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603화 (603/1,064)

603화

렌은 판니른의 남서쪽, 폴츠를 지나면 나오는 제국의 주(州)였다. 일찍이 2황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땅으로, 전쟁이 끝나고 시일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7황자가 제대로 손에 넣지 못한 곳이었다. 군터가 알기로, 지금도 렌에는 2황자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다 들었다. 사실 설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테지만.

“마른 바람이 불고 있답니다.”

“특별할 것 있나?”

이 시기에는 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정상이다. 렌이 온후한 기후를 가진 곡창지대로 유명하다지만 그런 곳에도 서늘하고 메마른 시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수준이 아닌 듯합니다. 나무와 풀이 뿌리가 드러나고 며칠이 지난 것처럼 시들고, 개천이 사라졌으며 강의 물줄기가 희미해졌다고 합니다.”

“…….”

그제야 군터는 렌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기후의 변화라면 그 자체로 재앙이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재앙은 절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거대한 새를 본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새?”

뜬금없이 무슨 새 이야기인가. 앞에 ‘거대한’이라는 수식이 붙기는 했지만 별로 대수로울 일은 아니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새가 있는데, 그중에 덩치가 거대한 놈이 하나 없겠는가.

“새의 덩치가 어지간한 집 한 채만했으며, 몸은 환영처럼 흐릿했다고 하더군요.”

“마수인가?”

요수, 마수, 괴물. 부르는 말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인간이 아닌 이종 중에 두려움을 주는 것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제국에서 그런 것들은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이 성의 지하에도 그런 놈이 하나 있긴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목격했다는 자들의 말도 다 다릅니다. 일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렌에서 재앙이 발생했으며,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렌의 상황이 더욱 엉망이 될 거라는 점입니다.”

“조정이 시끄러워지겠군.”

여기서 말하는 조정은 당연히 테리브란의 조정을 뜻한다. 잔당들을 토벌하고 렌을 점령하기 위해 토벌군이 가 있는 상황이다. 지지부진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몇 개월 전에 들었었는데, 그 후로 별다른 소식이 없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

“어찌 될 거라고 보나.”

렌에 발생한 재앙이 그곳의 전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만약 그 재앙이 자연 발생한 것이라면 두고 봐야겠지만 만약 2황자의 잔당 쪽이 일으킨 것이라면…….

“그들이 다 같이 죽자는 식으로 나왔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럴 정도의 독기가 있는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렌에 틀어박혀서 버티기로 일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렌의 곡창이 망가지면 피를 보는 것은 원정군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 강제로 뿌리를 내리다시피 한 잔당 세력이 더 손해다. 7황자는 이미 가 있는 토벌군이 힘이 빠지면 무리해서라도 또 다른 토벌군을 파병하면 그만이나, 저들에게는 뒤가 없다.

“기이한 일이로군.”

“일찍이 바크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

사실 기후의 변화, 그것도 이런 급격한 변화는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야스메티의 말처럼, 바크렌에서 말이다.

초원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 처음 베이고르와 손을 잡고 바크렌을 침공했을 당시, 그는 쿠엘단이 남긴 법보 카락시아의 힘을 이용해 바크렌 전역의 기후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이번에도 그때와 비슷한 것일까? 법보나, 그에 준하는 술법의 힘이 작용했을까? 모를 일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흥미롭지만, 이쪽이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렌에서 일어난 재앙은 렌의 사정이다. 직접 맞닿아 있는 것도 아니고 사이에 폴츠를 끼고 있으니 렌에서 무슨 큰일이 생긴다고 해도 판니른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것이다. 신경을 쓴다면 렌에서 나오는 곡물 정도겠지만, 어차피 렌에ㅅ 2황자의 잔당들이 농성을 시작한 이후로 렌의 곡물은 끊긴 상태였다. 그 때문에 오른 곡물의 가격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으니,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곡물 가격이 한동안 내려갈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 아쉬울 수는 있지만 말이다.

렌의 일은 판니른이 아니라 데이븐랏지에서, 테리브란에서 논해야 할 것이다. 아마 며칠 뒤, 어쩌면 이미 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 *

“골치아프군.”

회의가 파한 후, 황자는 휑해진 대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대전을 나서지 않고 있던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말을 받았다.

“렌에서 벌어진 일은 여러모로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심상치 않지. 이대로 가면 렌은 저주받은 땅이 되고 말 거요. 그렇게 되면 힘들여 그곳을 얻어봤자 실익이 없게 되겠지.”

“전하께서는…무언가 알고 계시는군요.”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의 어려운 조카님은 무언가 알고 있다. 조금 전 있었던 대전 회의에서 렌을 덮친 재앙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때, 순간이지만 황자의 표정에 균열이 갔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눈치가 빨라. 그새 그걸 보셨소?”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항시 전하의 의중을 살피고 있습니다.”

“점점 외조부를 닮아가는구려. 아들이니 당연한 일인가?”

피식 웃은 황자가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신주(神柱)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소?”

“신주…말씀이십니까.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오. 제국 북부의 명문 귀족가주, 황자의 외숙마저 알지 못하는 것. 황실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는 정보지. 제국의 비사(?史)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것.”

비밀이 비밀이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이들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어떻게든 은밀함을 유지하려는 비밀은 대개 위험하거나 지저분하거나, 둘 중 하나.

‘이 경우는…….’

황좌를 앞에 두고 있는 황자가 제국의 비사.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것이라고 말한다. 황실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황제가 직접 봉인한 비밀일 가능성이 크다.

“신주란, 신을 봉인한 기둥이오.”

“신을 봉인? 정복 전쟁 당시의 일이라면, 토착신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들이라면…군주들께서 사멸시켰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흔히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일부만 사실이오. 그리고 대부 은 사실이 아니지. 토착신들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신은 신. 그들을 사멸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소. 가능하다고 해도 부담이 크지. 신들은 죽더라도 절대 쉽게 죽어주지 않으니까. 그들이 사멸하는 순간 남기는 저주는 군주들이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소. 때문에 그들은 신들을 죽여 없애는 대신 봉인을 시키기로 했지. 굳이 부담을 논하지 않더라도, 그편이 더 나았소.”

“그건 혹시…영지(靈地)와 관련된 것입니까?”

“하하. 외숙은 역시 눈치가 빠르군.”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소. 토착신들이 죽으면 그 땅의 생기가 크게 쇠하지. 기껏 정복한 땅이 쓸모없는 사지(死地)라면 곤란하니까. 선황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신들을 죽이지 않고 봉인하는 것을 허락했지.”

“그것이 신주입니까. 그렇다면 모두 죽었다고 알려진 신들은…그 신주라는 것에 봉인 되었을 뿐,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로군요.”

“멀쩡히 살아있는 것은 아니오. 선황과 군주들이 그렇게까지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어. 음, 반쯤은 죽었다고 봐야 할 거요.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군주들이 토착신들을 봉인하기 전에 손을 써놨다고 했으니.”

“그렇군요. 허면…그 신주라는 것과 이번 일이 관련이 있다 보시는 것은.”

“여기서부터는 추측이오.”

황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신주의 봉인이 깨진 것이 아닌가 싶소.”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하게 굳어졌다.

“신의 조화가 아니라면, 렌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가 힘들어. 법보나, 그에 준하는 힘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그렇다고 보기에는 렌의 재앙은 너무 광범위하오. 피아를 구분하지도 않지.”

바꿔 말하면 목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렌의 재앙이 누군가 거대한 힘을 발휘한 결과라면 그 힘을 발휘함으로써 얻으려고 하는 결과가 있었을 터. 그러나 렌의 일은 그렇지가 않다.

“봉인이 깨졌다면, 그 안에 봉인된 신이 풀려났겠군요.”

“모를 일이오. 봉인이 깨진 것인지, 깨졌다면 얼마나 깨진 것인지는 직접 확인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지.”

“하지만…괴조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전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그저 요행히 숨이 붙어 있던 마수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으나, 전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그게 아니오.”

“그렇다면 무엇을 우려하십니까.”

팔걸이를 두들기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릿해졌다.

적막 속. 규칙적으로 울리는 툭툭 소리가 몇 번이나 이어졌을까. 황자가 무겁게 입을 뗐다.

“군주들이, 선황이 심혈을 기울인 봉인이오. 그런 것이 불과 백수십 년 지났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깨어질 리는 없어.”

“전하의 말씀은 그럼…누군가 의도적으로 봉인을 깨뜨렸다는?”

“다른 가능성이 있소? 있다면 알려주구려. 그렇다면 이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테니.”

“…….”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침묵했다.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기에 듣는 순간 부정부터 하고 봤으나, 곰이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다. 아니, 거의 확실해 보였다. 말마따나 선황과 군주들이 직접 손을 쓴 봉인이 아닌가. 그런 것이 그저 시간이 좀 흘렀다고 해서 깨질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손을 쓴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하지만…그렇다면.’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께서 방금 말씀하시기를, 신주에 관한 것은 제국의 비사이며 황실에서도 아는 자가 거의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신주에 관한 사실을 알고, 손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외숙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아오. 나도 같은 것을 우려하고 있으니.”

0