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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6화 (606/1,064)

606화

“전하.”

빌리치 아조프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긴장하지 않는 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때때로 그의 간담이 쇠로 된 것이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금만큼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와의 독대라면 그가 아니라도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물론 7황자를 섬긴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몇 번 정도 사사로이 대화를 나눈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본격적인 독대는 처음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겠네. 장군.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하명 하십시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세. 곧 알려지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그대는 함구해야 할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함구해야 하네.”

“예.”

이제부터, 황자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임을 짐작했다.

그 예상은 맞았다. 그것도 너무 잘 들어맞았다. 황자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내내, 빌리치 아조프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 * *

보리스는 며칠 만에 내려온 호출 명령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그가 지금 불려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일단 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라야 할 터. 보리스는 명령을 전하러 온 부관과 함께 움직였다.

“장군. 찾으셨습니까.”

“그래. 편히 앉게.”

빌리치 아조프가 옅게 웃는 얼굴로 편히 앉으라고 해도 보리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꽤 감이 좋은 편이었다. 전장에서도 그렇고, 일상에서도 그랬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상관의 웃음 뒤에 보이지 않는 그늘이 드리워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이 있어 보이나?”

“제게 말씀하시기 어려운 일이라면…….”

“그런 것은 아니야. 어차피 말해야 할 일이고. 그래. 자네도 알아야 할 일이지.”

짐작이 맞았다. 빌리치 아조프는 이제 거짓 웃음을 지우고 편치 않은 내심을 드러냈다.

“전하께 밀명을 받았네. 곧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기에 신경을 써야 하네.”

“전하의 밀명이라시면…….”

“데이븐랏지 남쪽. 헤루스와의 경계에 군대가 모일 걸세. 난 그 군대를 지휘하여 전하의 명을 수행해야 해. 때문에 당분간 자리를 비우게 될 걸세.”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글쎄. 모르겠군.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아. 생각보다 금방 돌아오게 될 수도 있고, 기약이 없을 정도로 늘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겠구만.”

“군대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장군을 수행할 인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남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위험한 일이야. 크렘보르 가문의 독자를 끌어들일 수는 없지.”

“저는 크렘보르의 독자이기 전에 장군을 따르는 무관입니다.”

보리스가 안색을 굳히자 빌리치 아조프는 기꺼운 듯 웃었다. 이번에는 억지로 꾸며낸 웃음이 아니었다.

“훌륭하군. 하지만 내 판단이고, 명령이네. 자네가 자네의 말처럼 날 따르는 수하라면 상관인 내 명령에 따라야겠지?”

“…….”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있으면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지. 날 수행할 인원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놓은 바가 있으니 자네는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상관인 빌리치 아조프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보리스도 내심 불만은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예.”

본론은 그것이었다. 곧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 자신이 없는 동안 잘 해달라는 것이었다.

“장군께 이야기는 들었나?”

빌리치 아조프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

보리스는 달갑지 않은 얼굴과 마주했다.

“들었지. 자네도 들었나?”

“들었으니까 자네에게 묻고 있겠지?”

물음 뒤에 ‘그것도 모르나?’라는 말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아마 착각은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해도, 이 사내가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물론 그 ‘알 만한 사람’에는 보리스도 포함되어 있었고.

“자네도 남기로 했을 테고?”

“짐작하고 있으면서 뭐하러 입 아프게 묻나.”

“짐작만 하는 거니까. 확실한 게 좋지. 아무튼, 이렇게 되면 자네와 내가 장군의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겠군.”

짜증나지만 맞는 말이다. 빌리치 아조프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들 두 사람이 그 다음이 되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이만 가봐도 되겠나?”

“까칠하군.”

“솔직한 거지. 자네에게 까칠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주의하게. 그 속에 무슨 마음을 품고 있을지 모르니.”

그가 피식 웃었다.

“유의하지.”

보리스는 그를 지나쳐 나오면서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느글거리는 면상을 보고 나니 속이 다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판셀 자하브.

흔히 ‘리바스트라의 자하브’라 불리는 굴지의 명문 귀족 가문의 일원이자, 현 가주의 삼남. 삼남이지만 직계인 데다, 후계자인 제 동복형과 사이가 좋아 가문 내에서 꽤 위세를 부리는 자다. 그래서인지 매사에 자신감에 차 있는데, 그 자신감이 가문 밖에서까지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과할 정도로.

그래도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자하브는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도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들이며, 그런 가문의 직계인 만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이해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판셀 자하브는 유독 보리스에게 그 지저분한 성미를 드러냈다. 틈만 나면 ‘혈통’ 운운하면서 속을 긁는 것은 기본이고, 업무적으로도 치사한 견제를 일삼았다. 만약 그들의 직속 상관이 빌리치 아조프가 아니었다면 그 정도는 지금보다도 훨씬 심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부친인 군터는 자하브 가문과 딱히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관계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보리스는 자신에게 유독 적대적으로 나오는 판셀 자하브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그의 친우이자, 이제는 처남이 된 우슈무르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가진 술자리에서 고민을 털어놓으니 자밀이 설마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판셀 자하브는 여색을 밝혔다. 대놓고 구설수를 만드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름난 미녀 중에서 그의 추파를 한 번쯤 받지 않은 경우가 드물 정도였다.

보리스는 여기까지 들었을 때,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사실 ‘여색을 밝힌다’는 부분에서 눈치를 챘다. 그리고 그 순간, 기분이 말할 수 없이 더러워졌다.

“과거에 그자가 우리 가문에 혼담을 넣었었네. 자하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제안했었지.”

가문의 이름을 걸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가문 대 가문이 아닌, 가문과 개인의 일로 하자는 뜻이다.

“그는 그때도 이미 처가 있었거든.”

즉, 우슈무르 가문의 여식을 정실이 아닌 첩으로 얻고자 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상당한 무례다. 우슈무르 가문이 어디 이름 없는 평민 집안도 아니고, 엄연한 귀족 가문이다. 그런 집안의 여식을, 그것도 정실부인의 딸을 첩으로 달라 하는 것은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짓. 파셀 자하브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하브’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은 것이다.

“물론 거절했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엘리야 우슈무르는 보리스의, 크렘보르 가문의 여인이 되었으니까.

“엘리야는 자네의 아내가 되었지. 그 때문일 걸세.”

“설마 정말 그런 연유로…….”

“자하브의 자식일세. 비록 후계는 아니라지만 세상이 우습게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사내지. 듣자 하니 후계자인 그의 형은 물론이고, 그의 모친이 그를 많이 아낀다더군.”

“…….”

그러면서 자밀은 판셀 자하브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주었다. 그는 그렇게 여색을 밝히는 주제에 원치 않는 여인과 혼인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원치 않는’이라는 것은 ‘박색한’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래서 모친은 물론, 후계자인 그의 형에게도 더 어여쁨을 받는다고 했다. 그 혼사가 그의 형이 추진한 것이라던가.

“하필이면 그자와 함께 일을 해야 한다니. 곤란한 일이 많아지겠군.”

“그래도 아조프 장군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분이 안 계셨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판셀 자하브의 핍박이 괴로운 것이 아니다. 끓어오르는 분기를 억누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만약 핍박의 정도가 지금보다 더 심해진다면, 그때는 정말 주먹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검을 뽑든가.

성질 같아서는 이미 판셀 자하브와 결판을 내고도 남았다. 그러지 않은 것은 크렘보르의 독자이자 후계자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자하브라는 거대한 가문과 척을 질 수는 없으니까. 물론 그가 판셀 자하브의 얼굴에 주먹 한 방 정도 먹여준다고 해서 자하브가 크렘보르를 적대하지는 않겠지만, 괜한 빌미를 주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후우.”

오늘은 평소보다 나은 편이었다. 괜한 헛소리를 듣기 전에 피해서 나왔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마찬가지라, 보리스는 업무를 마치자마자 자밀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이전에도 자주 만났지만, 가족이 된 이후로는 거의 하루건너 하루꼴로 자밀과 만나는 그였다.

“오늘도 그놈이 시비를 걸던가?”

“언제나 똑같지.”

처음에는 판셀 자하브를 ‘그자’라면서 짐짓 점잖게 칭하던 자밀도 어느샌가 놈놈 거리게 됐다. 보리스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함이었다.

“사실 오늘은 별 것 없었어. 심하기는 어제가 심했지.”

“그럼?”

“짜증 나는 일이 아니라, 짜증 날 일이 생겼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아조프 장군께서 당분간 자리를 비우신다더군. 나와 그놈만 남게 된 거지.”

“그거참… 큰일이군.”

“그래. 큰일이지. 내가 드디어 그놈을 두들겨 패게 될지도.”

“하하. 그 정도만 하면 다행이지. 검을 뽑는 것만큼은 자제하게. 주먹은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을지라도, 검을 뽑으면 일이 커져.”

“글쎄. 자신이 없는데.”

반쯤은 농담이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어제 그놈이 부하들의 훈련 상태를 지적했을 때는 반사적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휘두르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제 놈이 감히 기강을 이야기해?’

자기 휘하 병사들의 훈련은 모두 수하 장교들에게 떠넘기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감히 그런 소리를 입에 담다니. 그것도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가면서.

“언젠가 그놈에게 주먹을 쓸 일이 생기면, 그때는 반드시 놈의 뼈 몇 개 정도는 부러뜨려버릴 걸세.”

“그때 놈이 목숨만은 붙어있길 바라지.”

보리스가 피식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타는 속에 독주가 들어가니 몸 전체가 불덩이가 된 듯 뜨끈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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