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그 웅혼한 울림이 병사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렇게 믿고 싶군.’
애덤 모라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솔롬의 병사들도 긴장하는 표정이었지만 타이던의, 정확히는 그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타이던의 병사들은 긴장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을 넘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들을 닦달하는 장교들조차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뿐, 위축된 본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심란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당장 애덤 모라크 그 자신도 두려움을 억누르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렌에서 겪은 일들은 끔찍했다. 그 어떤 악몽도 감히 비할 수 없을 만큼.
“장군. 본인의 역할을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최선을 다할 것이니 걱정 말게.”
“물론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노파심에서 드린 말씀이니, 기분 상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긁을 대로 긁고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나름대로 이쪽을 신경 쓰는 티를 내지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드리안이라고 했나.’
전형적인 무부다. 별로 자중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거친 기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때문에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다만, 조금 전에 한 말만 봐도 감시자의 역할로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자인 듯했다. 말에 거침이 없고, 남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함이 부족…아니, 그럴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놈인지, 아니면 일부러 나를 자극할 생각인 것인지…….’
사실 후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신을 자극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겠는가. 반발하게 해서 정당하게 처벌한 다음에 군의 통제권을 자연스럽게 손에 넣으려고? 군터 크렘보르는 굳이 그런 번거로운 수작을 부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타이던의 군대를 장악할 수 있는 자다.
명분이건 실력이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애덤 모라크는 자신이 휘하 병사들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지휘관이었다고 자부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따를만한 지휘관이었냐고 묻는다면…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정당한 권위를 지닌 자신에게 복종했지만, 충성하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 역시 마찬가지.
테리브란 조정은 이제 타이던의 군대를 군터 크렘보르에게 맡겼다. 그러니 현 지휘과 전 지휘관 사이에 분란이 벌어진다면 병사들이 누구를 따를지는 자명하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배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잡스러운 짓을 벌일 리 없다.
‘어쨌거나, 불편한 동행인이로군.’
어차피 얼굴을 본 지 며칠 되지도 않은 패장에게 5천이나 되는 병력의 전권을 맡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감시자가 붙을 것도 예상했었다. 다만 그 감시자가 이런 놈일 줄은 몰랐을 뿐.
“병사들을 통제해라.”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고, 해야 할 일은 일. 애덤 모라크는 곧바로 휘하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감정은 전염된다. 병사들 하나하나가 가진 두려움은 그들을 움직이게 할 정도는 되지 못하나, 그 각자의 감정들이 서로에게 전염되어 덩치를 불리면 자칫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애덤 모라크는 그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능숙해. 꽤 괜찮군.’
옆에서 그가 지시를 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군터가 애덤 모라크를 지휘관에 앉혔는지, 이제 조금 이해가 갔다. 그는 병사들은 몰라도, 휘하 장교들에게서 지지를 받고 있다. 조금 전의 명령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짤막한 지시와 약간의 지체도 없이 움직이는 수하들. 그건 분명 상관에 대한 굳건한 믿음 없이는 나오기 힘든 모습이었다.
* * *
“저 들판을 지나면 그때부터 렌입니다.”
“…….”
군터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렌의 하늘은 헤루스의 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푸르렀고, 흰 구름이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핀다면 한 가지, 다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렌의 하늘과 헤루스의 하늘의 차이.
‘보이지 않는군.’
렌의 하늘에는, 헤루스의 하늘에서는 볼 수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새라든지, 날벌레 같은 것들이.
‘마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주받은 땅이라…….’
들판을 지나면 그때부터 렌이라고 했지만, 틀렸다.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들끓고 있다.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부터, 저 드높은 하늘까지.
“기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상은 기감이 발달한 술사들이 먼저 눈치챘다. 7천의 인원 중 술사의 수는 오십여 명. 어찌 보면 이번 일에서는 그들이 7천 병사보다도 더 중요했다. 신주의 봉인은 술법적인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으니, 그 봉인에 이상이 생겼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데도 역시 술법적인 힘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기가 요동치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십여 명의 술사들을 대표하는 것은 테리브란에서 온 중년의 술사였다. 본래 평민이었으나 술법 실력을 인정받아 귀족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름은 테론 가바예크라고 했다. 신주까지의 길을 여는 것이 군터의 몫이라면, 신주의 일을 직접 처리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본래 잔 안에 든 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연의 기가 그렇습니다. 쉴 새 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이 일정하여 안정되어 있지요. 혹자는 그것을 이치라고도 부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며 당연한 것이지요. 헌데 지금, 저 땅의 이치는 자연스럽지 않게 깨져 있습니다.”
설명하는 본인부터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한 것처럼.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만…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군요. 확실히 신주의 봉인에 이상이, 그것도 큰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아니고서는 자연의 기가 이렇게까지 흔들리 수는 없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군터는 무인이지만 동시에 술사였다. 물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닌 사기를 이용한 사령술 뿐이며 그마저도 종류가 제한적이었지만, 어쨌든 술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술법은 물론이고, 세상의 신비에 대한 지식도 얕게나마 공부했었다. 언젠가 쓰일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모페이브의 조언을 따라서.
그때 배운 얕은 지식에 따르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정령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자연의 축이라는 점에서는 둘이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그 존재감에서는 비할 수 없다. 고양이와 사자가 같지 않은 것처럼.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모페이브를 통해 배운 지식이다. 모페이브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닌 만큼,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분명 있을 터였다. 특히 신과 정령 같은 난해한 것들에 대한 것은 아직도 상당수가 미지로 남아 있는 만큼, 모페이브가 잘못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군터는 모페이브를 통해 얻은 지식을 참고는 하되, 맹신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으면 될 터.’
곧 렌에 들어섰지만 군의 움직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신주의 봉인지를 향해 똑바로 이동했다.
렌에 들어선 첫날. 우려와는 달리 별일은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평온하다 못해 지루할 지경이었으나, 누구 하나 마음을 놓는 이는 없었다. 이 평온한 하루가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지켜보고 있다.’
그들이 느낀 것이 막연한 불안이었다면, 군터는 그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경계하고 있나. 아니면 틈을 보고 있는 건가.’
7천이나 되는 대병력이라서일까? 아니. 이보다는 적어도 애덤 모라크가 이끌던 수천의 병력에도 거리낌 없이 달려들던 놈들이다. 그런 것들이 단순히 수가 많다고 몸을 사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겠지.’
적의가 느껴진다. 경계심도 느껴진다. 또한, 이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묘하게 몸이 굳는 느낌이 들었다. 군터는 이 땅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확실해. 봉인은 깨졌다.’
동류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를 잔뜩 담아서.
‘얼마나 더 참을 수 있겠느냐.’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놈이 들개라면 놈의 이빨 사이에는 이미 침이 질질 흐르고 있으리라.
“할렌.”
“예.”
“불침번을 두 배로 늘려라.”
“알겠습니다.”
의문은 없었다. 할렌은 명령을 받은 즉시 움직였다. 졸지에 예정에도 없던 불침번을 서게 된 병사들이 속으로 불만을 삭였다. 그런 그들의 불만은 조용히 새벽이 깊어갈 즈음 절정에 달았다. 하지만.
크아아아아아아―!
쥐죽은 듯 조용한 새벽 공기를 쩌렁쩌렁한 포효가 울렸을 때. 그들은 품고 있던 불만을 깨끗이 잊을 수밖에, 그리고 목청껏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적이다!”
* * *
익숙한 듯이 ‘적’이라고 외쳤으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이제껏 겪어온 ‘적’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크허엉!
대부분은 짐승의 형태였다. 하지만 하나 같이 평범한 짐승이 아니라, 어딘가 뒤틀린 것 같은 외관의 괴물들이었다. 머리가 하나 더 달렸다든가, 몸집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다든가, 다른 육체적 특징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뭉쳐서 상대하라!”
괴물들의 수는 족히 수백, 아니 천이 넘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각기 다른 포효가 들려왔다. 어두컴컴한 밤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이 살의를 듬뿍 담고 수천의 인간을 노려보았다.
“주의해야 합니다. 놈들은 사납지만 어리석지 않습니다. 분명 조직적으로…….”
“설명은 필요 없다. 나도 보고 있으니까.”
군터는 애덤 모라크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는 괴물들을 살폈다.
‘우두머리는…없는 건가.’
괴물들은 확실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어디까지나, ‘짐승’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덤벼들고는 있되 결판을 내자는 식으로 덤벼드는 게 아니라, 가볍게 공격을 하면서 틈을 노리고 있었다. 괴물들을 통제하는 우두머리가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
하지만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우두머리가 없거나, 있어도 그의 눈과 기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뜻.
‘별 수 없군.’
군터는 창을 들고 말에 올랐다.
“따르라!”
짤막한 한 마디에 그의 그림자와 같은 친위대가 곧바로 뒤를 따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