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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5화 (605/1,064)

605화

“렌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흘려들었다. 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쪽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렌이 많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올라오는 보고가 계속해서 더 나빠지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점점 심각해지는 야스메티의 표정도 한몫했다.

“곡물의 가격이 오르고 있습니다.”

오르고 있다는 말은 많이 순화해서 말한 것이었다. 곡물의 가격은 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폭등을 하고 있었다.

“렌의 곡물 생산이 끊긴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왜 갑자기 지금 문제가 터진 거지?”

“그때는 기대가 있었지요. 렌의 상황이 안정되면 렌의 비옥한 농토가 다시 제 기능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렌의 상황은…그런 기대를 앗아가고 있습니다. 미곡상은 물론이고, 곡물을 취급하지 않던 상인들마저도 곡물 사재기를 해대고 있습니다.”

“곡물이 사재기가 되나? 곡물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버리는 것 아닌가.”

“썩기 전에 팔 자신이 있는 거지요. 사람은 먹지 못하면 버틸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렌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제국 북부의 몇 개 주에 공급될 정도로 양이 많고 질 또한 우수하다. 그런 곡물의 생산이 전란으로 인해 2년이 넘게 끊기다시피 한 상황. 단 2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제국 북부는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더 멀리서, 더 비싼 값을 주고 곡물을 들여오거나 곡물을 대체할 다른 식량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무엇하나 여의치 않았다. 황자들의 다툼은 제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예전에는 안전했던 길도 위험해지고 심지어는 끊기기도 했다. 황도를 중심으로 한 내지(內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外地)일수록 상황은 심각했다.

테리브란을 비롯하여 7황자의 영향력 아래 놓인 몇 개 주는 서로 안전하게 교역을 하면서 고립을 피했다. 그러나 2황자의 권역이었던 3개 주. 오젠과 판니른, 그리고 헤루스는 아직 그러지 못했다. 혹자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어림도 없지.’

상술한 3개 주 모두 한 차례 전란이 휩쓴 땅이다. 7황자가 승리를 거둘 당시, 그가 거느린 승전군은 정복한 땅을 크게 약탈했다. 차후의 일을 염려한 지휘관들이 힘써서 최대한 막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탈을 완전히 금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징발을 당했다. 거기에 패전의 대가로 야만적인 약탈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 후유증을 극복하려면 얼마의 세월이 필요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상황이라면 응당 새로운 주인의 지원이 돌아갈 것도 같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소리다.

‘공짜로 남 좋은 일을 시켜줄 리가 없지 않은가.’

3주는 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3주의 주인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3대 가문으로 대표되는 동부의 권세가들이 위축되었을지언정 여전히 멀쩡하게 3주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양보했으며, 고개까지 숙였지만 그들이 가진 진정한 재산을 잃지는 않았다. 여전히 동부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강하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한다지만…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3주의 주인이다. 그것을 그들도 알고, 중앙의 권력자들도 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기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당연히 서로를 위해 공짜로 일을 해주지는 않는다.

길을 놓더라도 동부의 3주에서 놓을 것이다. 상인들의 왕래가 있더라도 동부 3주의 상인들이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결국, 동부 3주의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는 3주의 권력자들이 희생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백성들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까?

‘그럴 리가.’

야스메티는 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제국에서 자라나지도 않았다. 그가 제국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몇 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제국의 권력자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할 만큼 탐욕스럽다. 다만 그 탐욕을 채워가는 과정이 꽤 치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집요하다. 무서울 정도로.

그들은 양보라는 것을 모른다. 양보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실 인내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그들은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타협은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 쪽이 급한데, 다른 쪽이 그들의 사정을 헤아려 줄 리가 없다.’

동부 3주의 상황은 좋지 않다. ‘최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건, 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렌에 비할 수는 없어도, 동부 3주 역시 상황은 좋지 않다. 식량은 부족하고, 백성들의 삶은 철저하게 망가졌다. 전쟁을 몇 차례나 겪은 그의 입장에서는 고작해야 한 번의 전쟁으로 3개 주가 망가졌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바크렌만 봐도 그렇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 땅에서조차 백성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내성이 없기 때문이다.’

바크렌은 이전부터 전쟁의 역사가 있는 땅이다. 북부로 한정 짓는다면, 거의 매년 초원민족의 약탈을 겪기도 했다. 그들은 천성 자체가 억세며, 전쟁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몇 번의 전쟁이, 수십 번의 전투가 그 땅에서 일어나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그러나 동부 3주는 다르다. 아마 테리브란을 비롯한 기존 7황자의 세력도 그럴 것이다. 황자들 간에 승자와 패자가 바뀌었다면, 무너지고 약탈을 당한 쪽이 반대였다면 그들 역시 지금의 동부 3주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자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버텨내기 힘들다.

‘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결론은 이렇다. 동부 3주의 곤란한 상황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두 가지 중 하나가 이루어져야 한다. 동부의 3대 가문을 비롯한 권세가들이 중앙의 권력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혹은 3주가 기어이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흐르거나.

그러나 둘 다 요원한 일이다. 후자는 말할 필요도 없고, 전자는…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부의 권력자들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많은 것을 내놓을 각오를 했다는 것인데, 그들이 그럴 이유가 없다. 왜? 당장 배를 곯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백성들이니까. 잔인하다고 말할지라도 이게 현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렌에 발생한 재앙은 치명적이다. 렌이 앞으로도 계속 망가져 버린다면 동부 3주는 식량난을 타개할 방도가 없다. 물론 렌의 곡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3주의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다른 방도를 찾을 테니까. 하지만 그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소모될 시간, 그리고 짊어져야 하는 부담을 생각한다면…….

“판니른이 식량 자립을 이룰 수 있겠나?”

“마음먹고 힘을 들인다면 못할 것은 없겠지요. 간단하게, 농토를 개간하면 됩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테고, 무엇보다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동안이 문제겠군.”

엄밀히 따지자면, 이런 문제를 방위군단장인 군터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백성들의 삶이라든지, 통치에 관한 것은 솔롬에 있는 그가 아니라 하잘에 있는 총독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니까.

“어렵게 다잡은 판니른의 정세가 다시 혼란해질 겁니다.”

이게 문제다. 사람이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면 둘 중 하나다. 다 내려놓고 포기하든가, 분노하며 들고 일어서든가.

“민란이 일어나겠지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겁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당장 내년 추수 시기, 어쩌면 그보다 일찍 터질지도 모른다.

“총독이 알아서 하겠지.”

“총독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문에서조차 내쳐진 자인데요.”

“그럼 테리브란의 조정이 알아서 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리브란의 조정이 아니라 황자다. 기껏 손에 넣은 땅을 망가지게 두지는 않을 테니, 판니른의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려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터.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렇긴 하지요.”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했기에, 야스메티는 쓴웃음조차 짓지 않았다.

“그래도 대비를 하긴 하셔야 합니다. 일이 터지게 된다면 장군께서 움직이셔야 할 테니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치 마라.”

군터는 야스메티의 우려를 일축했다. 설령 민란이 대규모로 번져 일어난다고 해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먹고살기 힘들어 일어난 백성들 10만이 모인다 해도, 휘하 병력 오천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외적이 기회를 틈타 들이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야스메티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들고일어날 백성들이 아니라, 그들이 일으킨 혼란에 편승할 수도 있을 외적이었다. 아바시스, 혹은 또 다른 황자.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그제야 군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두렵지는 않다.”

“하오나.”

“그렇지만…네 말대로 대비는 해야겠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야스메티가 하고자 하는 말도 그것일 터. 군터는 그의 말이 옳다고 느꼈고, 곧 수하들을 소집해 향후의 일에 대해 심도 깊게 논의했다.

* * *

“탐사대의 소식이 끊겼다 합니다.”

“…….”

황자는 그 보고를 듣자마자 습관처럼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오랫동안 그를 봐온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황자가 몹시 짜증스러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전하. 그래도 이로 인해 신주의 봉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어설프게 꾸려서 보낸 탐사대가 아니다. 고위 술사에다가 솜씨 좋은 무관에 정예병력까지 추려서 보냈다. 그런 이들이 어디 이름도 없는 산적들의 습격으로 소식이 끊겼을 리는 없다. 실제로도 봉인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지막으로 소식을 보내기도 했고.

“실수했군.”

황자가 탄식했다.

“차라리 군대를 보낼 것을.”

기밀을 지키기 위해 소수의 인원만 보냈다.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한 것이었기에 요란하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령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일부는 돌아오거나 소식을 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설마 이렇게 깔끔하게 소식이 끊길 줄이야.

“전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렌에 있는 군대가 움직일 수 있겠나. 그들이 움직인다면 잔당들 역시 움직일 텐데.”

“허면…어찌하실 요량이신지.”

“따로 파견하는 수밖에.”

황자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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