 바빴다.
“놀랍군. 저런 것을 부릴 수 있다면 괴물이 몇 마리나 되든 걱정할 필요 없겠어.”
물론 할렌도 알고 있었다. 저런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없을 리 없다는 것을. 당장 저것을 불러내기 위해 술사들은 수백의 병사들로 하여 자신들을 호위하게 했고, 소환하는 데 시간도 적잖이 걸렸다. 거기에, 저 불의 뱀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불의 뱀이 날뛰어준 덕에, 한데 뭉쳐 있던 괴물들이 흩어졌다.
“기병대!”
역시나, 그의 상관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백의 기병이 앞으로 움직였다. 할렌은 빠르게 선봉 쪽으로 이동했다.
“장군.”
“뭐가 더 있을지 모른다. 앞만 보지 마라. 여차하면 산개한다.”
“예.”
군터뿐 아니라 할렌 역시 애덤 모라크에게서 렌의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애덤 모라크의 말에 의하면, 괴물들은 땅 위에만 있지 않다. 땅 밑에도 있고, 심지어 하늘에도 있다. 렌에 들어선 순간부터 밤낮으로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였다.
‘땅굴을 파는 놈들까지 있다고 했던가.’
도대체 어떤 놈들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돌격!”
생각은 길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앞서가는 상관의 등을 보며 말을 달렸다.
* * *
푹!
짧게 찌른 창. 괴물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짤막하게 귀에 꽂힌다. 군터는 대수롭지 않게 창을 회수하며 곧바로 휘돌렸다. 도약하여 달려들던 들개 같은 괴물이 아가리가 잘려 튕겨 나갔다.
‘그리 어렵지는 않군.’
덤벼드는 괴물 너덧 마리를 해치운 뒤에 군터가 한 생각이었다. 괴물들은, 발산하는 거친 기세와는 달리 그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바르바피들에 비하자면 시시하기까지 한 수준.
‘음?’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휘두르던 순간. 군터는 전면의 지면이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했다. 그가 황급히 고삐를 당기며 말의 배를 찼다. 흥분한 전마가 높이 뛰어올랐다.
퍼석!
땅이 갈라지며 흉측한 외형의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지렁이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형태. 머리, 혹은 입으로 추측되는 부위가 세 갈래로 갈라져 흙인지 타액인지 모를 것을 토해냈다.
“뭐, 뭐야!”
군터는 기민하게 반응하여 피했지만, 그의 뒤를 따라오던 병사 중 몇몇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갈라진 땅에 걸려 낙마하거나 속도를 잃은 채 휘청거렸고, 그 순간 괴물들의 표적이 되었다.
콰악!
괴물들은 뱀을 닮았지만, 그 크기는 ‘괴물’이라는 표현에 걸맞을 정도로 컸다. 세 갈래로 갈라진 아가리가 말의 다리를 물었고, 말들은 달아나지 못했다.
“으아악!”
말이 달아나지 못하니 그 위에 탄 사람 역시 마찬가지. 병사들은 재빨리 무기를 들고 저항하려 했지만 괴물들이 여기저기서 지면을 뚫고 나타나니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땅을 뚫고 나온 괴물들을 피하지 못한 몇몇. 그중 하나가 할렌이었다. 괴물들이 움직인 그 순간, 몸을 틀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느라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한들, 결국 구질구질한 변명일 뿐이다. 괴물이 코앞에서 흉측한 아가리를 벌리며 튀어나왔을 때, 그는 분명 반응했다. 다만 머리로 반응한 것을 몸이 따라가지 못했을 뿐. 젊었을 적이었다면 어떻게든 대응했을 테지만…나이를 먹고 조금은 둔해진 몸뚱이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미세한 차이가 생사를 가를 때가 왕왕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카륵!
“흡!”
욱신거리는 몸을 재빨리 옆으로 날렸다. 세 갈래로 찢어진 괴물의 아가리가 그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흉측하기 짝이 없군.’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다. 당연히 별의별 못 볼 꼴을 다 봤다. 심지어 인간이 아닌 것들도 여럿 상대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런 기괴한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보는 순간 혐오감이 드는 끔찍한 몰골.
‘빠르지만…날카롭지는 않아.’
변칙적인 움직임이 까다롭기는 해도, 상대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카르르르!
상대해야 할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아악!”
그새 한 명이 당했다. 고개를 돌려서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아는 병사다. 함께한 세월이 짧아도 몇 년인데 목소리 하나 외우지 못했겠는가.
‘빌어먹을!’
비명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괴물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족제비를 닮은 괴물, 늑대를 닮은 괴물. 하나같이 위협적이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다시 땅속으로 숨어버린 세 갈래 주둥이의 괴물이다.
‘너희 같은 것들에게 잡아먹히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 아니다.’
절망스러운 상황.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힘든 상황일수록 더 거세게 발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커헝!
족제비를 닮은 주제에 사자처럼 울부짖는 괴물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두꺼운 목이지만 칼날은 쉽게 파고들었다. 평소 꾸준히 날을 관리한 보람이 있었다.
“훅!”
해냈다는 성취감은 느낄 새도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몸을 찢기 전에 재빨리 빠져나갔다. 괴물의 피가 묻은 칼날 끝이 붉게 물들었다.
카아아악!
한 방 먹였지만, 그걸로 끝을 내지는 못했다. 깊게 찔렀다면 숨통을 끊을 수 있었지만, 그러면 제때 칼을 뽑지 못했을 터. 그랬다면 늑대를 닮은 괴물에게 몸이 찢어졌겠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뜩 성이 난 괴물들을 주시했다. 목에서 피를 흘리는 족제비 괴물은 말할 것도 없고, 허탕을 친 늑대 괴물 역시 뿔이 난 듯했다.
‘어디지? 기회를 노리고 있나?’
그러나 눈으로 그것들을 보면서도 할렌의 신경은 땅속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제 불쑥 튀어나와 그 흉측한 아가리를 들이밀지 모를 괴물에게.
크앙!
분노한 족제비 괴물이 다시 달려들었다. 할렌은 차분히 검을 늘어뜨리고 기다렸다. 낙마하면서 창을 놓친 것이 후회스러웠다. 거리를 더 벌릴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을.
‘크게 한 걸음. 가볍게 치고 바로 빠진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그림 하나를 그렸다. 상처 입지 않고 괴물을 상대하는 방법. 그대로만 움직인다면 실패할 리는 없다.
‘지금!’
계산한 거리에 괴물이 들어섰을 때. 할렌은 미리 그려놓은 한 걸음을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퍼석!
흙이 튀며 거뭇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그것도.
‘둘?!’
할렌이 기겁하며 몸을 돌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족제비 괴물보다, 양옆에서 나타난 두 마리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카앙!
우측에서 나타난 괴물. 몸을 던지듯 부딪쳐 오는 놈을 비스듬히 기울인 검면으로 흘려냈다. 다만 충격을 이기지는 못해, 몸이 살짝 떠서 뒤로 밀려났다.
“이익!”
활짝 열린 세 갈래 주둥이. 할렌은 고약한 냄새를 느낄 틈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비록 제대로 힘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묵직한 건틀릿에 싸인 주먹이다. 적어도 약간의 충격 정도는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을까.
콰직!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