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군을 이끌어주시겠습니까.”
해들리르 가문이 3대 가문 대신 나설 것은 짐작했지만, 퀄릭 해들리르가 직접 와서 요청을 할 줄은 몰랐다.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가 너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런 실행력은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군터는 뮬리츠 몰던처럼 퀄릭 해들리르를 ‘애송이’라고 얕잡아 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히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둘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한 가문의 가주와 후계자라는 신분의 차이. 그리고 그 이상으로 명확한 지위의 차이. 그렇지만 그런 차이가 있다고 한들, 이렇게 대놓고 하대를 받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동부가 장군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도 퀄릭 해들리르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도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설득하려 했다. 이 모습만 봐도 그는 ‘철없는 애송이’가 아니다.
“나는 맡은 일이 있는데 어찌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있겠나.”
“그 말씀은, 중앙 조정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장군께서는 나서주시겠다는 겁니까?”
“못할 것 있겠나. 그간 그대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있으니…….”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신 있는 표정. 이미 이야기가 다 된 걸까? 아닐 수도 있지만, 필시 어느 정도는 논의를 나누었으리라.
군터는 무엇 하나 약속하지 않았지만 퀄릭 해들리르는 만족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리브란에서 사자가 오고 있답니다. 엿새 전에 하잘을 지났다고 하더군요.”
“빠르군.”
“역시 이야기를 거의 다 끝낸 상태로 장군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
직접적으로 답은 주지는 않았지만,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으니 돌려서 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핑곗거리가 없어지면 뜻대로 해주겠다고 말이다.
“군대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살라스가 말했다.
이천 병사가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출정할 수 있는 상태다.
“언제나처럼, 네게 심심한 임무를 맡겨야겠구나.”
“이 또한 중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다.”
진심이었다. 살라스 역시 무인. 그 역시 할렌이나 아드리안 못지않게 전장에 나가 활약하고픈 마음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위치라는 것이 그의 바람을 가로막았다. 살라스는 군터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군터가 그리 생각했고,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그리 생각했다.
군터는 이번에도 살라스에게 그의 빈 자리를 맡겼고, 살라스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틀 뒤에 테리브란의 사자가 당도하자, 군터는 바로 하루 뒤에 이천 병력을 거느리고 헤루스로 향했다.
* * *
군터는 폴츠와 오젠의 경계를 따라 움직였다. 헤루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험한 길이 될 겁니다.”
그런 그의 선택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판니른이야 그럭저럭 안정이 됐다지만, 오젠이나 헤루스는 아직도 도처에 부랑배와 도적의 무리가 심심찮게 보이는 실정이었다. 물론 이천이나 되는 병사가 있으니 귀찮은 일이 생길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솔롬에서 빠른 이동을 위해서 군량을 충분히 챙기지 않은 탓에 가는 길에 있는 인근의 마을에서 틈틈이 징발해야 하는 상황인데 주의 경계를 따라 이동한다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주도에서 멀어질수록 치안이 안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도적들이 활개를 칠 것이며, 그러면 촌민들이 도적들을 피해 떠나기 때문이다. 즉, 징발을 할 수 있는 마을을 발견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거다.
결론적으로, 우려를 표하는 이들의 의견이 일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군터도 그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뜻대로 강행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징발할 수 있는 촌락을 발견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촌락에서 징발하는 대신, 도적들을 털면 된다.”
몇몇 이들은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래전부터 군터를 봐온 수하들은 그것을 농담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대표적으로 할렌이 그랬다. 도적들을 털어먹는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도적들이라고 해봐야 결국 대부분이 보졸일 테니, 기병을 추려서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면 섬멸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도적들이 이천 병사들이 소모할 만한 식량을 가지고 있을지, 그리고 기병들이 추격하기도 전에 눈치를 채고 달아나버리지는 않을지였다.
“구릉 너머.”
“바로 넘습니까?”
“아니. 백 기씩. 양쪽으로 우회해서 돌아라.”
“예.”
하지만 그들의 우려는 괜한 것이었다. 그들은 군터의, 이능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감을 간과했다. 군터는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진 도적 무리의 존재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수십 명 정도의 작은 무리는 포착하지 못했지만, 백 명이 넘어가는 무리는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허억!”
대부분의 도적들은 정규군처럼 정찰대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병에 당황하며 지리멸렬하기 일쑤였다. 솔롬의 군대가 다섯이 넘는 도적 무리를 섬멸하는 동안 발생한 사상자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사망자는 없었고, 중상이라고 할 만한 것도 둘에 불과했다.
도적들을 소탕하느라 이동이 늦어지는 일도 없었다. 군터는 도적들을 찾으려고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며 수색하지 않았다. 그저 군을 이동시키다가 인근에 도적 무리가 있다 싶으면 곧장 기병들로 추격하게 하거나, 본인이 직접 수십 기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말을 달렸다. 전투라고 할 것도 없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고,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쏠쏠하게 소모할 수 있을 정도의 물자를 꾸준히 노획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천 병력이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솔롬의 군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해가 지기 전에 포트로에 당도해야 한다.”
“예.”
솔롬의 군대는 보통의 군대가 이틀은 가야 할 거리를 단 하루 만에 주파했다.
“주, 죽겠어.”
“그 입을 다물면 좀 살 만할 거야.”
말도 안 되는 행군 속도였지만 병사들은 어떻게든 버텨냈다. 그들은 솔롬에서 혹독하게 훈련받았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독하게 받은 것이 바로 체력훈련이었다. 교관들은 전장에 나가면 체력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며 그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였었다. 그때는 아무리 체력이 중요하다 한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왜 그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러다 적하고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다 혀 빼물고 죽고 말걸?’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눈에 불을 켠 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장교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말에서 내려 그들과 똑같이 걷고 있는 그들의 성주 때문이었다. 한 손에는 말 고삐를, 한 손에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검은 창을 든 그는 보졸들과 똑같이 걷고 있었다. 보여주기라는 것을 알지만, 알아도 불평은 할 수 없었다. 최고 지휘관부터가 그들과 똑같이 두 발로 이동을 하고 있는데, 어찌 그들이 볼멘소리를 할 수 있겠나.
“으윽!”
언젠가부터 하루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 의식조차 할 수 없었다. 일어나서 멍한 정신으로 계속 발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기절하듯이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멍하니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쓰러져서 잔다. 그것을 수십 번이나 반복했다. 중간에 들른 몇 개의 성과 도시에서 하루씩 휴식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을 치렀어도 단단히 치렀을 것이다.
“도착했다! 타이던이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고개를 들게 만든 것은, 저 멀리 선두에서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였다. 어떻게 아직도 저렇게 목소리에 힘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전에, 병사들은 환호를 질렀다. 역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맹세코 생을 통틀어 한 손안에 들 수 있을 정도의 큰 기쁨에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장군. 대체 어떻게 이리 빨리…….”
군터는 헐레벌떡 달려 나온 성주에게서 눈을 떼고 그 옆에 선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소 경박해 보이는 성주에 비해, 그 옆에 선 사내는 제법 그럴듯했다. 꽤 단련을 했음이 분명한 단단한 몸도 그렇고, 기세도 잘 벼려져 있는 것이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크렘보르 장군을 뵙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목소리에도 힘이 있는 것이, 여느 평범한 패장들과는 달랐다. 나쁘게 말하자면 뻔뻔했고, 좋게 말하자면 당당했다.
“애덤 모라크라 합니다.”
“아차. 타이던 성주 케이지 볼타라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군터는 성주의 안내를 받아 성내로 들어갔다. 성주는 그에게 여독부터 풀 것을 권했지만, 군터는 그의 제안을 물리고 즉시 회의부터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지만, 구체적인 것은 모르네.”
군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누구든 나서서 설명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의 눈길을 받자, 애덤 모라크가 입을 열었다.
“소장이 설명 드리겠습니다.”
군터의 짐작대로, 애덤 모라크는 렌에서 군을 이끌고 2황자의 잔당을 상대하던 장군이었다. 물론 그곳의 상황은 타이던의 성주인 케이지 볼타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곳에 있었던 애덤 모라크가 직접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가만히 앉아 차를 들었다.
“장군께서는 혹, 렌의 재앙이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이곳에 오면 알게 될 거라 하더군.”
“그렇군요. 사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도 대외적으로는 기밀로 취급되고 있는 터라……. 아무튼, 렌의 재앙은 신주로 인한 것입니다.”
“신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군터가 더 설명해보라는 듯 조용히 기다리자 애덤 모라크는 설명을 이어갔다. 신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왜 지금까지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이었는지 등을.
“…요약하자면, 신주라는 것은 토착신을 봉인한 것이로군. 그 봉인이 잘못되어 지금의 재앙이 일어났다. 맞나?”
“정확합니다.”
군터는 몸을 뒤로 기울였다. 푹신한 가죽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기껏해야 강대한 이종이 설치는 것 정도를 짐작했었다. 그러나 지금 들은 실상은 그런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