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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4화 (604/1,064)

604화

“똑바로 서라! 거기! 줄 맞춰!”

후트는 병사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열심히 눈을 굴려 혹 자신이 줄 밖으로 벗어났는지를 살폈다.

‘후우.’

다행히 벗어나지 않았다. 저 거친 목소리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확인하니 가슴의 두근거림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정신들 똑바로 차려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놈은 바로 탈락이다!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번호 붙여 열 걸음 나아간다! 실시!”

“하나!”

“둘!”

병사들은 지원자들의 몸과 마음을 인정사정없이,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그들은 아주 자그마한 실수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입에서 불을 토했다.

“빨리빨리 못 움직이나!”

“거기 너! 옆으로 빠져! 당장!”

굳게 마음을 먹은 후트조차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중간하게 각오하고 지원한 이들은 버티기 힘들었다.

“그 표정은 뭐야! 억지로 끌려왔나?! 하기 싫으면 당장 때려치워! 그 누구도 너희에게 남아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스스로 그만두는 이들이 생겼다. 처음에는 단 몇 명에 불과했으나, 병사들의 그칠 줄 모르는 가혹한 언행에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들은 일부러 이러는 거다. 포기하면 안 돼.’

후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돌아가 봐야 그를 기다리는 건 우중충한 미래뿐이다. 가족? 친구? 그런 사치스러운 것은 없다. 기껏해야 버러지 같은 제이크 패거리가 전부다. 그런 시궁창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모병 공고를 보자마자 자원한 것 아닌가.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시궁창에 발을 담그겠다는 것과 같다. 구정물을 돌아다니는 쥐새끼가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후트는 자문했다. 그래도 좋은가?

‘아니. 절대.’

이를 악물었다. 몇 번씩이나 폭언을 듣고,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시달려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우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은 여전히 가혹하게 굴었으나, 후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여전히 사나운 고성이 튀어나왔지만, 후트는 자신이 그들에게 조금은 인정받고 있다고 느꼈다. 너무 고된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 수도 있지만, 후트는 그런…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를 것에서 작게나마 용기를 얻었다.

“고생들 했다. 여기까지다.”

가장 엄하게 그들을 몰아붙였던 장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후트는 어느새 한 달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눈치챘겠지만, 그간 일부러 너희를 혹독하고 훈련 시켰다. 아마 그동안 속으로 원망도 많이 했을 테지. 하지만 이 솔롬은 판니른의 국경이자, 제국의 국경이다. 솔롬과 판니른의 병사가 된다는 건, 앞으로 제국의 적과 직접 맞설 첨병이 된다는 뜻. 어중이떠중이는 필요 없다. 그런 놈들이 머릿수만 채우고 있어 봐야 군의 사기만 떨어질 뿐.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솔롬의 군대가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에 일단은 통과한 셈이니까.”

‘일단은, 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솔롬의 군인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막막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됐다.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거쳐서 기어이 솔롬의 군인이 되고 나면, 그때는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게 될 테니까.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군사 훈련을 받게 될 거다. 아! 그 전에…혹시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녀석 있나? 있다면 지금 나서도록.”

있을 리가. 여기까지 온 이들은 저마다 어느 정도의 독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독기는 각자의 절실함이 바탕이 되어있었으니,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려는 자가 생길 리 없었다.

“아무도 없나? 좋아. 오늘은 푹 쉬어라.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질 것이다.”

후트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 * *

“신병들의 교육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육백이 넘는다고 했나?”

“정확히 육백사십삼 명입니다.”

“모병이라고 하여 대충 한 것은 아니겠지?”

군터의 물음에 살라스가 단호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모든 교육은 철저하게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많이 남은 것은 소관 역시 의외입니다만…….”

본래 계획은 오백 아래로 남기는 것이었다. 그에 맞춰서 훈련 계획을 짰다. 그런데 목표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남았으니, 훈련을 대충 하지 않았다면 이는 지원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쓸만하다는 뜻.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들입니다. 나름 독기를 품은 것 같더군요.”

“그럴 수도 있겠군.”

절박함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동기 중 하나다.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솔롬의 군병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일 터. 그렇다면 까다로운 훈련 과정을 생각보다 잘 버텨낸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가족이 있는 자들인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짊어진 것이 있는 자들은 대개 책임감을 느끼는 법이고, 그런 자들은 대개 강하다. 야스메티가 바란 것은 다른 것이었겠지만, 어찌 됐든 나쁘지 않다.

“이제 판니른도 그럭저럭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살라스의 차례가 끝나자 뒤이어 토어릭이 보고했다. 살라스가 솔롬의 군무를 담당한다면 토어릭은 솔롬 밖의 일을 담당했다.

“이제 도적들은 판니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파견한 토벌대의 반 이상이 귀환했으며, 나머지 반도 순차적으로 복귀할 것입니다.”

도적이란 도적은 전부 정리하고, 부랑배들조차도 모조리 쓸어버렸다. 크렘보르 가문의 깃발을 건 병사들은, 혹자는 잔혹하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판니른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들은 포로를 잡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족족, 칼을 겨누는 족족 참혹하게 도륙하여 수급만을 챙겼다. 피로 쓴 명성은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렸고,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을 알렸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환호했으며, 동시에 두려워했다.

“재무관들이 우는 소리를 하더군요.”

“그자들의 눈에는 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할렌의 말에 살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봐도 우는 소리가 나올 만하네. 지금 나가 있는 토벌군의 수만 해도 거의 삼천이야. 그들이 소모하는 물자만 해도 일개 성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야.”

“귀족들이 낸 후원금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가. 그건 바닥이 난 지 오래야.”

군대는 돈을 먹어치우는 괴물이다. 오래 풀어두면 풀어둘수록, 그 괴물이 소모하는 재물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살라스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거의 매일같이 재무관들을 상대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벌어들이는 것은 없이 소모만 하고 있습니다.”

“야스메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데.”

“토벌군이 안겨주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나가는 돈 이상으로 크다고 본 것이겠지요. 지금까지는 소관 역시 거기에 동의해왔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벌어들이는 것 없이 쓰기만 한다는 말이 딱 정확하다. 판니른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방위군의 역할 중 하나라지만, 사실 도적 소탕 같은 사소한 부분에는 관여치 않아도 상관없다. 물론 지금까지의 상황은 사소하다고 치부하기에는 조금 과한 수준이었지만…엄밀히 말해 군터는 좋게 말해서 투철한 사명감, 나쁘게 말해 오지랖을 부린 것이었다. 자기 곳간까지 털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살라스는 이제 곳간의 문을 닫아걸자고 말하는 것이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내실을 챙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다.”

재정이 정확히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른다.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달까. 그러나 창고에 쌓인 금의 양이 처음에 비해서 사분지 일 가량으로 줄어든 것을 보면 많이 쓰긴 썼구나 싶었다.

“토벌군을 불러들여라.”

“예.”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살라스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관리들에게 어지간히도 시달린 모양이었다.

“피난민들이 줄기차게 넘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렌의 재앙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 지 몇 달이 흘렀다. 여전히 렌의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토벌군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며, 대적하는 2황자의 잔당 세력 역시 죽기로 버티고는 있으나 그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아무것도 못하고 대치만 이어가는 와중에 렌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렌에서 떠나온 자들이 말하기를, 이제 렌이 자랑하던 황금빛 평야는 온데간데없다고 했다. 남은 것은 갈라진 땅과 마른 강. 스산하게 불어오는 삭풍뿐이라던가. 현재의 렌을 직접 본 이들은 그곳을 저주받은 땅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 *

“찾았다.”

앙상한 나무들이 우거진, 한때는 울창한 숲이었던 곳. 마치 초목의 무덤과도 같은 그곳에 일단의 무리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곳입니까?”

“확실하오.”

두꺼운 로브를 입은 사내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허리춤에 칼을 찬,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그를 호위하듯 따랐다.

“느껴지시오? 바로 저곳. 저곳을 중심으로 인근의 모든 기운이 비틀리고 있소.”

로브를 입은 사내가 가파른 내리막길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칼을 찬 사내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숙련된 무인이었지만, 그의 기감은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조심하시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곳이 맞다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대의 말이 맞소.”

“병사들을 먼저 보내보겠습니다.”

“그러시오. 단,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되면 그 이상 들어가서는 아니 되오. 신주의 봉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뒤따르던 병사 중 몇 명에게 탐색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병사들이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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