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군대가 움직였다. 렌의 군대는 아니었으나, 렌으로 움직이기는 한 것 같았다. 군터는 그 사실을 보리스가 보내온 서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렌의 대치를 깨기 위함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숨기기보다는 드러냈을 겁니다.”

“숨겨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군.”

그럴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렌의 재앙을 어찌해보기 위함이겠지요.”

“가능하리라 보나?”

“군대를 움직이기 전에도 손은 썼을 겁니다. 소용이 없었기에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일 테고요.”

일리 있는 추측이다. 아마 야스메티의 말대로일 것이다. 렌이 이 이상 망가지는 것은 황자에게 있어 달갑지 않은 일일 테니, 어떻게든 손을 쓰려 했을 터. 그러나 지금 이렇게 이천의 군대까지 움직이게 됐다는 것은,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성공할 것이다.”

2천의 군대가 움직였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다. 병사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지휘관이 빌리치 아조프다. 군터는 그와 함께 전장에 나간 적은 없었지만, 그가 여러 전장을 전전하며 꽤 많은 승리를 일군 능력 있는 무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적인 친분은 배제하고 봐도 그는 꽤 괜찮은 지휘관이다. 그런 그가 이끄는 군대이니, 렌의 반군이 반응한다고 해도 충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터.

“그러면 좋겠습니다.”

군터는 한숨을 쉬는 야스메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야스메티가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피곤해 보이는군.”

“요즘 들어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조금 시달리다 보니 잠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슬슬 중요한 일 몇 가지가 마무리되어 가니…….”

“쉬어라. 안 그래도 비실비실했지만, 지금은 반 시체 같은 몰골이군.”

“하하. 그렇습니까?”

“농이 아니다. 이대로 가면 송장을 치울 일이 생길 것 같아.”

“괜찮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뭐, 죽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야스메티가 씩 웃었다.

“오래…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리 살고 있지요.”

“…….”

군터는 야스메티의 생각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여기서 억지로 쉬게 한다고 순순히 따를 기색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빌리치 아조프가 이끄는 군대가 렌의 재앙을 해결한다면 야스메티의 큰 근심거리 하나도 사라지는 셈이니, 저 시체 같은 얼굴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약 한 달 뒤, 렌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 * *

“렌의 군대가 퇴각했습니다.”

렌에서 2황자의 잔당과 대치하고 있던 군대가 렌 밖으로 물러났다. 잔당과의 전투에서 패퇴한 것이 아니다. 그들과 다투던 잔당들도 렌 밖으로 물러났다. 아니, 쫓겨났다.

“도망쳐 나온 상인들이 전하길, 마경(魔境)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체와 괴물들이 대낮에 돌아다닌다더군요.”

“…….”

움직이는 시체는 익숙하다. 괴물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대수롭지는 않다. 군터는 그것보다는 어째서 렌의 군대가 물러나야 했는지가 궁금했다. 시체와 괴물들 때문에?

‘그럴 리가 없지.’

몇몇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제국에서 이종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과거 그들이 그것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박멸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인간이 아닌 괴물들과 상대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렌의 군대가 시체나 괴물들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발을 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리고 2황자의 잔당들이 렌에서 물러났다면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렌의 군대에 대한 소식은 없나?”

“헤루스 남쪽의 요새에서 멈췄다는 것 외에 다른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빌리치 아조프는?”

“그쪽은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아마도…….”

“…….”

야스메티는 뒷말을 삼켰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군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에 짙게 깔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아침 즈음에는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곤란해졌군.”

“예?”

“렌의 상황이 장기화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결국, 네가 우려하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아.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보다는 렌의 혼란이 렌 바깥까지 옮겨붙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헤루스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폴츠도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군대를 동원하고도 실패한 이상, 렌의 재앙은 이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다.

“렌의 재앙은 이제 동부의 재앙이 됐습니다.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도 방책을 강구 할 테지만…그에 앞서 동부에서 힘을 보태길 원할 겁니다.”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했지만, 보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보태라고 명령을 할 것이다. 막말로 렌의 재앙이 밖으로 뻗쳐나가면 당장 피를 보는 것은 렌에 인접한 헤루스와 폴츠니까. 급한 쪽이 먼저 성의를 보이라는 식으로 압박을 가할 테지.

“3대 가문이 다급해지겠지요.”

“정확히는 브랜우드겠지.”

동부 3대 가문은 각기 다른 주에 기반을 두고 있다. 크레이그는 오젠, 몰던은 판니른. 그리고 브랜우드는 헤루스. 이번 렌의 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브랜우드다. 그들은 다른 두 가문을 움직이고, 그들의 지지세력을 움직여 동부의 힘을 이끌어내려 할 것이다.

“이쪽에까지 요청하겠나.”

“저는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성의를 표해주기를 원하겠지요. 어쩌면 장군께서 군을 이끌어주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쪽에도 인물이 있을 텐데.”

“장군의 무명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확실한 패를 내고 싶어 할 겁니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아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적어도 동부 3주에서는 군터 이상의 무명을 가진 무장이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 판니른의 혼란을 재빠르게 잠재우는 과정에서 군터의 무명은 더욱 높아졌다. ‘이름값’에서, 그와 비견될 수 있는 무장은 동부 3주에는 없다.

“내가 움직이려면 조정의 승인이 필요할 터인데.”

군터는 평범한 무장이 아니었다. 솔롬의 성주라는 지위는 그렇다 치고, 파니른 방위군단장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멋대로 자리를 비우고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다. 그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테리브란 조정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쯤은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그보다, 어떠십니까? 저들이 청한다면 장군께서는 움직일 마음이 있으십니까?”

“거부할 이유가 있겠나.”

그간 3대 가문, 정확히 말하면 해들리르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퀄릭 해들리르가 노골적으로 호의를 표해오는지라 밀어내지 않고 적당히 어울려주다 보니, 몰던이 아니라 그들과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만약 해들리르에서 이제껏 베풀었던 호의를 들먹이며 참전을 요청한다면 그들과 척을 질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해들리르가 두렵지는 않지만, 비밀스러운 동맹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터는 렌에 흥미가 있었다. 렌의 재앙이 무엇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러시다 해도 흔쾌히 수락하셔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다.”

이제는 이쪽의 생리를 안다. 남을 위해 일을 해준다면 결코 공짜로 해주어서는 안 되며, 해줄 마음이 있더라도 결코 쉽게 해주어서는 안 된다. 뜯어낼 기회가 생기면, 뜯어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뜯어낸다. 승냥이들의 세계에서는, 가장 굶주린 승냥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 아닌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들은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으니까요.”

야스메티의 말대로였다. 닷새 후. 급히 말을 달려온 것이 분명한, 추레한 몰골의 전령이 그를 만나기를 청했다. 전령은 스스로를 헤루스에서 온 브랜우드의 사자라고 했다.

* * *

“꾸물대지 마! 신속히 움직여라!”

아드리안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병사들을 재촉했다. 병사들이 부리나케 움직였지만, 아드리안은 그마저도 마음에 차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연신 소리쳤다.

“의욕이 있는 것은 좋지만, 과한 것 아닌가? 병사들이 솔롬을 떠나기도 전에 자네의 등쌀에 쓰러지겠어.”

토어릭이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괜히 와서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는 걸 보니 할 일이 없나 보군. 그럼 저 짐이나 좀 나르는 게 어떤가.”

“마음이 안 놓이나? 자네가 직접 조련한 병사들이 아닌가.”

맞다. 혹독하게 굴렸고, 그래서 쓸만한 놈들로 만들어 놓았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 어딜 가더라도 꿇리지는 않을 정도다. 하지만.

“훈련과 실전은 달라. 거기다, 렌의 소문을 어디서 주워듣고 지레 위축된 놈들이 많다.”

그게 문제다. 렌의 재앙은 대다수사람들에게 있어 미증유의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일반 백성들이나 병사들이나 다르지 않다. 옛 파헨델의 병사들이었다면 달랐겠지만, 그중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고작해야 천 명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지금 판니른 곳곳에 흩어져 있다.

“더 신경 쓰이는 건, 그쪽에 있는 놈들은 이놈들보다 더 심할 거라는 거지.”

“음. 그건 그렇군.”

솔롬에서 데려갈 수 있는 병력은 많아 봐야 이천이다. 나머지 병력은 헤루스에서 대기하고 있는 군대로 충당한다. 아드리안은 결코 그들이 솔롬의 병사들보다 나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군터의 밑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없다.

“결국, 이놈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토어릭은 그제야 아드리안의 우려를 이해했다. 그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혀를 찼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무장은 튼실하구만.”

“유일한 장점이지. 저놈들에게 돈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는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지금 솔롬에 있는 병사들이 과거 파헨델의 병사들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무장 상태다. 파헨델의 병사들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 무장을 꾸렸었지만, 지금의 솔롬 병사들과 비할 수는 없다. 지금 솔롬의 병사들은, 과장 좀 보태서 온몸에 황금을 칠한 수준이었으니까.

“저놈들이 들인 돈 값만 한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터인데.”

“그럴 걸세.”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