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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9화 (609/1,064)

609화

“그래서, 지금 렌의 상황은 어떤가.”

“혼란스럽다, 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곳곳에서 괴이한 것들이 들끓고 있으며, 땅은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인간이 살기 힘들게 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멀쩡했던 강물은 독이 스며든 것처럼 변해 마실 수 없게 되었고, 단단하던 땅이 늪지대가 되어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게 변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달라지고 있을 것입니다.”

“…….”

“거기에, 온갖 괴물들이 눈이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인간을 사냥합니다. 사냥당한 인간의 시체는 사기를 머금고 밤을 배회하지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렌은, 말 그대로 마경입니다.”

힘 있던 목소리가 점점 흔들렸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군터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던 첫인상에 의구심이 들 만큼, 애덤 모라크는 크게 동요했다. 군터는 그런 그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아직 렌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다. 그곳의 끔찍함을 모르는 이상, 그곳에서 악전고투를 펼쳤을 사내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빌리치 아조프가 군대를 이끌고 움직였다 들었는데? 그는 어찌 됐나?”

“아조프 장군은…신주의 봉인지로 향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소식이 끊겼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표현일 뿐,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죽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죽은 건가.’

군터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친우라고 해도 좋을 사내가 죽었다. 그 죽음은 언제나 그렇듯 허망했다. 그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

슬프지는 않았다. 약간의 씁쓸함과, 그보다도 미미한 상실감. 그게 전부였다. 아주 잠깐, 잔뜩 취해 붉어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던 한 사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그렇겠지요.”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그 신주라는 것의 봉인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면 되는 건가?”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 것입니다. 허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애덤 모라크는 말을 아꼈다.

이미 한 번 군대가 움직였고, 실패했다. 그 사이에 렌의 상황은 더 악화 되었으니, 지금 렌으로 발을 디딘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고, 그가 대단한 무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고작 이천. 그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지.’

물론 이천이 전부는 아니다. 현재 타이던에 주둔하고 있는 8천 병력에, 인근에 흩어져서 주 경계를 지키고 있는 육천 여의 병력. 만약 군터 크렘보르가 명한다면 그 모든 병력이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병력이 많다고 능사가 아니다. 그 땅에 창궐하는 재앙과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어.’

이건 렌에서 직접 재앙의 실체를 목격한 그가 내린 판단이었다. 병력이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다. 더 큰 집이 더 많은 비를 맞듯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들어갈 경우 더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재앙의 근원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많은 병력은 많은 부담이나 마찬가지.

‘어차피 판단은 그의 몫이다.’

이유야 어쨌든, 렌에서 퇴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참작은 되겠지만, 그렇다 해도 조정의 문책은 피할 수 없다. 일찍 2황자의 잔당을 처리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린 것은, 그러다가 결국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발을 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공으로 과를 씻는 수밖에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 남은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앞으로 출셋길은 막히는 거나 다름없다. 가문의 후원이 있다 하더라도, 이만한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는 어렵다.

공을 세워야 한다. 그 마음은 더없이 절실하다. 하지만,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 마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두려움이 치밀었다.

‘이자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한심하지만, 군터 크렘보르. 이 사내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최선을 다해 그의 성공을 돕고, 그 활약을 인정받아 죄를 씻는 것만이 미래를 잃지 않을 유일한 방도다. 조언이 필요하다면 조언을, 지원이 필요하다면 지원을, 그의 밑에서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역시 물러서지 않고 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자가 어떤 자인지 알아봐야겠지.’

이런저런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그런 믿을 수 없는 것에 기대기보다는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낫다.

‘범상치 않은 자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만.’

소문도 그렇고, 직접 눈앞에서 본 인상도 그렇고, 용맹 하나만큼은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용맹하기만 한 얼간이라면 곤란하다. 그래서는 희망이 없다.

‘그대가 소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단한 자이기만을 바랄 뿐이오.’

답답한 마음을 숨기며, 애덤 모라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 * *

“병사들을 쉬게 해라.”

군터는 우선 지금까지 잔뜩 고생한 병사들부터 쉬게 했다. 타이던에는 8천의 병력이 있었고, 인근의 병력까지 규합하면 2천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터는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더라도 결국 그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그가 이끌고 온 솔롬의 병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솔롬의 병력은 중요하다. 그들이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병사가 있어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사흘 정도, 넉넉하게 휴식을 취한다.”

“괜찮겠습니까?”

할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껏 서둘러 온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사흘씩이나 끌 필요가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렌의 상황이 당초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것 같다. 병력을 움직이기 전에 정찰대를 먼저 보내서 상황을 살펴야겠다. 그동안에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거다.”

할렌이 군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병력은 아군의 네 배입니다. 손발을 맞추려면 간단한 훈련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섞어서 운용할 생각은 없다. 타이던의 병력과 솔롬의 병력은 따로 움직일 것이다.”

“예? 그래도 괜찮을지…….”

“며칠 정도 훈련한다고 맞지 않는 손발이 맞겠느냐. 억지로 맞춰 봐야 실전에 들어가면 쉽게 어긋날 테니, 차라리 실전에서 맞춰나가는 편이 낫다.”

물론 그 와중에 어느 정도, 피해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을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신주라.’

황실에서만, 그것도 그중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던 제국의 비사.

사실 제국 황제에게, 그리고 군주들에게 신과 관련된 비밀이 있으리라는 것은 이전부터 짐작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있던 짐작이었고, 후에 쿠엘단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죽이지 않고 봉인했다. 어째서지?’

봉인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워서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쿠엘단은 바크렌의 신을, 바칼을 죽여 없앴으니까. 물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 같았지만…….

‘그래서일 수도 있지.’

쿠엘단은 스스로 저주받았노라 말했었다. 그를 만났을 때를 돌이켜 떠올려보면, 그는 분명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초월자조차도 신의 저주를 떨쳐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죽여 없애는 것이 확실하지만, 뒷감당이 우려되어 봉인했다. 그렇지만 그 봉인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을 터.’

그런 봉인에 수작을 부릴 정도라면, 이 난리의 배후에 있는 적들은…….

‘지저분한 싸움이군.’

눈에 보이는 적은 가서 싸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뒤에 숨어서 흉계를 꾸미는 적들은, 아무래도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아드리안.”

“예.”

“애덤 모라크를 불러와라.”

잠시 후. 군터는 애덤 모라크와 독대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꽤 많았다.

“찾으셨습니까.”

“내가 부를 것을 예상했나 보군.”

“조금은…….”

“그래. 그대에게 물을 것이 많아. 앉지.”

타이던에 도착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렌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알아둬야 한다.

“그대도 그리 말했지만, 다들 마경이라고들 하더군.”

“그 말 외에 지금의 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점이 가장 어렵던가.”

“며칠이 멀다하고 바뀌는 지형.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드는 마물들. 그 모두가 악몽과도 같아, 무엇이 더 어렵다고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준비를 위해 시일을 지체하지는 않을 걸세. 조정에서 최대한 서두를 것을 당부받기도 했고, 시간을 들여 준비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

“…….”

“자네의 경험이 필요해. 협조를 기대해도 되겠지?”

“장군의 성공을 도와 소장이 얻은 불명예를 씻고 싶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소장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좋아.”

군터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사흘 동안, 그대가 렌에서 겪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게.”

“모든 것…말씀이십니까.”

“그래. 모든 것. 무엇하나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전부.”

“알겠습니다.”

군터가 그랬듯, 애덤 모라크의 딱딱하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안도하고 있었다.

‘이자는…최소한 얼간이는 아니다.’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쓴다. 현재 타이던에 있는 병력 중 상당수가 본래 그의 휘하에 있던 병력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군터 크렘보르는 그를 견제하려는 그 어떤 행동도,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대범함도 대범함이지만, 쓸데없는 데 힘을 빼지 않겠다는 거다.

좀 더 살펴보기는 해야겠지만, 마음속에 쌓여 있던 우려가 크게 가시는 느낌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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